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에 나오는 헐리웃 영화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가 아시아계 배우의 약진이고, 그 선두에는 중국배우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배우는 이미 오래 전 매니아들을 확보, '버스터 키튼의 환생'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성룡으로, 그는 99년 '러시아워'의 성공이래 매년 여름 자신의 코믹 무술 실력을 발휘한 흥행작을 선보이고 있다.('러시아워2'는 8월3일 북미 개봉 예정)

홍콩 태생의 성룡이 도시 분위기 특유의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다가선다면, 베이징에서 태어난 이연걸은 신비롭고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프랑스와 중국 영화사가 공동 제작하고 미국의 20세기 폭스가 배급하는 그의 최신작 '용의 키스(Kiss of the Dragon)'는 이같은 이연걸의 카리스마를 극대화한 무술 액션 영화다.

브리짓 폰다를 제외한 출연진 대부분이 프랑스 현지인이라는 점이 이연걸이 구사하는 아시아계 특유의 영어 액센트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그는 영화 초반부터 말을 극도로 아낀다. 프랑스 입국 과정에서 '놀러왔다'고 짤막하게 방문 목적을 말하는 류지안(이연걸)은 실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는 중국계 마약왕을 체포하기 위해 중국 정부에 의해 현지로 파견된 경찰이다.

어설픈 접선을 거쳐 그가 이끌려간 곳은 마약왕이 머물고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 주방. 이곳에서 류는 중국계 범죄 용의자들을 잔혹하게 때려죽이던 파리 경시청의 리차드 형사(Tcheky Karyo)와 조우한다. 그들은 마약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몰래 카메라로 그의 행동을 모니터하는데, 마약왕은 돌연 객실로 데려온 창녀의 공격을 받는다.

류가 바로 달려가 그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뒤따라온 리차드는 창녀와 마약왕 모두를 죽여버린다. 리차드는 마약왕과 결탁, 살인을 교사하고 심지어 포주 행세까지 하는 부패 경찰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파리 전체의 경찰력을 동원, 류를 체포하려는 리차드와 살인사건의 물증이 될 녹화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류의 대결 구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류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이자 인질로 붙잡힌 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차드 측에 협조해야 하는 미국계 창녀 제시카(브리짓 폰다)가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베송의 '레옹'과 비교되는 '용의 키스'에서 역시 아쉽고, 때로는 분노해야 할 점은 스토리다. 이연걸이 원안을 제공하고, '니키타'와 '레옹'의 뤽 베송이 시나리오를 다듬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뭔가 새로운 화학 작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많았다.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붕 떠있는 브리짓 폰다도 "단지 이들과 작업하고 싶어서 각본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원안이 엉망이어서 다듬는 데 한계가 있었는지, 훌륭한 아이디어를 베송이 망쳐놓았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이연걸의 아이디어 자체도 신선한 것은 아니었고, 뤽 베송의 시나리오도 97년의 '제5원소'이후 눈에 띄게 힘이 빠진 느낌이다.

▲ 다음 주 개봉작 '파이널 환타지'
동명의 컴퓨터 게임을 원안으로, 실사에 더욱 가까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도입한 화제작.ⓒ2001 Columbia
영화는 류의 싸움을 보여주기 위해 스토리 설정에 많은 무리수를 범한다. 초인적인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류 앞에서 파리의 경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거나 때로는 목뼈가 부러지는 비참한 최후를 맛본다.

프랑스인들은 사악한 형사 한 명의 모략에 놀아난 파리의 전 경찰력이 죄없는 아시아인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고, 류가 이들을 인정 사정없이 제압한다는 설정에 크게 분노할 지 모른다.

경찰 본부에 단신으로 들어가 정문 수위를 옆차기 한 방에 날려버리고, 가라데 도장의 무술 경관 수십 명을 단숨에 때려눕힌 후 리차드와 '맞장을 뜨는' 라스트신은 한편의 서커스다. 이연걸을 모르는 팬들에게는 경이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의 골수 팬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장면들로, '베스트'라고 손들어주기는 힘들 듯 싶다.

또한 좋은 액션영화의 필요 조건 중의 하나는 인상적인 악역의 등장인데, 리차드 역의 Tcheky Karyo는 '레옹'의 '부패한 뉴욕 경찰' 게리 올드먼에 비해 함량 미달이다. 부하들에게까지 멋대로 총질을 하고, "빨리 녀석을 끌고 와라. 내가 직접 죽이겠다"고 되뇌이는 이 '폭군 형사'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있어서 부하들이 고분고분 따르고(아마도 돈의 힘?), 경시청 상관들까지 그를 철석같이 믿는 걸까?

또 한 가지, 성룡보다는 이소룡에 가까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연걸은 무표정한 액션만큼이나 여성에 초연하다. '레옹'이 잔인한 액션 영화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는 이유는 10대 소녀로부터 사랑의 의미를 배우는 킬러의 인간적인 매력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의 키스' 속 류와 제시카의 관계는 왠지 어색하고 미적지근한 게 사실이다. 단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줄 증인으로서의 제시카의 가치에 집착해서인지 류는 제시카에게 초연한 모습을 시종일관 고수한다. 따라서 영화 후반부 류가 고아원에서 딸을 빼오려다가 총상을 입은 제시카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다시 딸을 찾아주기 위해 단신으로 경찰 본부로 쳐들어가는 모습도 액션 연기 이상의 비장미를 비치지 않는다.

잔인한 서양인들에게 '강한 아시아인'의 인상을 심었던 이소룡도 여성, 특히 비아시아계 여성과 단 둘이 있는 장면에서는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연출했었다. (죽기 전 9년 동안 이소룡의 반려자였던 부인 린다가 오리지널 백인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소룡의 영화속 이미지는 그의 평소 모습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북미의 이연걸 매니아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영화 '황비홍 1 (Once Upon A Time In China, 91년)'에서도 극중의 황비홍은 그를 연모하는 '숙모' 관지림에게는 가족 이상의 애정 표현을 삼간다.

주윤발이 '리플레이스먼트 킬러'와 '애나 앤 더 킹'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연걸 역시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 이어 '용의 키스'에서 백인 여배우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한다. 영화가 '아시아계 남성과 백인여성의 사랑'에 인종적 편견을 가지는 일부 백인들의 그릇된 시각에 정면도전하기보다는 사회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편한 길을 택했다는 의미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스토리를 빼고 본다면, 영화는 분명 액션 팬을 위한 영화다. '유창하게'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시원시원한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는 영어권 국가들을 겨냥해서 제작한 냄새가 짙고, 실제로 북미 개봉 첫주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

'용의 키스'는 7월 첫째주 북미 영화 흥행 순위에서 4위(1360만 달러)에 그쳤지만, 극장당 흥행수입에서는 '고양이와 개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작년 3월 개봉, 1위로 데뷔했던 이연걸의 이전 작품 '로미오 머스트 다이'(180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 다음 주 개봉작 '스코어'
'3대의 연기 달인'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드 니로, 에드워드 노턴이 함께 주연한 범죄물.ⓒ 2001 Paramount
갈수록 중국 무술영화의 기법을 차용하는 할리웃 영화들이 늘고, 아시아계 영화배우들의 수요도 늘고 있지만, 관객들이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액션 이상을 요구할 날이 조만간 찾아올 것이다. 변덕스런 관객들이 21세기 들어 근육질 스타들을 버렸듯이 언젠가는 매너리즘에 빠진 아시아계 액션스타들을 도태시킬 날이 찾아올 것이다. 아시아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다 헐리웃 진출을 노리는 이연걸도 이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지난 4일 2편의 신작이 개봉된 가운데 집계된 북미 흥행 순위에서는 개와 고양이들의 '첩보전'을 다룬 가족 영화 '고양이와 개(Cats and Dogs)'(2167만 달러)가 패러디 영화 '무서운 영화 2(Scary Movie 2)'(2100만 달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잠정 집계 차가 67만 달러여서 9일 최종 집계에서 순위가 뒤바뀔 수도 있는 상황.

'고양이와 개'는 짐승들의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워지는 등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 감동이 없다는 지적이 지배적이고, '무서운 영화 2'도 내용 자체가 진부하다는 비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지난 주 1위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는 전주에 비해 관객이 무려 52%나 빠지며 3위로 밀려났다. 개봉 3주를 맡은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는 총수입이 1억150만 달러를 기록, 올해 개봉작중 7번째로 1억 달러를 넘어섰다.

탑10 영화 중 가장 적은 22%의 낙폭으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은 총수입 2억4천만 달러로,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어웨이' 등을 제치고 북미 영화 역대 흥행 20위에 올라섰다.

다음은 이번 주 박스 오피스 순위. ( )는 지난 주 순위, +는 데뷔작.

1 (+) Cats & Dogs ................... $21.67 million
2 (+) Scary Movie 2 ................. $21.0 million
3 (1) A.I. Artificial Intelligence .. $14.14 million
4 (+) Kiss of the Dragon ............ $13.64 million
5 (2) The Fast and the Furious ...... $12.35 million
6 (3) Dr. Dolittle 2 ................ $10.1 million
7 (4) Lara Croft: Tomb Raider ....... $ 6.8 million
8 (7) Shrek ......................... $ 6.0 million
9 (6) Atlantis: The Lost Empire ..... $ 5.0 million
10 (5) Baby Boy ......................$ 4.8 million

덧붙이는 글 여담이지만, '용의 키스'에는 사람 몸이 절반 잘려나가고, 젓가락으로 사람을 찔러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많습니다. 또 한 가지 수지침의 위력을 이만큼 강력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없습니다. 영화 제목은 이 수지침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잇는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파이널 환타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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