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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어른들의 마니또, 난감한 선물을 받았다

어린이에게 받은 그림책을 잘 읽기 위해 노력하다 알게 된 것

등록 2023.08.11 08:17수정 2023.08.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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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함께 글 쓰는 글친구들(이자 XMZ여자들 시민기자 그룹)이 1주년 기념으로 모인 즐거운 자리. 각자 비밀스레 준비한 선물을 '사다리 타기'로 주고 받는 이벤트가 시작됐다. 유리 문진부터 고래 모양 도어벨까지 다양한 선물이 등장했다. 누구를 떠올리며 고른 선물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제 주인을 찾아갈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나왔다. 나에게도 기가 막히게 딱 맞는 선물이 왔다.

조그만 어린이가 조그만 손으로 나에게 그림책을 선물했다. 글쓰기 멤버 중 '바람'님의 딸 서윤이가(초등학교 1학년)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조용히 뒤에서 아이패드를 보는 줄만 알았는데 시종일관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밌었다며 신나서 돌아갔다. 


바람님 댁에서 열린 1주년 파티에 당연히 서윤이는 특별 손님으로 참여했고 선물까지 손수 포장해 왔다. 그 선물이 나에게 오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되고 그림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꽤 난감한 일이었다.

어린이에게 받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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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어무 바빠> 파란색 강아지들은 왜 바쁠까? ⓒ 조성하

 
단정한 종이 포장지를 벗겨내자 파란색 강아지가 그려진 그림책 <나는 너어무 바빠>(에바 린드스트룀)이 등장했다. 작년 말 퇴사한 백수 주제에 '너무 바빠!'를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찰떡 같은 제목이니 볼수록 웃음이 났다. "엄청 유명한 작가예요", 서윤이의 수줍은 설명을 담은 책을 품에 꼭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림책' 하면 어린이 코너의 파스텔색 페인트 벽과 낮은 의자의 풍경이 먼저 떠올랐다. 그 단어가 나른하고 연약하게만 느껴져 관심을 둔 적이 없었지만,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골랐을지 궁금해하며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책의 끝에 다다르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새파란 강아지들이 나오는 책이었어.' 앗, 이렇게만 끝내면 안 될 것 같은데?

올해 2월, 한 달 정도 머물렀던 파리에는 어린이를 위한 아기자기한 서점이 곳곳에 있었다. 아이들은 서점 어디서든 책장에 기대어 편히 주저 앉아, 무릎 위에 그림책을 한 권씩 펴 놓고 얼굴을 묻고 있었다. 강요하는 부모님도, 떼쓰는 아이도 없었다. 꽤 생소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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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어느 어린이 서점 전체가 그림책으로 꽉 차 있었다. ⓒ 조성하

  
동행한 사촌 언니(프랑스인)가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가져와 내 앞에 펼쳐보였다. '이거 정말 예쁜 그림이야. 내용도 재밌고.' 조금 난감했다. 이 얇은 책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 걸까?

일단 페이지를 넘기는데 머리가 팽팽 굴러가는 소리만 맴돌았다. 그림이 아닌 불어로 된 텍스트를 해석하려 바득바득 애쓰고 있었던 것. 나는 도무지 그림책을 읽을 줄 모르는 꽉 막힌 어른이 된 건가.


서윤이가 준 그림책을 받자마자 어떻게 읽을지 고민하다 도서관으로 향했다. 두꺼운 그림책 이론서를 펴자마자 책 왼쪽 날개에 내가 듣고 싶은 간단한 답이 적혀 있어 기뻤다.
 
그림책은 단순히 글에 그림이 더해진 것이 아니다. 글과 그림, 그리고 편집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예술 작품, 문학 작품으로 태어난다. 글과 그림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며, 북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의 은밀한 작용으로 또 다른 층위의 의미망이 생겨나기도 한다.(그림책을 보는 눈 - 그림책의 분석과 비평)

몇 장 더 넘기자 '이거구나!' 싶은 문장을 찾았다. 어린이의 시절을 온전히 건너갔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던 지난 감각들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맞아, 나 그랬는데.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하는 걸 보면 어린이는 아마도 이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사실상, 어린이는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게 아니고 같은 책의 의미를 점점 더 깊이 파고 드는 것이다. 어른은 그림책의 그림을 전체와 연결 지어 읽지 않고 장식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그림책을 어린이처럼 읽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p.20)

이렇게 또 방법론을 먼저 떠올리는 노잼 어른이지만, 귀한 선물을 좀 더 잘 감상하고 싶은 욕심이라고 해 두자. 그림책은 그저 어린이를 위해 지어진 '쉽고 단순한' 글과 그림의 책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잊고 있었다. 짧은 문장과 그림만으로 얼마나 무궁무진한 '나만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상상해낼 수 있었는지.

그림책이 들려준 말

<나는 너어무 바빠>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햇살이 잘 드는 파리의 어느 어린이 서점에 있다고 주문을 걸고, 그림마다 공들여 읽기로 했다.

이 책은 다행히 글씨가 거의 없어 어른에게 좋다. 주인으로 보이는 긴머리 아이가 커다란 방 안에서 깨어난다. 커다란 파란색 강아지 세 마리가 등장한다. 같이 뛰고 달리며 놀다가 낮잠을 잔다. 그러다 도망가서 숨어버린 강아지들을 찾다가 결국 만난다.

역시나 조금 건조한 요약같나. 그래도 이론 몇 줄 배웠다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아이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방과 강아지 세 마리의 묘사가 요상했다. 기억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다시 학교를 찾아갔던 날. 엄청나게 크고 넓어 교문 앞에서 늘 심호흡 하고 들어가야만 했던 학교가, 이제는 너무 작게 느껴져 잘못 온 줄 알았던 때가 생각났다. 모든 것이 크게만 보였던 시선을 생각하니 그림이 점점 익숙해졌다.

'너무 바쁘다'면서 내용은 종일 강아지와 뛰어논 이야기가 전부인 것도 당연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이 어린이의 가장 중요한 일과니까. 우리는 각자의 시간대에서 바쁘게 살 뿐인데,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르지 않다.

회사를 나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책 읽고 놀면서 하루를 채우는 나. 가끔 친구들이 요즘을 물을 때 '좀 바빠' 대답하고는 속으로 머쓱했다. 이런 게 정말 바쁜 건가, 괜히.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해 내 시간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책이 그렇게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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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마음들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해요! ⓒ 조성하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서서 오랜 시간 지켜보고 난 후의 만족감과 일치했다. 답만 찾으려던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 이래서 그림책을 읽는구나. 갑자기 내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그림책이 눈에 띄었다.

작년 한국에 왔던 사촌 언니가 파리로 돌아가기 전 캐리어 무게가 초과할 것 같다며 나에게 주고 간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 다음엔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조그만 일들은 기어코 커다란 일과 이어지기 마련이다. 작았던 나, 작은 모임, 작은 선물, 작은 마음을 소중히 담는다면.

나는 너어무 바빠

에바 린드스트룀 (지은이), 이유진 (옮긴이),
단추, 2023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나는 너어무 바빠 #에바 린드스트룀 #그림책 #글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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