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곳곳에 서린 민간인 학살 흔적들

[제주 4·3 사건 유적지 자전거 기행 ①] 제주시내 유적지

등록 2009.09.03 16:49수정 2009.09.0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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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 사건'은 국내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역사상 최대의 민간인 학살이며, 국외적으로는 동서 냉전 시대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만들어 낸 세계적인 사건이다.

서슬 퍼런 지난 독재정권 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많은 가해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이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 원인과 과정을 왜곡하였고, 그 참상을 감추었으며, 또한 그 피해를 축소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지난 민주정권에서 그 원인과 참상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부터 하루 평균 130명 이상이 살해된 48년 10월부터 49년 4월을 거쳐, 겨우 생존한 사람 수백 명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다시 학살한 한국전쟁 시기를 포함하여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로 보고 있다.

특히 1948년 4월 3일부터 1949년 10월까지 최소한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으로 볼 때 이것은 빨치산과의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160여 개의 마을, 1만 5천여 채의 가구가 소실되었으며 제주도 전체 인구의 35%나 되는 이재민이 발생하고 수많은 가축이 살상되었으며 산림이 벌채되고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2003년 10월 15일에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그 보고서에서 최종 책임이 이승만과 미국에게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2006년 4월 3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추모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가해자들의 이에 대한 반성은 없고 다시 특별법을 만들어 이 사건을 폄훼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제주 4·3 사건'의 참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하여 그 유적지를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자전거로 3일에 걸쳐 탐방하였다.

아주 사소한 일이 엄청난 일을 만들다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하여 용문로를 따라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 거의 모여 있었던 중앙로 사거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제주중학교에 있는 현경호 선생의 비석을 찾았다. 비석은 제주중학교 정문 안 바로 오른쪽에 조그맣게 세워져 있었다. 당시 제주중학교 교장이었던 현경호 선생은 지역 유지로 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이 되어 사회 현실에 참여하고 정의의 편에 선 지식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던 잊을 수 없는 의인 중 한 분으로 꼽히고 있다. 1948년 12월 23일 박석내 학살에서 죽음을 당했다. 1969년 비석이 세워졌으나 당시는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그의 자세한 공적이 기록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문의 내용은 오직 교육자에 관한 것 뿐이었다.

제주중학교 앞길을 따라 중앙로 사거리로 향하니 왼쪽에 관덕정이 나타났다. 1947년 이 정자 앞 광장에서 4·3 사건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아주 사소했다. 제주북초등학교에서 3만여 명이 28주기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학교 앞에 있는 관덕정까지 시위를 하였다. 시위대가 모두 해산하고 구경꾼들만 남았을 때, 기마 경관이 관덕정 앞을 지나가다 자신의 말에 어린이가 깔렸음에도 이를 그대로 방치한 채 지나갔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욕하며 돌팔매를 가했다. 그러자 총성이 울리고 무차별 총격을 가해 젖먹이를 업고 있던 아주머니와 초등학생을 포함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947년 제주도는 해방이 되었음에도 실질적 삶이 해방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악화되었으며, 일본과 교역 금지로 경제상황이 최악이었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일제경찰이 설치고 있었고, 미군정의 잘못된 미곡 수입 정책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군중들은 기념식이 끝나고 거리로 나와 관덕정까지 시위를 한 것이었다.

경찰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정당방위였다고 억지를 부리자, 학생의 동맹휴학에서 시작된 파업은 3월 10일 공무원은 물론 일부 경찰도 포함한 민관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경찰의 아주 조그만 실수가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른바 나비효과(아주 조그만 처음의 차이가 후에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현상)가 발생한 것이다.

평화협정이 깨지다

1947년 3월 14일 경찰총수 조병옥은 제주에 와서 경찰 발포에 대한 사과는커녕 오히려 강경 방침을 천명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인 1948년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래서 4·3사건을 '강요된 저항'이라고도 한다. 3월에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로당의 소장파 김달삼 등이 주도권을 잡으며 무장항쟁을 강행하였고 그 결과 4월 3일 도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제주도 방어의 임무를 맡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 및 서청 간의 충돌사고로 보고 개입할 사안으로 보지 않았으나 미군정은 4월 17일 진압작전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익렬 연대장은 극렬분자가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우선 귀순 선무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문제가 되면 토벌하자고 군정장관을 설득하였다. 그는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협상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사후 책임을 두려워하여 양자 간 합의를 지키지 않고 주민들과 귀순 민병대를 공격하였다. 29일 미군정 최고 책임자 딘이 극비리에 제주를 방문한 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평화협상이 깨졌다.

중요한 역사적 장소에 아무런 흔적도 없다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중요한 건물은 거의 중앙로터리 주변에 있었다. 47년 삼일절 발포사건 전까지 제주사회를 주도한 제주도인민위원회와 3·10 총파업 투쟁위원회 본부 터가 이곳에 있었으며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이후 서청)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서청은 47년 삼일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에 들어왔다. 김일성 정권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단으로 남으로 피해온 사람들로 이들은 "제주도민 90% 이상이 빨갱이"라는 악선전에 제주도를 이들의 분풀이 장소로 삼았다. 그들의 만행이 너무도 심해 서청의 만행을 4·3의 한 원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이용하였다. 사설단체인 서청에 경찰권까지 주었으나 봉급은 주지 않았다. 서청은 도 총무국장도 살해하고 제주신보도 빼앗는 등 그 행패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중요한 역사적 장소가 있던 중앙로터리에 4·3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나 3·10총파업투쟁위원회 터에는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역사적인 장소를 알려주는 표석마저 전혀 없이 모두 상업화 되어있다.

귀순한 자를 학살하다

역사적 장소임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석도 없는 중앙로터리에 아쉬움을 느끼며 최대의 수용소로 사용한 주정공장 터로 가기 위해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주정공장이 있었던 제주항 언덕 위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이 주정공장은 당시 제주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로 주정을 제조하고 이를 연료로 공급하는 곳으로 48년 초토화 작전 이후 제주도 내 최대의 수용소가 된 곳이다. 49년에는 2000여 명을 수용하여 여자가 남자의 3배 이상이었으며, 90%는 산에 숨어 있다 귀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49년 3월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부 시책을 이해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귀순을 권고하는 선무공작이 전개되어 많은 수가 내려왔으나, 귀순자 300여 명을 사살하고 많은 사람을 육지형무소로 보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육지형무소로 보낸 대부분이 학살되었으며 특히 대전의 골령골과 대구의 가창골에서 많이 살해되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가득한 제주농고 터

남문로터리를 거쳐 칼호텔 건너편인 제주농업학교 터로 갔다.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로 '전농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는 이곳에 1947년 7월부터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 2연대 등이 주둔했다. 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에 출입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한다"라는 포고령에 따라 제주농업학교는 운동장에 임시로 천막수용소를 마련하고 민간인을 무차별 연행하여 즉결처분하던 곳이었다. 11월과 12월에 제주 읍내 유지들 대부분 이곳에 연행되고 학살한 '유지학살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48년 6월 18일 박진경이 암살당한 곳이었으며 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역사의 현장인 제주농고는 76년 이전하였고, 대부분은 택지로 바뀌고 일부에 삼성초등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역사적인 흔적은 아무데도 없다.

삼성혈을 지나 신산공원에 들어서니 4·3 해원방사탑이 있다. 4·3사건 50주년인 1998년에 만들어졌다. 50주년을 맞으면서 맺힌 억울함을 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4·3 해원방사탑'이라고 불린다. '방사탑'은 사악한 기운을 방어하는 탑이란 뜻으로 꼭대기에는 일반적으로 새 모양의 돌을 얹으나, 이곳에는 화합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얹고, 돌무더기 속에는 4·3 희생자 명단 등 4·3과 관련된 자료를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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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얹고, 돌무더기 속에는 4·3 희생자 명단 등 4·3과 관련된 자료를 묻은 4·3 해원방사탑 ⓒ 이규봉


자수한 사람을 비밀리에 학살하고 시신을 불태우다

오후에는 11번 국도를 타고 제주여자중고교로 들어가는 사거리로 갔다. 사거리 왼쪽에 있는 작은 개천 이 박석내(또는 박성내라고도 한다)이다. 이곳은 4·3 때 학살터로 이용되었다. 48년 12월 21일 조천면에서 "좁쌀 한 줌이라도 산에 올린 사람은 자수하라. 그러면 양민증을 발급해 준다"라는 선전에 자수한 150여 명을 비밀리에 학살하고 불태웠으며, 23일에는 제주 유지들을 이곳에서 역시 비밀리에 학살한 후 불태웠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9연대는 12월 29일 2연대와 교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교체를 앞둔 9연대가 실적 올리기에 매달린 결과로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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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을 비밀리에 처형하고 시신을 불태운 박석내 ⓒ 이규봉


평화를 원치 않은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

평화협정이 결렬된 장소인 연미 마을을 들리기 위해 중앙중학교 쪽으로 향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현장이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제주학살을 점화시킨 역사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48년 5월 1일 12시경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2채의 집에 불을 놓음으로서 시작되었다. 유격대원이 불을 놓은 청년을 추격했으나 사라졌고, 2시경 극우청년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유격대원이 사라진 뒤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진입하였다. 4시 30분 경 9연대가 도착하자 경찰은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제9연대장 김익렬은 방화의 주범이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연미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하늘과 지상에서 동시에 같은 장면을 촬영하고 <제주도에서의 메이데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방화가 유격대에 의한 것으로 조작하고 경찰의 잔인한 토벌을 정당화한 점으로 보아 이 방화를 딘 방문 이후 치밀하게 사전 준비된 미군의 각본으로 추정한다.

국방경비대는 이 사건의 원인이 경찰의 강경한 탄압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5월 6일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이며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 김익렬 연대장은 조병옥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진경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의 무자비한 토벌정책에 반발하여 9연대 장병 41명이 총기를 탈취하여 유격대에 합류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박진경과 그의 추도비

오늘(25일) 일정 마지막 순서로 99번 국도 해발 668m 높이에 있는 박진경 추도비를 찾아 갔다. 어승생악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천왕사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베트남전 기념비가 나온다. 이 기념비 옆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충혼묘지가 있다. 묘지 입구 오른쪽에 보니 뻘건 글씨로 그의 추도비가 정말로 서있다.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제주에 주둔한 경험이 있고 영어에 능통하였으며 강경진압에 동조하였다. 그는 연대장 취임사 중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하며 부임 기간 불과 한 달 열흘(48년 5월 6일~6월 18일)만에 대부분이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를 무려 6천여 명이나 생포한다. 그 공로로 미군정은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키나, 그는 진급 축하 파티 후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게 암살당한다. 그들은 암살 동기를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의 추도비는 1952년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세워졌다가 1985년 다시 세워진 비문에는 "제주도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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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을 본 받으라고 충혼묘지 입구에 아직도 세워놓고 있는가? ⓒ 이규봉


제주도민은 김익렬보다 박진경을 계속 선택할 것인가?

김익렬 연대장은 모두들 무장대와 협상하러 가기 꺼려하는 상황에서 초토화 작전을 막기 위해 한라산으로 올라가 단독으로 무장대와 4·28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또한 그는 오라리 방화 후 열린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여가며 강경진압을 반대하다 해임되었다.

반면 박진경은 초토화 작전에 불을 댕긴 장본인으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하며 부임 기간 불과 한 달 열흘 만에 무려 6천여 명을 희생시켰고 결국 암살당했다.

김익렬 장군(66년 육군 중장 예편)은 1988년 작고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살신성인한 그의 공덕비는 제주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박진경의 경우 그를 추도하는 비문이 아직도 충혼묘지 입구에 보란 듯 세워져 있다.

역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했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미 정부가 제주 4·3 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로 규정하고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은 아직도 박진경을 추도하는 비를 세워 놓고 정작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 한 김익렬 장군의 존재는 알리지 않고 있으니, 제주도민은 육지 사람을 '육지것'이라고 욕할 자격이 있는지 쓴맛을 뒤로 하며 1시간을 걸려 올라온 길을 단숨에 내려갔다. 오늘의 주행거리는 44km였다.
#제주43사건 #민간인학살 #김익렬 #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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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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