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장들은 어떻게 대를 이었을까

[나만의 특종 ⑨] 오성술·조경환 의병장

등록 2014.02.13 21:22수정 2014.02.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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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5월까지 8개월 동안 모두 스물두 분의 호남의병장 전적지를 더듬었다. 답사와 집필 기간 내내 매우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행복했다. 매우 힘든 점은 내 학식과 필력이 부족한 때문이요, 무척 행복했던 일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푸라기처럼 목숨을 바친 의병장과 그 후손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의병장 후손 가운데는 직계가 드물었고, 대부분 의병장 사후에 집안 조카들이 출계(出系, 양자를 들임)하여 사자(嗣子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드는 아들)를 이어가는 집안이 많았다. 그 까닭은 젊은 나이에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한 까닭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였거나, 당신이 일본 군경에 처형당하자 자식조차도 함께 수난을 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라가 일본에 망한 뒤에는 그야말로 국사범으로 집안에서조차 호적마저도 없애버려는 세상인지라 출계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백낙구 의병장 같은 분은 아예 후손조차 끊어져 버렸다.

나는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에 고광순 의병장 후손 고영준 선생, 오성술 의병장 후손 오용준 선생, 조경환 의병장 후손 조세현 선생 등 여러 의병장 후손의 안내를 받았다. 고영준 선생의 경우는 출계한 경우고, 두 선생은 다행히 의병장 할아버지가 자녀를 두어 대를 이었다는데, 길 안내 중 그 깊은 사연을 들었다.

한낮의 방사(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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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술 의병장 ⓒ 오용진

오성술(吳成述)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 의병장은 장손이요, 외아들이었다.

오성술 의병장이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부대로 찾아가 아들에게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오 의병장은 차마 그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남 몰래 집으로 와 옷 갈아입으려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방문을 당신 치마로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이 고맙습니다."

오용진 선생은 조상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였다.

오성술 의병장은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오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 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구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목포로, 부산으로, 부산에서 열차로 대구에 갔던 모양이다. 오 의병장이 일본 순사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부, 부자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 포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산강 포구 뱃전에서 첫 상봉이자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고 했다. 아마도 이들 부자는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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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산강 ⓒ 박도


월담 방사

조경환(曺京煥) 의병장 후손 조세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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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환 의병장 ⓒ 조세현

생전의 할머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남편(조경환 의병장)이 몰래 찾아올 때를 거의 정확하게 육감적으로 알았다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미리 토지문서와 옷 한 벌을 머리맡에 장만해 뒀다고 한다.

그런 날 한밤중에 할아버지가 몰래 담을 넘어 안방으로 와서 잠시 머물며 한바탕 방사를 치른 뒤 옷을 갈아입고 토지 문서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런 탓인지 당신네 집안은 의병으로서는 꽤 많은 네 남매(3남1녀)를 두었다.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뒤 일제가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닮)를 할까봐 거름자리에다가 평장으로 모신 뒤 성묘 때도 발각되지 않으려고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여자들은 나물바구니를 끼고서 아버지 묘를 향해 절을 올렸다.

조경환 의병장은 "不滅島夷 惟魂不復(불멸도이 유혼불부; 섬나라 왜놈이 멸망치 않으면 내 죽어 혼백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리)"이라는 어록을 남겼다고 한다.

한 세기 전 의병장 가족들이 살아온 삶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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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진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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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 선생 ⓒ 박도


#의병장 #오성술 #조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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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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