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특정인의 외모를 '혹성탈출 같다'며 킥킥대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원숭이처럼 못 생겼다"는 의미의 비유가 영화 제목에 기초해 만들어질 정도로 1968년작 '혹성탈출'의 원숭이 특수분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팀 버튼 감독의 새 영화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은 이같은 전작의 유명세를 타고 제작됐다. 버튼은 자신의 신작이 전작의 복사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리메이크(remake)가 아닌, 리이매지닝(re-imagining)이라고 표현했지만, 분명한 것은 68년작과 앞서 63년 발간된 피에르 불의 원작소설 '원숭이 행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버튼은 직접적인 비교가 되는 68년작과의 비교를 피하기 위해 원작 소설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인다. 우선 원작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주무대는 지구가 아니다(68년작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분한 조지 테일러가 불시착한 곳이 지구라는 사실을 라스트신에서 드러냈다).

서기 2029년. 우주로 떠난 미 공군 대위 리오 데이비슨(마크 왈버그)의 임무는 원숭이가 시험 우주 비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 그러나 모선(母船)이 이상한 전자파에 휘말려 원숭이를 태운 소형우주선이 우주 공간에서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원숭이를 구하기 위해 소형 우주선으로 모선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그조차 조난을 당해 지구가 아닌, 원숭이가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행성에 불시착한다. 그는 착륙하자마자 행성의 다른 인간들과 함께 군부 실력자 타드 장군(팀 로스)에 의해 포획된다.

원로원 의원의 딸이자 '인권' 운동가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팔려간 리오는 아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인간들을 데리고 자신에 앞서 행성에 도착한 우주선의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리오 일행의 도주를 빌미삼아 원로원 의원들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타드는 인간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병력을 총동원한다.

2001년작은 68년작에 비해 강렬한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 68년작이 만들어진 해에는 월남전 반대 시위와 프랑스의 5월 혁명으로 반전반핵과 사회진보의 물결이 절정에 달했다.

영화는 특수분장도 인상적이었지만,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 테일러가 자유의 여신상 잔해를 보고 울부짖는 라스트신이 관객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았다. 비어도 들어가고 요즘 이 정도의 영어를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 같으니 어감을 살리기 위해 테일러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다.

"Finally, really did it! You Maniacs! You Blew It Up!! Damn You! God Damn You! All To Hell!!"

60년대 후반부터 '이지 라이더'와 '미드나잇 카우보이' 등 뉴아메리칸 시네마 계열의 영화들이 돌풍을 일으켰지만, 해피엔딩이 아닌 메이저 오락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어찌됐건 기이한 체험으로 남아 있다.

프랭클린 샤프너가 연출한 작품에서 헤스턴의 통곡은 이념 대립을 해결 못하고 핵전쟁으로 치달은 인류의 어리석음을 질책한 것으로 해석됐다. 샤프너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인류 문명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은 피에르 불의 소설보다 한발 앞서 나간 작품으로 평가된다.

68년작에 비해 2001년의 버튼은 세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삼가고 있지만 우회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읽어낸다.

원숭이 행성의 군부 실력자가 유약한 원로원을 협박해서 제국의 전권을 장악한다는 설정은 고대 로마시대의 크라수스가 스팔타카스의 난 진압을 위해 원로원으로부터 특권을 위임받았던 상황을 역사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이는 작년 흥행작 '글래디에이터'가 보여준 로마제국이 하늘 아래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을 상징한 것의 연장선에 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과 대화할 능력도 있고, 평화로운 공존을 희망하는 인간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 노예로 삼으려고 한다. '21세기의 로마제국'이 된 미국 역시 탈냉전으로 뚜렷한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대적할 능력이 없는 일부 국가들을 가상 적국으로 설정, 미사일 방어(MD)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시대의 변화는 미국이 세상을 보는 가치관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음을 시사한다. 68년작에서 인간은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능력도 없고, 조직화도 안된 미개한 존재로 그려진 데 반해 신작속의 인간은 원숭이들의 말을 알아듣고 집단생활을 하는, 훨씬 진화한 존재로 그려진다. 자국 이외 타 지역에 대해 무지했던 60년대의 미국이 21세기 들어서 상대적으로 계몽되었다고 해야 할까?

68년작에서 테일러를 돕는 코넬리우스와 지라 커플의 경우 선조의 비밀을 캐야겠다는 학술적인 관심이 그를 돕는 직접적인 동기를 이룬다. 반면 2001년작의 아리는 억압받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버튼은 공존을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클라이맥스에 인간과 원숭이의 싸움을 중단시킬 메신저를 보내지만, 막판 반전을 통해 이같은 노력들이 언제라도 헛수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시스템 속의 이단아'이면서도 시스템을 풍성하게, 결과적으로 강화시킨 버튼의 허무주의적인 결론이다.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처리한 버튼은 대신 자신의 내공을 원숭이 캐릭터들의 세부 묘사와 정교한 세트 작업에 쏟아 넣는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의 전투신은 긴 기다림을 보상해줄 만큼 강렬하지 못하다.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지도해야 할 리오가 직접 뛰어나간다는 설정도 진부하고, 원숭이와 인간들의 육탄전도 '패트리어트'나 '글래디에이터', '미이라2'의 스펙터클을 넘지 못한다.

'혹성탈출'은 할리우드 여름 흥행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29일 현재 캐나다와 미국에서 벌어들인 돈이 6960만 달러(잠정 추산치). 30일 최종 검산까지 이 기록이 유지된다면, '혹성탈출'은 '미이라 2'(6810만 달러)를 제치고 역대 주말 흥행 2위에 오르게 된다. 역대 1위는 97년 개봉된 '주라기 공원 2'의 7210만 달러.

원작 영화의 높은 지명도와 영상 예술가로서의 감독의 명성 등에 힘입어 선전이 예상되어 왔지만, 첫 주의 폭발적인 반응은 세대를 아우르는 기대감을 최대한 흥행으로 연결짓기 위한 폭스의 전력투구 홍보가 크게 작용했다. '미션 임파서블 2'(3653개)와 '슈렉'(3587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많은 무려 3493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관객의 62%가 25세 이상의 연령층으로 나타나 68년작에 대한 향수가 흥행 돌풍에 크게 기여했음을 나타낸다.

1편의 흥행 성공으로 '혹성탈출' 속편 제작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3부작 프로젝트'로 기획된 '혹성탈출'은 1편의 반전을 생각한다면 원작소설에서 묘사한 '차를 운전하고 TV를 보는 도시 원숭이들의 삶'이 속편에서 조금 더 생생하게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혹성탈출'의 개봉으로 타격을 입은 '주라기 공원3'은 관객이 무려 56%나 빠지며 2위에 머물렀다.

다음은 이번 주 박스 오피스 순위. ( )는 지난 주 순위, +는 데뷔작.
1 (+) Planet of the Apes ................. $69.6 million
2 (1) Jurassic Park III .................. $22.5 million
3 (2) America's Sweethearts .............. $15.7 million
4 (3) Legally Blonde ..................... $ 9.0 million
5 (4) The Score .......................... $ 7.1 million
6 (5) Cats & Dogs ........................ $ 4.5 million
7 (8) Dr. Dolittle 2 ..................... $ 4.2 million
8 (6) The Fast and the Furious ........... $ 3.8 million
9 (7) Scary Movie 2 ...................... $ 2.6 million
10(11) Shrek ..............................$ 1.7 million

덧붙이는 글 영화는 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부분들이 예상 외의 흥미거리를 제공합니다. 그 중 하나는 68년작의 찰턴 헤스턴이 신작에서는 원숭이로 분장하고, 카메오 출연했다는 것이죠. 그것도 극단적인 인간혐오론자인 타드의 죽어가는 아버지로.

헤스턴의 캐릭터는 임종 직전 아들에게 조상 대대로 전해오던 구식 권총을 건네주며 "인간의 잔인함은 그들의 창의성과 함께 대대로 전해진다. 인간만큼 폭력적인 생명체는 없다"고 경고합니다. 미국 총기 협회장(NRA)을 지내고 있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하면, 미국의 관객들에게 그의 이같은 언급은 아이러니하게 들립니다. 물론 헤스턴은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변명할 테지만요.

개인적으로는 꼭 극장에서 볼 영화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막판 반전이 1편보다 2편에 대한 기대감을 더 높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

PS.부탁이지만, 이미 보신 분이라도 이번 주에 영화보실 분들을 위해 독자의견에 반전 부분에 대한 얘기를 안하셨으면 합니다. 기본적인 예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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