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문에서는 골잡이 '알리 다에이' 선수가 부친상으로 빠진 이란팀을 한 수 아래라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10일 밤 부산에서 벌어진 준결승전에서 이란은 한국 대표팀 문전을 위협하는 공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적어도 120분 경기 내용만으로는 그 신문이 그렇게 쓸 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승부차기 끝에 개최국 한국에 5:3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당당히 일본과 겨루는 결승전에 올랐다.
 이란과 승부차기까지 간 경기 결과 패배한 한국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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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공격 상황에서 상대 수비수 한두 명을 유연한 몸놀림으로 제칠 수 있는 개인기가 아쉬웠다. 우리 미드필더와 공격수들의 주무기는 빠른 연결과 개인적인 스피드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에서는 자기에게 넘어온 공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연결해주는가도 중요하지만 발목을 유연하게 놀리며 한 두 명의 상대 선수를 제칠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앞에 서 있는 미드필더들이 한두 명 돌파당할 때 뒤에 물러서 있는 수비수들은 만사를 제치고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달려나온다. 이때 생기는 빈 공간에서 골이 터질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 대표팀이 여러 차례 경기에서 보여주었듯이 이천수, 최태욱, 최성국 등이 있는 측면까지의 연결은 박진감 넘치고 빠르다. 이른바 약팀에게는 이 다음 상황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날 만난 이란처럼 네 경기 평균 실점이 0.25골 정도인 거칠고 강한 수비수들 앞에서는 한국이 보여준 단조로운 측면 공격은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실제로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서 수없이 많은 측면 센터링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우리 팀 머리에 맞춘 것은 세 번 정도에 불과하다. 후반 6분 이천수 선수가 왼쪽에서 뜬 공을 그대로 넘겨준 것을 골문 앞으로 달려들던 김은중 선수가 몸을 날리며 머리받기한 장면, 아쉽게도 골문 왼쪽 모서리를 살짝 넘어갔다. 후반 17분 역시 이천수 선수가 왼쪽 미드필드 지역 35도 각도에서 얻은 프리킥을 오른발로 낮게 감아찼고, 이 공은 골문 가까운쪽으로 뛰어들던 수비수 조성환 선수의 이마에 맞았지만 아깝게 왼쪽 골문을 빗나갔다. 연장 전반 11분 이영표 선수가 왼쪽 미드필드 지역에서 수비수 한 명을 따돌리며 오른발로 크게 감아올린 볼을 이동국 선수가 이마로 받았지만 골문 오른쪽을 살짝 벗어났다. 지난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 연장전에 터진 안정환 선수의 머리받기 골든골이 그대로 연상되는 장면이었지만 상대 수비수를 약 1미터 정도 떨어뜨린 상태에서 이동국 선수의 머리받기는 부정확했다. 이런 세 장면을 제외하면 한국 대표팀의 측면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전반전 20분을 기점으로 이란에게 미드필드 지배를 허용했던 약 10여분을 제외한 경기 시간 줄곧 이란의 골문을 쉴새 없이 두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 정확도는 형편 없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지난 바레인과의 8강전부터 전격 기용된 박지성 선수의 활약은 동료 공격수들의 부진으로 결국 두 경기 연속 빛이 바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플레이를 눈여겨보면 자기가 서 있는 곳과 거리가 먼 곳에서 상황이 벌어져도 쉴새없이 빈 공간을 찾아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아시아권이고 J리그라지만 그가 수년간 인정받을 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는 한국 대표팀 미드필더 중에서 보기 드물게 유연한 드리블을 할 줄 아는 선수다. 거기에 송곳처럼 예리하게 패스해주는 능력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빠르고 유연하게 미드필드를 휘저을 때, 우리 공격수들 중 한 명 정도만이 빈 공간을 찾아 움직였을 뿐이다. 최소한 그런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상대 수비수들이 자신이 마크해야 할 중요한 상대 공격수를 내버려두고 박지성에게 달려나갔을 때, 이 공을 넘겨받을 만한 위치에 있던 선수들이 더 많이 움직였어야 하고 더 창의적으로 공간을 만들었어야 했다. 연장전 전반이 끝날 무렵 늦은 감이 있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박동혁 선수를 넣고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했던 김두현 선수를 뺐다. 이후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박지성 선수가 수비 부담에서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많은 우리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진 뒤였고 남은 시간은 겨우 15분 정도였을 뿐이다. 선수들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100분이 넘도록 고수하던 딱딱한 측면 돌파는 계속되었다. 지친 이란 선수들보다 빠른 스피드로 수비수 한 두 명을 제쳐놓기는 했지만 다음 동작에서 유연한 드리블이나 세련된 패스, 창의적인 공간 침투가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따낼 확률을 50%로 떨어뜨리는 공중볼 다툼. 194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란 문지기 에브라힘 미르자포르의 두 손에 잡히거나 주장 골모하마디가 이끄는 수비수들에게 거듭 차단당했다. 후반 종료 직전 이란 수비수 두 명의 실수로 얻은 천금같은 기회와 연장 후반 8분 이천수의 빨랫줄같은 연결을 받은 이동국의 오른발 슈팅 두 번은 승부차기가 끝나고 나서 후회한들 정말 소용없는 일이었다. 타일랜드와의 3,4위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월드컵 이후 우리 축구 위상과 실력 자체를 정말로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이런 기회를 뼈아픈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어설픈 발재간이나 스피드만 앞세우며 약체들 앞에서 '공격 축구'를 자랑만 할 것이 아니다. 축구는 골로 말한다. 빠른 선수가 직접 골을 터뜨리기도 하고 박진감 넘치는 연결을 통해 골이 연결되기도 한다. 이에 관중들은 환호한다. 그 현장감은 팬들의 눈을 쉽사리 떼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축구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첫째 매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축구팬들은 기술적인 면에 더 매료된다. 많은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뼈아픈 좌절의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마다 우리는 스피드에서 졌다기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술이 부족해서 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과거 한국 축구가 이름을 날렸던 70년대부터 지금 2002년까지 줄곧 '무기'로 내세웠던 것은 빠른 축구였다. 조금 나쁘게 표현하자면 뻣뻣한 축구를 구사했다고 할 만하다. 거의 모든 선수들의 체격 조건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수비수들의 태클 플레이나 미드필더를 중심으로 한 압박 플레이는 어떤 축구를 봐도 일상화된 '현대 축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금껏 우리 축구가 고집했다고 할 수 있는 '뻣뻣한 축구'를 빨리 탈피하는 길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달라지게 한다. 측면 공격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빠른 축구에서 하루 아침에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축구에다가, 조금 더디더라도 참고 기다리며 유연한 기술을 접목시키자. 지금 상황에서 동메달을 따느냐 못따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또한, 몇 몇 선수들의 병역 혜택이 물거품처럼 날아갔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원인도 찾아 보자. 아픈 살을 도려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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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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