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나의 첫 번째 핼러윈 축제 이야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⑩] 운영팀장 이상민씨의 이야기

등록 2023.11.01 17:00수정 2023.11.01 17:00
0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은 이태원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자에게 이태원은 어떤 의미인지, 참사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 기록이 또 다른 이야기를 여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핼러윈 축제 이야기,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토요일(10월 28일)의 기억이다.

당신들과 연결된 기억 속에 묶여

이른 저녁,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우리는 작은 연습실 공간을 얻어 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각자 준비한 소품을 꺼내 분장을 시작했다. 재민은 인영과 조립한 종이 호박 가면을 뒤집어썼고, 지오는 페이스페인팅 물감을 칠해 '프리다칼로'로 분했다. 뒤늦게 도착한 성용은 커다란 쇼핑백에서 마법사 모자와 망토를 꺼내 걸쳤다. 나는 빨간색 후드 집업으로 갈아입어 애니메이션 <코코>의 '미구엘'을 흉내냈다. 동규가 선뜻 빌려준 기타까지 둘러매자 꽤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조금 들뜬 기분으로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잠시, 바깥 거리로 나서기가 못내 망설여졌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와 마주했던 풍경이 선명히 떠올랐다. 보도마다 우측 보행을 안내하며 세워진 구조물과 행인보다 훨씬 많이 배치된 경찰. 아무리 안전을 위한 것이라지만, 친구가 평하기를 선생님 앞에서 노는 느낌이라고. 그래서인지 분장한 사람 역시 찾기 어려웠다. 내가 눈치 없이 구는 걸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후회하더라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모 인터뷰에서 제법 비장하게 약속하기도 했다. 올해 핼러윈은 이태원에서 즐길 거라고. 코스튬을 통해 추모하는 마음을 드러내겠다고. 아무렴 못 와도 괜찮지만, 이곳에서 다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지난 5월부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일곱 명의 기록단을 모집해 이태원을 애정하는 아홉 명의 인터뷰이를 만났다. 각자에게 이태원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참사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은 어쩐지 증언과도 같았다. 참사 당일, 현장을 찾았던 무수한 사람들의 기억을 비추는 증언. 아닌 게 아니라 녹취록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생긴 바람이 있다면, 모쪼록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것으로나마 당신들과 연결된 기억 속에 묶이고 싶었다.
 
a

<코코>의 주제 'REMEMBER ME'에 더해 'REMEMBER ITAEWON' 이라는 글귀를 각인해 도장을 제작했다. 그리고 홍보를 위해 핼러윈 전날 급하게 SNS에 게시한 이미지. ⓒ 상민

 
축제의 방식으로 애도를 상상하기

'미구엘' 분장을 선택한 까닭은 오롯이 보영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이태원에 사는 주민 보영은 그날 밤 통제된 도로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런 보영이 참사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떠올린 게 <코코>였다. 작품의 배경이 된 '죽은 자들의 날'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며 그 명복을 비는 멕시코 명절이다. 핼러윈 데이와 차이점이 있다면, 죽은 자들의 날에는 죽은 이들을 기다리고 환영하며 같이 어울린다. 그러니까, 무겁고 슬픈 방식이 아니라 축제의 방식으로 참사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보영의 마음이 거기 담겨 있었다.


용기를 내서 그 골목 앞에 도착하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졌다. 우리는 근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리 제작한 도장을 찍어주었다. <코코>의 주제 'REMEMBER ME'에 더해 'REMEMBER ITAEWON' 이라는 글귀를 각인한 도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날 급하게 이런 뜻을 SNS에 공유하자 기꺼이 응답해준 친구들이 있었다. 태린과 윤호는 그렇게 동행했고, 민경과 윤석과 시연도 잠시 들러 힘을 보탰다. 한편, 새훈은 따로 사람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고 다녔다. 나와 기록단을 함께한 나연과 다예의 경우, 이태원 일대를 기록하겠다며 목에 카메라를 걸었다.

그리고 주현을 만났다. 참사 생존자이기도 한 주현은 마찬가지로 <코코>를 떠올렸다. 머리에는 메리골드를 닮은 꽃장식을 더했고, 팔에는 검정색 가죽장갑으로 멋을 냈다. 두 볼에 비즈까지 붙이며 노련하게 분장을 완성한 주현을 보는 순간, 나의 코스튬은 어찌나 민망하던지.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해밀톤 호텔 뒤쪽을 행진했다. 내가 못 치는 기타를 어설프게 튕기는 동안 주현은 보라색 리본과 팔찌를 주변에 건넸다. 그러자 사람들은 화답하듯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혹은 벌써 받았다고 자신의 팔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환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a

10월 28일 밤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외국인들과 사진을 찍은 우리들 ⓒ 도쿄신문

 
"Remember me, though I..."

난생처음 핼러윈을 즐기던 나는 지난 인터뷰들을 상기했다. 가령 낯을 가리는 승연씨는 코스튬을 통해 자유로워졌는데, 나 역시 어느새 낯선 사람들과 편하게 눈을 맞추는 나를 발견했다. 민희씨와 원기씨의 이야기도 새삼 와닿았다. 곳곳에는 재미난 풍경들이 가득했다. 음료캔 모양 옷을 입은 사람도, 샤인씨처럼 드랙을 한 사람도 있었다. 외국인들과 "해피 핼러윈"을 주고받으며, 모하메드씨도 떠올렸다. 또한 그 시각 음악을 틀고 있을 클럽 DJ들도 궁금했다. 어쩌면 가게를 운영하는 범조씨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다음에는 더 많은 친구들에게 같이 놀자 호들갑 떨고 싶어졌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우리는 기념으로 네컷 사진을 남기고는 거리를 헤맸다. 그리고 그때 보영의 전화를 받았다. 사실, 보영은 올해 핼러윈에 반드시 가겠다고 다짐해 왔다. 하지만 막상 일주기가 다가오니 복잡한 심경이 밀려들었다. 특히 이태원이 너무 썰렁할까 봐, 그래서 속상할까 봐 참여하지 못했는데, 아쉬운 대로 오밤중 이태원 일대를 차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있다고 알렸다. "거기 지금 어디에요?" 운명인지 우연인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아 금세 서로를 확인했다. 신호 대기 중인 차량 한 대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더니, 보영이 활짝 웃는 얼굴을 내밀어 보였다.

우리는 벅찬 마음으로 술집으로 향했고, 가볍게 떠들다 진지해지기를 한참 반복했던 것 같다. 럭비공처럼 튀던 대화는 내년 핼러윈 계획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어떤 옷 입지?" "좌판 깔고 뭐라도 해야 하나?" "미리 모여서 분장 같이 할까?" 가게 밖을 나서니 새벽녘 하늘에 수많은 별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추모의 벽을 들러 절을 올렸다. 바로 앞 편의점에도 방문해 보니 사장님이 계셔 나는 가만히 포스트잇을 들여다보던 주현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렇게 둘은 <코코> 분장을 하고서 사장님에게 인사를 드렸고, 그것을 끝으로 각자 택시를 잡아 유령처럼 헤어졌다.

나는 그만큼 연결된 감각으로 참사를 기억한다. 물론, 보영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허락하지 않거나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놀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의 첫 번째 핼러윈 축제 이야기가 그 모두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한편, 이태원 일대를 나란히 걷는 동안 주현과 나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코코>의 OST를 콧노래로 흥얼거리곤 했다. 그 가사를 옮겨 적는다. 잘 놀고 왔다.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say goodbye (나를 기억해줘, 내가 작별 인사를 해야 하지만) / Remember me, don't let it make you cry (나를 기억해줘, 울지마) / For even if I'm far away, I hold you in my heart (내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에 널 품고 있어) / I sing a secret song to you each night we are apart (우리가 떨어져 있는 매일 밤마다 나는 너에게 비밀스러운 노래를 불러) /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travel far (나를 기억해줘, 내가 멀리 여행을 가야 하지만 ) / Remember me, each time you hear a sad guitar (나를 기억해줘, 네가 슬픈 기타 소리를 들을 때마다) / Know that I'm with you the only way that I can be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너와 함께 있음을 알아줘) / Until you're in my arms again (네가 다시 나의 품에 안길 때까지) / Remember me (나를 기억해줘)"

-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운영팀장 상민
#이태원 #이태원참사 #1029이태원참사 #다시놀고싶다이태원
댓글

용산구에서 주민들과 마을방송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주요 현안을 콘텐츠로 제작하고 지역주민과 청소년 대상 라디오 교육을 통해 라디오방송 DJ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용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감정위원 가슴 벌벌 떨게 만든 전설의 고문서
  2. 2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3. 3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4. 4 윤 대통령이 자화자찬 한 외교, 실상은 이렇다
  5. 5 그래픽 디자이너 찾습니다... "기본소득당 공고 맞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