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와 프로 사이에서 갈등하던 선동열이 마침표를 찍었다. 1985년 3월 25일 해태 타이거즈 구단은 "선동열과 계약금 1억원, 연봉 1천2백만원에 공식 합의했"며 "25일자로 KBO(한국야구위원회)에 선수 등록을 마쳤다"고 전격 발표한다.
아마 야구계가 들끓기 시작했다. KBO가 '프로·아마간 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982년 12월 1일, KBO와 대한야구협회는 "실업팀에 등록된 실업선수중 대학졸업자는 2년, 고교졸업자는 3년이 지난 후에야만 프로 구단에 입단할 수 있다"고 합의했다. 아마야구와 프로야구간 질서를 유지하고 상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공언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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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보도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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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소속으로 실업선수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3월 16일에 이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실업 시즌 개막 시범경기에도 등판한 뒤였다. 1985년 3월 26일자 중앙일보는 "아마·프로야구간 반목과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고교 또는 대학 재학중인 선수가 프로로 넘어가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게 됐다"며 "선동열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한다.
한 아마야구 관계자는 "시즌 오픈 전에까지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태도를 바꾼 것은 하나의 도의적인 문제"라고 비난한다. 선동열은 "아마 고수를 외치다가 하루 아침에 프로로 진로를 바꾸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나 프로에서 보다 열심히 뛰어 떨어진 신의를 만회하겠다"며 "호남팬들의 열화 같은 성화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진로를 바꾸게 됐다"고 덧붙인다.
'내가 옳지 못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이미 거인이었다. 당시 선동열은 군대 문제로 눈물을 머금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다. LA다저스가 50만달러 계약금을 제시하며 유혹했을 정도였으니, 타이거즈의 스카우트 제의가 맘에 찰 리 없었다. 타이거즈가 제시한 계약금은 1억2천만원에 연봉 1천2백만원, 선동열은 1억7천만원에 5천만원을 요구했다.
어쨌든 선동열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한야구협회는 '출전 정지 가처분 소송'을 걸며 선동열의 시즌 전반기 등판을 저지했다. 가뜩이나 프로야구 창설과 함께 위기 의식을 갖고 있던 대한야구협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동열은 이미 프로의 '손'을 들어준 뒤였다.
'선동열 파문'을 기점으로 아마 야구 질서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한일은행 소속이었던 김용수도 실업 생활 1년만에 MBC청룡과 입단 계약, 선동열의 뒤를 따른다. 선동열은 KBO도 흔들었다. 시즌 절반만 출장하고도 1.70의 방어율로 생애 첫 타이틀을 거머 쥔 선동열은 1986년 연봉 협상에서 100% 인상된 2천4백만원에 계약을 체결한다. 연봉 인상 상한선 25% 규정을 거뜬히 무너뜨린 것이다.
그만큼 선동열의 무게는 대단했다. 1985년, 선동열이 협정을 지켰다면 아마 야구의 퇴보 속도는 얼마나 늦춰졌을까. 아니 그 이전에 메이저리그에 바로 진출했다면 우리 프로야구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지금쯤 명예의 전당에서 선동열의 이름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