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6·15 정상회담 '막전막후' 비화 육성증언

[세상 톺아보기] 8년만에 말문 연 대북특사의 서울대 특강

등록 2008.06.11 15:47수정 2008.06.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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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만에 말문 연 대북특사 그는 "북한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표하겠다"고 말해 '노무현 정권 5년, 박지원 징역 5년' 동안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얘기를 쏟아낼 것임을 예고했다. ⓒ 김당


"대통령 특사로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4·8합의서의 체결과정과 6·15남북정상회담 당시의 상세한 과정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여러분은 오늘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한민국 '유일 당사자'로부터 생생한 육성 증언을 듣게 되는 것이다."

6·15 남북정상회담의 대북특사였던 박지원 의원(무소속)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 당시의 '막전막후'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박 의원은 11일 오후 6시 서울대 근대법학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서울대 6·15 연석회의' 초청 특강에 앞서 배포한 '6·15 정상회담은 어떻게 이뤄졌나'라는 제목의 원고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현대의 5억 달러 대북송금과 관련, 그동안 언론에서 익명으로 보도된 유창순 전 대한상의 회장의 이름이 처음 공개되었으며,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만나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 사실도 처음 공개했다.

박 의원 강연 내용을 종합하면, 6·15 남북정상회담은 북한과 대규모 경협사업을 추진 중인 고(故) 정몽헌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에서 밝혀진 5억 달러 대북송금도 북한 측 요구를 정부가 거절하자 대규모 경협사업에 대한 독점적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현대 측이'‘리베이트' 차원에서 제공했다는 것이다.

"정몽헌, 특검수사에서 15억에서 10억불, 5억불로 깎았다고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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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특사의 4.8합의 박지원 당시 문광부장관이 2000년 4월 8일 베이징에서 북측 송호경 특사와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 의원은 그에 대한 '주관적 근거'로 중국 상하이에서 가진 북한 측 송호경 특사와의 1차 예비회담에서 북측이 우리 정부더러 현금지원을 해 달라고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우리의 예산절차상 불가능하다고 단호히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정 회장을 호텔 방으로 불러 북측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고도 밝혔다. 송 특사와 정 회장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그가 내세운 '객관적 근거'는 대북송금 특검수사 당시 <내일신문>에 보도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발언에 대한 제3자의 전언이다. 당시 이 신문은 정 명예회장과 가까운 익명 인사의 전언을 빌려 정 명예회장이 '개성공단을 현대에서 개발할 것이며 몇 천만 평을 평당 10만원~30만원만 받아도 현대는 엄청난 이익이 난다'면서 '북측에서 그 대가로 15억불을 요구해서 정몽헌 회장이 박지원 장관과 상하이에서 깎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당시 이 신문이 익명으로 보도한 제3자는 유창순 전 대한상의 회장인데 이 보도는 특검 수사에서 부분적으로 사실로 드러났다. 유창순 전 회장이 실명으로 거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검 수사 당시 <오마이뉴스>가 입수해 단독 보도한 수사기록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중국 출장을 다녀와서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북측에서 처음 15억 달러를 요구하다가 나중에 10억 달러로 내려갔지만 자기가 5억 달러로 깎았다고 자랑했다.

따라서 유 전 회장이 전한 정 명예회장의 발언은 1차 예비회담과 2, 3차 예비회담(베이징) 사이에 국정원이 개입한 '실무회담'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야기된 착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최종합의는 2000년 4월 8일 3차 예비회담에서 이뤄졌다.

"특검 수용은 '김대중 정권과 차별화하겠다'는 옹졸한 정치적 계산"

그래서인지 박 의원은 "참여정부는 '김대중 정권과 차별화하겠다'는 옹졸한 정치적 계산으로 더 큰 남북관계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며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한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대북송금특검만 없었다면 6·15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항들이 착착 진행됐을 것이고, 노 대통령 취임 초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라며 "최소한 지금처럼 임기 마지막 해에 정상회담을 해서 그 성과를 이행하지도 못하고 묻혀버리는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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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고난 박지원 의원은 역사적인 6.15정상회담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으나, 그 스스로 '노무현 정권 5년은 박지원 징역 5년'이라고 부를 만큼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 청와대


그는 "2003년 3월 집권여당이 반대했고 심지어 주무장관인 강금실 법무장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무위원이 반대했던 대북송금특검을 노 대통령과 딱 한 사람의 장관이 한나라당의 논리를 원용해 찬성하면서 국무회의를 통과시켰다"면서 그 배경을 "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도 차별화해야 한다는 옹졸한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근거로 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이 "왜 DJ에게는 장세동이 없느냐"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이회창 후보의 대선자금, 김영삼 대통령의 안기부자금 등 모든 의혹에 대해 동시에 특검을 하면서 물타기로 풀자"고 제안하면서 '박지원 정치자금' 얘기를 꺼냈다고 밝혔다. 특검 문제를 정치적으로 '연계'시키려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건의로 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만나 '정치자금 문제는 깨끗하다'고 선을 긋고 1962년 한일회담의 김종필-오히라 메모(편집자주 : 2005년에 43년만에 공개됨)를 예로 들어 불과 2~3년 전의 민족문제를 공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안 된다고 주장해 특검 반대의 진정성을 이해시켰다고 밝혔다.

"최측근 만나 이해시켰지만 나중에 '너무 늦었다, 특검으로 간다'고 통보"

그는 당시 이 최측근 인사가 자신이 한번 막아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후 우리에게 "너무 늦었다, 특검으로 간다"고 통보해 왔다고 덧붙였다. 박 의원은 강연 원고에서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해 최측근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대북송금특검은 노 대통령이 김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한 옹졸한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었고, 김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어야겠다는 음모에서 정치자금 관계를 조작했다는 믿음을 지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특검수사에서도 밝혀졌지만 당시 평양 방문 일자가 하루 늦춰졌던 것은 송금 지연 때문이 아니라 남측 언론이 순안공항-평양 이동경로를 예측 보도하는 등의 보안 문제와 순안공항의 수리 미비가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노무현 정권 5년은 '박지원 징역 5년'이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면서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했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평양에서 네 번 울었다"...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넙죽 절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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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반세기만에 맞잡은 두 손 박지원 의원은 6.15공동선언이 나오기까지 평양에서 네 번 울었다고 회고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박 의원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궁전 참배 문제로 정상회담이 막판까지 결렬 위기에 처했던 비화도 공개했다.

그는 평양 도착후 송 특사가 '참배를 거부하면 회담도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막판까지 진땀을 뺐다면서 "한광옥 비서실장과 제가 대신 참배하고 돌아가 구속당하겠다"고까지 배수진을 쳤지만 기싸움을 계속하다가 회담 당일인 6월 14일 오전 김정일 위원장이 '참배는 안해도 된다'고 밝히면서 극적으로 문제가 풀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 방으로 가서 특별수행원이었던 문정인 교수와 담소 중인 임 원장에게 엄숙하고 정중하게 "정말 수고하셨다"고 넙죽 절을 한 비화도 공개했다. 그만큼 김 대통령의 금수산궁전 참배 문제는 회담의 성패 여부를 결정짓는 피를 말리는 난제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 의원은 평양에서 순안공항 도착 직후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포옹했을 때, 상봉과 회담을 모두 김영남이 아닌 김정일 위원장과 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금수산궁전 참배 문제가 풀렸을 때, 6·15 공동선언문이 작성됐을 때 등 네 차례에 걸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 가지 결단이 필요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지난 3월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가장 중요한 남북한 정신은 1991년에 체결된 기본합의서'라고 말한 점을 거론하며 "이는 우리 민족과 전 세계가 흥분하며 전폭적 지지를 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사실상 부정하고 묵살한 것"이며 "불필요하게 북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 대통령에게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①금강산 6·15 8주년 민간행사에 대한 적극적인 정부 지원 ② 6·15남북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준수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직접 발언 ③인도적 차원의 조건없는 쌀과 비료 지원 같은 세 가지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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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특사의 파안대소 6.15 당시 박지원 문광부장관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신임을 받았다(그의 옆은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고은 시인). ⓒ 사진공동취재단


그는 "이러한 제의에도 북한이 응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저는 북한이 반드시 대화에 응하리라고 믿는다"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이제 역사적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경험했던 대북특사 등 북한과 관련된 일들, 김정일 위원장과의 일화 등 모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표하겠다"고 말해 '노무현 정권 5년, 박지원 징역 5년' 동안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얘기를 쏟아낼 것임을 예고했다. 그는 "저도 (밑천을)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오늘은 이 정도만 이야기하겠다"고 조크를 남겼다.

'햇볕정책의 설계사'인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회고록(<피스메이커>) 출판기념회(10일)와 '햇볕정책의 전도사'인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의 공개 강연(11일)에 이어 내일(12일)은 '햇볕정책의 구현자'인 김 전 대통령의 6·15 8주년 기념 연설이 있을 예정이다. 이명박 정부 첫해에 '6·10 촛불'에 이어 '6·15 봇물'이 터진 셈이다.
#박지원 #대북송금 #서울대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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