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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10] 조선왕조 시대 피지배층에 학문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등록 2024.04.15 08:04수정 2024.04.1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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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폭압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짓밟히는데도 저항할 줄 모른다면 그건 이성적·지성적으로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유신정권은 유신정변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투옥·연금하고, 공론에도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었다. 국민은 이성을 잃은 유신정권의 행태를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비판자들을 가두면 또 새로운 비판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저항의 불길이 봇물 터지듯 솟아올랐다. 거스를 수 없는 생명의 순환논리다.

강만길은 역사학의 현실 문제에 고뇌하면서 조선 후기 상업구조의 변화를 <창작과 비평> 1972년 여름호에 발표했다. 이것이 '창비'와 맺은 첫 인연이기도 했다.

그 무렵 한국철학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에서 조선 말기 개화파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강만길은 이에 글을 써서 보내 주었다. 그런데 잡지 발행의 책임자인 박종홍 서울대 교수가 유신 후 박정희 대통령 특별보좌관이 되면서 그의 글을 싣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글은 그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이 글은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이라는 제목으로 <창작과 비평> 30호(1973년 겨울호)에 실렸다. 유길준이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유럽 지역을 돌아 귀국한 1885년 12월에 중립화론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강만길은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19세기와 같이 제국주의 세력이 난무하던 시기에 국제분쟁의 요충지대에 위치하면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주변 국가들을 앞서지 못했던 조선왕조가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완충국으로서 강대국의 협약이 보장하는 중립국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문호 개방부터 국권을 상실하기까지 30여 년간의 한국 근대사를 두고 생각해 보면, 국내 정세가 중립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고 보이는 시기도 역시 갑신정변 이후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6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시기에 내국인과 외국인들에 의하여 조선의 중립론이 제기되거나 구상되었던 것이다. (주석 1)

이 논문으로 강만길은 창비와 더욱 두터운 신뢰관계를 맺게 되고, 향후 많은 글을 '창비'에 발표했다. 학자나 문인에게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있다는 것은 글을 쓰는 큰 힘이자 동기부여가 된다. 그가 유신시대에 용기를 갖고 각종 사론과 시론을 거침없이 쓸 수 있었던 것도 창비와 같은 든든한 매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학사·석사·박사 학위 논문은 모두 조선왕조 시대의 상공업사 연구였다. 특히 박사 논문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단>은 조선왕조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연구한 글이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박해와 수탈을 주목하고 스스로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면서 역사의 표면에 부상해 오는 그 꾸준하고 줄기찬 과정을 밝히는 일에서 기쁨을 구하고 싶었던" (주석 2) 것이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된 이 논문은 서론에 이어 <실학자의 상업관>, <경강(京江) 상인과 조선 도매>, <개성 상인과 인삼재배>, <시전상업의 공장지배>, <도가상업과 반도매>,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해제>를 쓴 하원호 교수는 이 글을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역사학을 연 기념비적 저술"이라 평했다.

이 책은 한국사학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의 고전적 저작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다. 지배계급과 그들에 관한 정치사가 해방 이후 국사 연구의 거의 전부였고 사회경제 관련 글도 단순한 사회적 현상의 서술에 머물던 시기에 피지배계급의 생활과 저항의 과정, 그 역사적 변화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보여 주는 연구였고, 이후의 역사학이 지배계급의 언술에 빠지지 않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 저작이라는 것은 그 뒤 한국사학의 전개과정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주석 3)

강만길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방안의 하나로 조선왕조 시대 피지배층에 학문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공장(工匠)과 백정(白丁)을, 그리고 상인을 연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공장이나 시전(市廛)을 다루는 마음가짐과 그 학적 자세가 백성을 다루는 그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공부를 더해 감에 따라 전통 사회의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지배권력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밝히는 일이, 곧 스스로의 힘으로 끊임없이 전진해 온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찾는 한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연구생활에 더 적극성을 갖게 되었으며, 또 그 대상이 조선후기의 문제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주석 4)

그는 상업자본의 발달 과정에 대해 <개성 상인과 인삼재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한 사례일 것이다.

요컨대 조선왕조 후기에 있어서 개성이 인삼의 인공재배와 그것의 홍삼으로의 가공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그곳의 토양과 기후가 인삼재배에 적당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인삼이 인공으로 재배되기 전부터 개성 상인들이 인삼의 국내외 상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으로 상업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개성 상인이 인삼무역과 도고 상업을 통하여 집적한 자본이 인삼의 재배와 가공업에 투입된 것이다. (주석 5)
  

주석
1> 강만길,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강만길 저작집 02), 창비, 2018, 140쪽.
2> 강만길, <머리말>,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강만길 저작집 02), 창비, 2008. 
3> 위의 책, 267~268쪽.
4> 위의 책, 7쪽.
5> 위의 책, 17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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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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