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미국의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는 창간 45주년 기념으로 '20세기의 섹시 스타 100인'을 선정, 발표한 바 있다. 1위는 '관능의 화신' 마릴린 먼로. 2위는 먼로에 비견될 제인 맨스필드였고, 3-10위까지는 라켈 웰치, 브리지트 바르도, 신디 크로포드,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 테일러, 파멜라 앤더슨, 보 데릭, 진 할로가 차지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크로포드와 로렌, 테일러를 제외하고 금발미녀가 무려 7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미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플레이보이'가 "금발이 미인을 돋보이게 한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여성 중에 '자연산 금발(blonde)'이 없기 때문에 기자는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언제부터 '금발미인은 멍청하다', '똑똑한 여인은 섹시하지 않다'는 통념이 생겼을까? 영화 '리걸리 블론드(Legally Blonde: '합법적으로 금발'이라는 멍청한 타이틀이 붙을 것 같지는 않다)'중 워너(매튜 데이비스)가 엘(리즈 위더스푼)에게 던지는 대사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If I'm going to be a senator, I need to marry a Jackie, not a Marilyn.(상원의원이 되려면 마릴린 먼로보다는 재클린 케네디(존 F. 케네디의 부인)와 결혼해야 할 것 같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마릴린 먼로와 번갈아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는 이제 20세기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스캔들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케네디도 금발 여배우와의 유희 때문에 조강지처 재클린을 버리지는 않았다. 케네디의 사후 그의 바람기가 세상에 알려지며 재클린이 결국 그를 버렸지만. 지금 워너는 그같은 '세상의 공식'을 들이대며 절교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당신을 사랑했지만,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며.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친구들과 쇼핑을 즐기며 UCLA 졸업 후 잘 생긴 남자친구와의 근사한 결혼식을 꿈꾸던 엘에게 이같은 요구가 즐겁게 들리지는 않았을 터. 정계 입문을 꿈꾸는 명문가의 남자친구는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해 동부의 보스턴으로 훌쩍 떠나고, 그녀는 남자친구를 다시 찾겠다는 일념에 역시 하버드 로스쿨에 지원한다. 학부에서 'fashion merchandising'을 전공한 그녀에게 '법대 진학'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진학 시험에서 썩 좋은 성적을 거둔다. 학부 성적도 평균 4.0에 이르고, 독특한 자기 소개 비디오가 눈길을 끌어 결국 입학 허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명문대 입학 = 졸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미 대학가, 더더군다나 아이비리그에서 그녀는 출발부터 좌충우돌하게 된다. 애써 하버드까지 찾아왔지만, 워너의 옆자리를 차지한 비비안(셀마 블레어)의 존재가 우선 거슬린다. '날라리 학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기들과 교수들의 눈길도 곤혹스럽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 물론 엘은 위기를 극복해낸다. 아니, 위기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LA에 있을 때는 별로 쓸 일이 없었던 노트북 컴퓨터를 사서 강의실에 들고 다니고, 동네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이 여성지를 뒤적일 때 법전을 보기 시작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입학 초 남자친구밖에 보이지 않던 엘이 주위의 다른 친구들과 융화하고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도 엘을 배려하게 된 것도 변화다. 그러나 그 변화는 너무도 순식간에 손쉽게 이뤄져 관객들이 수긍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코미디 영화로서 '리걸리 블론드'의 웃음 포인트는 주인공 엘과 하버드의 차이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데 있다. 상반기 중 모 공중파 방송에서 'S대생과 사귀는 날라리'라는 소재를 쇼프로 코너로 만들었다가 지탄을 받았는데, 미디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전혀 다른 둘의 어색한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영화, 그것도 웃기기 위한 영화이기에 이같은 설정은 용납이 된다. UCLA에서 sorority club(특권층 여대생들의 귀족클럽?)의 일원으로 있을 때의 엘은 자신의 그룹과 섞여 있을 때는 정말 자연스럽게 보인다. 문제는 엘이 어마어마한 이삿짐 트럭을 뒤로 하고 하버드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부터. '공부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학생들의 옷차림부터 수수하다. 미래의 사회 엘리트가 될 이들은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고, 서민적인 펍에서의 맥주 한잔으로 젊음을 달래고 있다. 언뜻 반(反)부르조아적인 정서를 내비치는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부모 잘 만나 모든 것을 이미 누리는 듯한 엘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제작사인 MGM의 경영진에도 하버드 출신이 꽤 있을 듯 싶은데, 모교의 학풍을 묘하게 비꼬는 코미디의 기획을 용인한 것을 보면, '대'(돈벌이)를 위해 '소'(모교 위신)를 희생하는 미국인들의 배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봤자 코미디인 걸... 물론 엘은 학업성적에서 타인들에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대등한 관계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안다. 총명한 우등생으로 변신한 LA 날라리는 내친 김에 캘러핸 교수(빅터 가버)가 맡은 살인사건 재판의 변호팀 중 일원으로 발탁돼 승소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글쎄, '내 사촌 비니(My Cousin Vinnie)'에서 3류 변호사 조 페시가 펼친 막판 변론이 마음에 들었는가? 그런 식의 결말에 흡족해한다면, '리걸리 블론드'의 뻔한 결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도. '블론드의 사회학'에 대한 분석을 포기한 영화는 내용보다는 포장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데, 영화를 구해내는 것은 엘 역의 리즈 위더스푼이다. 그녀는 99년작 'Election'에서도 똑똑한 고교 학생회장 후보를 깔끔히 소화해낸 바 있는데, '리걸리 블론드'는 그녀가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영역이 코미디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로 스타덤에 오른 멕 라이언이 올해 마흔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할리우드는 서둘러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그녀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라이언에 필적할 연기력을 가진 줄리아 로버츠는 이제 특정 장르의 캐릭터 배우로 남기에는 너무나 활동 대역이 넓어졌고, 캐머런 디아즈와 티아 레오니는 아직 검증이 안됐거나 나이가 많다는 흠이 있다. 만 25세의 '엄마 배우' 위더스푼은 이 영화의 재미있는 장면 대부분에 나와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비슷한 캐릭터 연기를 요구받을 터인데 앞으로 '20세기의 라이언에 대한 21세기 세대의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라이언의 인기가 같은 여성들의 막강한 지지에 힘입었던 것을 감안하면, '리걸리 블론드'의 관객 4명 중 3명이 여성이었다는 통계도 의미를 준다. 불과 1800만 달러의 저예산이 들어간 '리걸리 블론드'는 개봉 첫 주말 204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1위에 올라 흥행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MGM으로서는 올해 '하니발'과 '핫 브레이커스'이후 세 번째 1위 개봉작으로 기록됐다. '007' 시리즈를 제외하곤 최근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었던 MGM은 세 작품의 연속 히트를 기록한 가운데 내달 3일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안젤리나 졸리가 함께 공연하는 '원죄(Original Sin)'를 준비하고 있다. 로버트 드 니로와 에드워드 노턴이 주연을 맡고, 말론 브란도와 안젤라 바셋이 조연으로 뒷받침한 '스코어(Score)'는 '리걸리 블론드'에 밀려 2위로 밀려났다. 그러나 극장당 수입에서는 8924달러로, 7767달러의 '리걸리 블론드'를 제쳤다. 캐나다 몬트리얼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는 배우들의 지명도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3위로 떨어진 '캣츠 앤 독스(Cats & Dogs)'는 개봉 12일만에 5890만 달러를 벌어들여 손익 분기점인 6천만 달러의 예산의 목전에까지 다가갔다. 한국에서는 27일 개봉 예정. 이번 주 1위로 점쳐졌던 '파이널 판타지(Final Fantasy:the Spirits Within)는 1150만 달러로 4위로 처졌다. 개봉 첫날인 지난 11일 5백만 달러 수입으로 기세 좋게 출발했으나 주말 동안 관객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주 탑10 영화들은 모두 1/3 이상의 관객 감소를 보이며 전체 흥행 성적도 크게 줄어들었다. 탑10에서 사라진 드림웍스의 '슈렉'은 이번 주까지 2억4730만 달러를 벌어들여 토이 스토리2를 제치고 '라이언 킹'(3억1290만달러)에 이어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됐다. 다음은 이번 주 박스 오피스 순위. ( )는 지난 주 순위, +는 데뷔작. 1 (+) Legally Blonde ..................... $20.4 million 2 (+) The Score .......................... $19.0 million 3 (1) Cats & Dogs ........................ $12.0 million 4 (+) Final Fantasy: The Spirits Within .. $11.5 million 5 (2) Scary Movie 2 ...................... $ 9.5 million 6 (5) The Fast and the Furious ........... $ 7.8 million 7 (6) Dr. Dolittle 2 ..................... $ 7.0 million 8 (4) Kiss of the Dragon ................. $ 5.8 million 9 (3) A.I. Artificial Intelligence ....... $ 5.1 million 10(7) Lara Croft: Tomb Raider ............ $ 4.0 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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