1988년 4월 4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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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OB베어스 장호연 선수가 노히트노런에 성공했습니다. 장호연 선수는 오늘 사직구장에서 열린 1988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롯데자이언츠 타선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아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사직구장으로부터 직접 소식을 들어보겠습니다. 아무개 기자, 그런데 삼진은 하나도 없었다면서요?

기자 예, 장호연 선수는 오늘 자이언츠의 28명의 타자를 맞아 99개의 공을 던져 사사구 3개만을 허용하는 빛나는 투구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장호연 선수는 오늘 단 한 개의 삼진도 잡아 내지 못했습니다. 특이한 노히트노런이었습니다.

앵커 원래 개막전 선발이 다른 선수였다는 건 무슨 얘기입니까?

기자 예, 원래 OB베어스의 개막전 선발은 김진욱 선수로 예정돼 있었는데요. 김진욱 선수가 훈련 하다 동료 타구에 급소를 맞고, 부랴부랴 김성근 감독이 선발을 장호연 선수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장호연 선수는 '개막전의 사나이'로 불렸다. 프로 데뷔 첫 해, 1983년 개막전부터 장호연은 사고를 저질렀다. MBC청룡과의 경기에서 장호연은 6안타를 산발로 처리하며 7-0 완봉승을 기록한다. 최초의 '개막전 신인 완봉승'이자 프로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3번째 투수로 기록됐다. 장호연은 개막전 최다 출장(9경기)과 최다승(6승2패) 기록을 갖고 있다.

장호연은 빠른 공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의 투수가 아니었다. 최고 구속은 140km를 넘기가 어려웠지만, 장호연의 다채로운 변화구는 타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변화구는 홈플레이트를 어지럽혔고, 간혹 미트에 꽂히는 130km짜리 속구(?)는 타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346게임에 등판한 장호연의 통산 성적은 109승 110패 17세이브.

'1-0으로 지는 것보다는 10-9로 이기는 투수가 낫다', '굳이 삼진을 잡을 필요가 있는가'. 얼핏 쉽게 들리는 독특한 '투구 철학'은 장호연의 연구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공허한 얘기로 끝났을 것이다. 장호연의 '새로운 공'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실밥과 손가락, 늘 새로운 투구를 연구했다. 오죽했으면 새로 연구한 공을 실전에서 써먹다가 코치에게 화장실로 끌려갔다는 일화가 전해질까. 덕분에 장호연은 슬라이더와 커브의 장점을 극대화한 '슬러브'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최초의 투수'가 됐고, 스트라이크보다는 볼을 기가 막히게 잘 던지는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괴롭혔다. 통산 3.26의 방어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장호연만큼 '스토브리그'라는 말에 어울렸던 선수가 또 있을까. 장호연이란 이름은 연봉조정신청자 명단에 단골로 올라왔고, 1991년에는 처음으로 연봉조정위원회 결정을 거부하고 6개월 동안 야구장을 떠나기도 했다. 당연히 단체 훈련은 장호연과 어울리지 않았다. 선수생활 12년 동안 제대로 단체 훈련에 참가한 횟수는 단 3번.

그런데도 개막전에 가장 많이 등판했다는 것.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투수라는 것은 장호연이 얼마나 '자기 관리'에 충실한 선수였는지를 증명하고 있다.누구보다도 자기계발에 당당했던 '장호연'. 그의 이름은 작년 현대유니콘즈 조용준 투수의 '조라이더'열풍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신일고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장호연 감독(43)은 과학적인 이론에 효과적인 트레이닝 방법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연구를 그치지 않고 있는 장호연 감독. 그가 지도자로서 어떤 꽃을 피울 지 기대가 크다.

덧붙이는 글 2003 프로야구 개막전에 맞춰 장호연 감독 인터뷰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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