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3월 영국의 BBC 방송은 자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를 '최고의 문학가'로 선정했다. '1천년래 최고'가 아닌, '20세기 최고'로.

20세기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을 제쳐놓고 17세기에 죽은 그를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BBC는 "시공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변함없는 감동을 안겨준 작품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분히 앵글로색슨 우월주의가 깃들어 있는 BBC의 평가지만, 그의 작품이 영미권 국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준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중 하나인 '오셀로'는 그동안 20번이 넘게 영화화됐다(IMDB: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1952년 만들어진 오손 웰스의 '오셀로'이고, 프랑코 제페렐리 감독이 베르디의 동명 오페라를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에게 오셀로 역을 맡겨서 영화화한 작품도 있다. 1995년 올리버 파커 감독이 로렌스 피쉬번(오셀로 역), 이렌느 야콥(데스데모나 역), 케네스 브래너(이야고 역)와 만든 작품이 극장판 최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의 'O'는 무대를 인종 갈등이 끊이지 않는 현대의 미국으로 옮겨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현대적으로 해석된 바 있지만, '오셀로'에 드러난 흑백간의 인종 갈등 문제가 'O'만큼 두드러지게 보인 적은 없었다.

제목에서부터 "셰익스피어 비극을 그대로 들고 온 게 아니다"고 강변하는 듯한 'O'는 그러나 '오셀로'의 극적 구성을 그대로 차용한다. 그러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에게 '요즘의 미국에서 있음직한 얘기'로 비친다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다.

오딘은 순전히 농구 실력만으로 백인들만이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팀을 주(州, 사우스캐롤라이나) 정상으로 이끈다. 동급생들로부터의 높은 인기와 NBA 스카우터들의 구애를 독차지한 '미래의 수퍼스타'는 부잣집 백인 여자친구의 마음까지 빼앗고 만다. 오딘은 일견 모든 것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악역 이아고'의 등장과 함께 파멸의 길에 들어선다.

원작에서 동료에게 부관 자리를 빼앗긴 뒤 앙심을 품은 이아고는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표면적인 동기와는 달리 악행을 거듭함에 따라 타인들이 겪는 고통을 보고서야 쾌감을 느끼는 '악의 화신'이었다. '진주만'에서의 슬픈 눈빛으로 단번에 10대 팬들의 주목을 받은 조시 하트넷이 연기한 휴고 굴딩이 '현대의 이아고'역을 맡는다. 하트넷이 '진주만'의 유명세를 얻은 후에도 악역 연기를 맡을 용의가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의 창백한 표정 연기는 의외로 악역에 잘 어울린다.

원작과 다른 것은, 영화에서는 10대에 불과한 휴고의 악행에 대해 충분한 동기 부여를 했다는 것이다. 휴고는 학교 자축 행사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듀크 코치(마틴 쉰)가 "오딘을 아들처럼 사랑한다"고 말하자 크게 낙심한다. 아버지에게조차 '실력이 없다'고 면박 당하고, '차세대 NBA 유망주에 가린 평범한 선수'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휴고는 오딘과 데시를 갈라놓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오딘은 농구는 잘하지만, 의외로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오딘은 "네 여자친구가 또 다른 팀 동료 마이클(앤드루 키간)과 몰래 사귄다"는 휴고의 말에 놀아난다. 오딘은 행복의 절정에서 만난 데시를 잃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자 결국 사랑하던 여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다. 주변 인물들도 거친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희생되고 만다.

대작가의 인생 통찰을 다룬 비극을 10대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어쩐지 힘에 부친 것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요소가 'O'의 현실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한 가지는 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른 '학교 폭력 사건'.

학교내 급우간의 갈등이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하고, 부모의 무관심과 급우들의 냉대속에 자란 일부 10대들이 마약을 탐닉하거나 자신의 불만을 폭력적으로 해소한다는 설정은 당대 미국의 고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제작사인 미라맥스는 1999년 영화 촬영을 마쳤지만, 같은 해 4월 발생한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의 충격으로 영화 개봉을 무려 2년간이나 미뤄왔다. 영화에서와 같은 총기 사건을 조장할 수 있다는 비판을 우려해서 개봉을 늦췄던 것(결국 라이온스 게이트가 판권을 인수, 이번에 개봉할 수 있었다. 영화속 10대들이 마약을 흡입하며 정신적 의지처로 삼는 장면은 한국 개봉시 무수정 개봉 여부를 놓고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은 미국내 인종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도 영화의 리얼리티를 유지하는 또 다른 요소가 된다. 오딘이 휴고의 말만을 듣고 순식간에 질투심에 휘말린 것도 자신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농구 하나만큼은 최고지만, 백인 여자친구와 사귄다는 이유로 "딸을 겁탈한 적이 없냐"는 교장의 추궁에 시달려야 하는 오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딜 감히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사귀나"라는 미국 주류 사회의 편견이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여담이지만, 인터넷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은 줄리아 스타일즈가 연초 개봉작인 '세이브 더 래스트 댄스(Save The Last Dance)'에서도 흑인 고교생과 사랑에 빠지는 10대 백인 소녀역을 맡은 것과 관련, 그녀의 '소신'을 지지하는 무리와 헐뜯는 무리간의 논쟁이 벌어질 기세다.

'오셀로'의 작품 원전은 16세기 중반 이탈리아 작가가 쓴 설화집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가가 쓴 가공의 이야기로 뛰어난 비극을 만들어냈는데, 5백여 년이 지나도록 작품의 생명력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인종문제'를 소재로 채용한 안목의 현대성을 평가할 만하다.

개봉작 치고는 상대적으로 적은 1434개의 극장을 잡은 'O'는 노동절 연휴동안 690만 달러의 수입으로 7위를 기록했다. 1위는 공포영화 '지퍼스 크리퍼스'로 1996년 '크로우: 천사들의 도시'이후 5년만에 노동절 연휴 데뷔작으로는 가장 많은 158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3주간 정상을 지킨 '아메리칸 파이2'는 3위로 미끄러졌다.

다음은 이번 주 박스 오피스 순위. ( )는 지난 주 순위, +는 데뷔작.
1 (+) Jeepers Creepers ................ $15.8 million
2 (2) Rush Hour 2 ..................... $11.8 million
3 (1) American Pie 2 .................. $11.7 million
4 (4) The Others ...................... $10.0 million
5 (5) Rat Race ........................ $ 9.2 million
6 (7) The Princess Diaries ............ $ 7.6 million
7 (+) O ............................... $ 6.9 million
8 (3) Jay and Silent Bob Strike Back .. $ 6.4 million
9 (6) Summer Catch .................... $ 5.0 million
10(8) Captain Corelli's Mandolin ...... $ 4.1 million

덧붙이는 글 | 오래간만입니다. 매주 글을 쓴다는 원칙이 1년여만에 처음으로 깨졌네요. 지난 주에는 소개할 만한 영화가 없어서 그냥 흘려보냈지만, 그다지 마음 편한 한 주는 아니었습니다. 

 설사 건너뛰더라도 혹평이든 호평이든 가치가 있는 영화를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주 쉬었습니다. 애초에 설정했던 순위 소개보다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로 기사의 방향이 바뀌었다면 더더욱 가치있는 영화를 선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변함없는 편달을 바랍니다.

 영화 'O'를 보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이른바 '남남갈등' 논쟁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는 영화 내용을 둘러싸고 이른바 백인우월주의자들과 인종평등론자간의 갑론을박도 나타나고 있구요.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영화 내용을 보지 않은 사람들, 특히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가 성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분격해하는 백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인식은 1960년대에 절정을 이룬 흑인 민권운동의 결과, 적어도 지배적인 담론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인종갈등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지요.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적어도 인종갈등에 대한 논쟁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극단론이 침잠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자는 온건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남남갈등' 역시 이런 원칙에서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화와 이해보다는 어떻게든 판을 깨보겠다는 양극단론이 힘을 얻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럼..

2001-09-04 04:3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오래간만입니다. 매주 글을 쓴다는 원칙이 1년여만에 처음으로 깨졌네요. 지난 주에는 소개할 만한 영화가 없어서 그냥 흘려보냈지만, 그다지 마음 편한 한 주는 아니었습니다. 

 설사 건너뛰더라도 혹평이든 호평이든 가치가 있는 영화를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주 쉬었습니다. 애초에 설정했던 순위 소개보다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로 기사의 방향이 바뀌었다면 더더욱 가치있는 영화를 선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변함없는 편달을 바랍니다.

 영화 'O'를 보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이른바 '남남갈등' 논쟁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는 영화 내용을 둘러싸고 이른바 백인우월주의자들과 인종평등론자간의 갑론을박도 나타나고 있구요.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영화 내용을 보지 않은 사람들, 특히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가 성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분격해하는 백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인식은 1960년대에 절정을 이룬 흑인 민권운동의 결과, 적어도 지배적인 담론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인종갈등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지요.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적어도 인종갈등에 대한 논쟁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극단론이 침잠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자는 온건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남남갈등' 역시 이런 원칙에서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화와 이해보다는 어떻게든 판을 깨보겠다는 양극단론이 힘을 얻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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