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중학 시절에 겪은 6·25 전쟁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4] '어쩔 수 없는' 평화주의자, 평화통일론자가 되었는지도

등록 2024.04.09 07:36수정 2024.04.09 07:36
0
원고료로 응원
a

1952. 11. 24. 마산의 한 중학교 교실. ⓒ NARA

 
강만길 세대는 20세기 한국인 중에서도 가장 불우한 세대에 속한다.

압제와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 말기에 태어나고, 해방을 맞았으나 민족은 곧 남북으로 갈라지고, 우리 스스로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일제가 쫓겨 간 자리를 미군정이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어 차지했다.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자 이번에는 곧이어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났다.

강만길은 미군정 때 변경된 학기제에 따라 1946년 9월에 6년제인 마산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 대립을 지켜보면서 역사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그를 평생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의 길로 이끌었다. 특히 훌륭한 스승들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학년 때 배웠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던 선(宣) 선생님의 국사 강의가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사실만 가르치는 강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강의였다는 기억인데, 그분은 6·25 전쟁 통에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훗날 부산대학교 교수가 된, 한문 실력이 대단한 이재호 선생님에게 실증성 높은 국사를 배웠는데, 국사학을 전공하게 된 데는 이분의 영향과 도움이 컸다고 생각한다. 대학 다닐 때 방학 때면 <증설문헌비고>의 <노비>편을 대출해 가서 개인적으로 이 선생님의 강독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주석 1)
a

50. 11. 1. 원산,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 NARA

 

해방기와 6·25 전쟁 시기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지방 도시 마산이라고 이 같은 광풍이 피해 가진 않았다.

"중학 입학동기생 중 200명 가까이가 좌익바람에 희생되었거나 퇴학당하고 전학 갔거나, 6·25 전쟁 때 희생되었거나, 혹은 전쟁으로 학업이 늦어져서 탈락하고, 약 50명 미만이 함께 졸업한 셈이다. 나머지 함께 졸업한 동기생은 모두 다른 학교에서 전학해 온 사람들인 것이다. 사실만으로도 우리 세대는 흔히 꿈 많은 때라 말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얼마나 험악한 상황에서 보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의 경우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느 조직에도 가입한 적이 없었다." (주석 2)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것도 시빗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강만길도 어느 날 이런 이유로 봉변을 당하게 되는데,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삽화'이다.

역시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부산 숙부님 댁에 심부름을 갔다가, 얼마 뒤 큰 화재로 불타 버린 옛 부산역 바로 앞에 있던 부산 '학련'(전국학생연맹 - 필자)에 끌려가, 단지 학련 가입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학련 등에서 활동한 우익 학생들은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학도호국단이 구성되자 대개 그 간부가 되었다. '시감찰'이니 '도감찰'이니 하여 완장을 차고 군 의장대 같은 차림의 특별한 혁대를 두르고 다녔다. (주석 3)

1950년 8월경 마산이 최전선 지역으로 내몰렸다. 적령의 학생들은 마산 학도의용대에 편입되었는데, 강만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전세가 바뀌면서 다행히 '8월 말~9월 초'에 학도의용대가 해산되자 그는 숙부가 사는 부산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부산에서 약 9개월 동안 부두하역 노동자, 포탄 운반 노동자, 미군 부대 '체커' 생활을 하다가 1951년 5월 하순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

미군 부대에 차출되어 함안군 산인면 지역에 간 일이 있었다. 주민들 모두 피난한 텅 빈 30~40호 가량의 어느 마을에 가서 미군들이 시키는 대로 골목마다 다니면서 사람이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고함치고 다녔다. 인민군이 내려와서 숨거나 식량 조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질러야 하는데, 노인들이 더러는 피난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불러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온 것이 확인되면 기름을 뿌려 마을을 순식간에 불태웠는데, 우리 안에 있던 가축들은 그냥 타 죽었고, 피난 가면서 풀어놓은 소들은 불을 피해 달아났다. (주석 4)

강만길은 이처럼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6·25 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 겪었다. 이런 경험은 이후 살아가면서 인생의 진로를 선택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를 가지고 함께 살아왔던 동족 사회의 한쪽이 정복자가 되고 다른 한쪽이 피정복자가 되는 처절한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평화주의자, 평화통일론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석 5)


주석
1> 강만길, <국민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은 이야기>, <역사가의 시간>(강만길 저작집 18), 창비, 2018, 72쪽.
2> 위의 책, 78쪽.
3> 위의 책, 79쪽.
4> 위의 책, 107쪽.
5> 위의 책, 10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강만길평전 #강만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