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에 벌어진 '대연각(大然閣) 호텔 화재사고'는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화재 사고로 꼽힌다. 하필 사건 당일이 성탄절이라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던 상태였기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때 명동의 랜드마크로 불리우던 대연각은 왜 화마에 휩싸여야만 했을까. 당시 절체절명의 상황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들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마천루를 덮친 화마 그리고 최후의 생존자' 편을 통해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의 그날을 조명했다.
 
1971년 12월 25일, 전날부터 거리는 성탄절과 연말연시 분위기로 가득했다. 당시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정부는 24일 자정부터 25일 새벽까지 특별히 통금까지 해제하며 시민들이 마음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대연각 호텔은 당시 명동 한복판에 위치해있던 최고급 럭셔리 호텔이었다. 준공된지 일년밖에 신축 호텔에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21층 고층으로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기도 했다. 명동의 랜드마크로 불리던 대연각 호텔은 하루 숙박비가 당시 공무원의 월급과 맞먹는 수준으로 서민들에게는 그저 꿈같은 공간이었다. 이용하는 손님들은 주로 VIP나 외국인이 다수였다.
 
성탄절 당일 오전 10시. 당시 대연각호텔 3층 미용실에서 근무하던 안미자 씨는 휴일이었지만 원장님과 점심 약속을 위하여 호텔에 출근했다. 직원들과 수다를 나누며 원장님을 기다리던 미자씨는, 갑자기 복도에서 새빨간 불길과 매캐한 연기가 피어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 바로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의 시작이었다.
 
이미 출입구는 막혀버린 상황. 순식간에 고립된 미자씨와 직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불길을 뚫고 빠져나갈지, 아니면 3층 높이의 창문으로 뛰어내려야할지 선택의 기로에 몰렸다. 어쩔 줄 모르고 창가에서 망설이던 미자씨의 등을 누군가 뒤에서 밀었다. 다행히 미자씨는 정문 위의 국기게양대로 떨어졌고 경미한 타박상만을 입은 채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대연각 호텔에서 불과 700미터 거리에는 명동 중부 소방서가 있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소방관들은 곧바로 출동했으나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빌딩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당시 출동 소방관이었던 박준호씨는 "상상 외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큰 화재인지도 몰랐고, 그런 화재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며 당혹스럽고 난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대연각 호텔이 있는 빌딩은 5층부터 19층까지 호텔 시설이었고 객실은 200여 개에 달했다. 당시 화재 상황은 창문마다 불이 새어나올 정도로 불길이 최고조에 달한 최성기 상태였다. 내부온도는 1000도에서 1300도까지 이르고 있었다.
 
1971년 당시는 화재 장비도 발달하지 못해 산소마스크나 방화복도 없는 상황. 소방관들로서는 진압은 커녕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어서 불길을 잡는 데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박준호씨는 "사람이 그 안에 수백 명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소방관으로서 구조를 하지 못하니까 애만 탔다"고 안타까워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단계였던 소방대응단계는 곧바로 비상출동 단계로 전환됐다. 서울 전역의 소방력과 주한미군까지 대연각호텔로 총동원되었고, 구조인력은 총 15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불길을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대연각 호텔의 화재 상황은 실시간으로 TV에 생중계되었다.
 
호텔 내에 갇힌 사람들은 창가에서 손을 흔들며 간절히 구조를 요청했다.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비교적 저층에 있던 사람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객실 내 침대보를 엮어서 줄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7층 투숙객들은 야외대피공간과 중간 옥상에 모여서 탈출의 기회를 잡았다.
 
이에 소방대는 긴급하게 고가 사다리차를 투입했다.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대원들을 믿고 용기를 내어 사다리를 타고 한 사람씩 내려왔다. 심지어 부상자를 목마를 태워서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건물에서 떨어진 유리파편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해준 사람들 덕분에, 약 80여 명의 귀중한 목숨을 구조할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의 또다른 한쪽에서는 충격적인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립되어 뜨거운 불길과 연기에 견디다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창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어떻게든 살기 위하여 침대 매트리스나 이불을 몸에 두르고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락한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호텔 앞은 순식간에 시신과 버려진 매트리스 등 추락한 이들의 흔적이 낭자한 지옥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를 지켜봐야했던 소방관들은 눈물을 참아가며 슬퍼할 틈도 없이 곧바로 다른 이들의 구조 활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연각 호텔 화재진압에 참여했던 이영주 소방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호텔 안은 염열지옥, 밖은 아득한 허공, 그들에게 남은 건 어떻게 죽느냐의 선택 뿐이었다"고 가슴아팠던 순간을 회상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두려움을 몰랐던 나도 문득 소방복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진술하고 있다.

당시 고가 사다리차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고작 7층이 한계였다. 또한 당시에는 소방헬기도 존재하지 않아서 대신 군용 헬기가 비상으로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헬기 역시 연기가 자욱한 호텔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고, 마땅한 구호장비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헬기조종사인 문광현씨는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하여 건물에 접근했다. 건물 옥상에서 간절히 구조를 요청한 사람들에게 헬기에서 내려준 로프를 붙잡게 하고,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하여 구조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구호 장비도 없이 오직 줄 하나에 의존해야하는 도박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엘리베이터 수리공이 로프를 붙잡아 옆 건물까지 무사히 이동하며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또한 이를 보던 시민들은 밧줄에 구조용 줄사다리를 묶어주며 구조작업을 도왔다. 문광현 씨를 비롯한 2대의 군용헬기를 통하여 각 3명씩 총 6명의 사람들을 구조해낼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로프를 겨우 잡고도 놓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조종사와 생존자들은 함께 살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던 동료가 허공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살았다는 기쁨보다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을 먼저 느껴야했다.

오후 1시, 어느덧 화재발생 3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생존자를 기대하기에는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1층에서 돌연 담요를 두른 노신사 한 명이 나타난다. 무려 3시간을 화마와 싸우면서도 기적처럼 생존한 것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응원했고, 이제 구조대의 목표는 최후의 생존자인 노신사를 구조하는데 집중된다.
 
당시 양궁선수였던 조춘봉씨는 화재 구조 현장에 요청을 받고 긴급 투입됐다. 춘봉씨의 임무는 낚시줄이 걸린 화살을 11층으로 쏘아서 노신사가 화살을 집어올리면 지상에서 낚싯줄 끝에 밧줄을 묶어 연결하는 것이었다. 무모하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근처 육교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한 춘봉씨는 무려 70여발의 쏘아올린 끝에 1104호 안에서 화살을 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객실에서는 반응이 없었고 노신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 비로소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소방관들은 겨우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소방관들은 가장 먼저 11층으로 이동해 노신사의 안전을 확인했다. 내부를 수색하던 소방관들은 욕조 안에서 노신사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노신사는 살아있었고 욕조 안에 물을 틀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그 안에 들어가서 버티고 있었던 것.
 
최악의 화마 속에 무려 7시간이나 생존한 기적의 주인공은 여선영(余先榮) 주한 자유중국 공사(현 대만)였다. 그는 구조대의 등에 업혀 무사히 빠져나온 뒤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당시 여 공사는 구조 당시 이미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은 위중한 상태였다. 구조 열흘 뒤 여 공사는 병원에서 후유증을 이겨내지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다. 여 공사를 끝으로 호텔 내에서 더이상의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화재 발생 12시간이 지난 밤 10시, 드디어 모든 불길이 잡히고 화재가 진압되었다. 호텔 안에는 까맣고 타버려서 신원 확인이 어려운 시신들로 가득했다. 옥상으로 가는 문 앞에는 무려 23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옥상의 문이 자물쇠로 잠겨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으로 밝혀지며 안타까움을 남겼다.
 
더구나 당시는 DNA나 유전자 감식 기술도 발전되지 못했던 상황. 유족들은 훼손된 시신을 일일이 마주하며 직접 자신의 가족을 찾아내야만 했다. 공식적으로 사망자는 끝내 찾지 못한 실종자를 포함하여 총 191명에 이른 대참사였다.

비극적인 대연각 화재 사고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층에 위치한 호텔 커피숍의 낡은 프로판 가스통이 터지면서 화재가 일어났다. 해당 가스통은 호텔이 들어서기 이전인 68년에 제작되어 4년이나 내압검사 한 번 받지 않고 방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흡한 설치와 관리 소홀로 고무호스에 구멍이 생기면서 누촐된 가스가 화덕의 불꽃에 의하여 터지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대연각 호텔은 당시 건축법상 의무였던 비상계단의 방화문 설치도 비용 절감을 위하여 외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텔 내부는 목재가구와 카페트, 소파 등 불에 잘타기 쉬운 물건으로만 가득했다. 1층에서 시작된 불길이 삽시간에 수직 상승하여 건물 전체로까지 번지게 된 이유다. 누군가의 욕심과 부주의가 모여서 결국 크리스마스에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할 참혹한 비극으로 연결되고 만 것이다.
 
화재 사건 이후 수사가 본격화되며 책임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이루어졌다. 호텔 사장 김씨와 시 공무원들이 결탁하여 방화문이 잘 설치된 것처럼 준공검사서를 허위로 작성한 정황도 드러났다. 

김씨는 첫 공판에 고혈압을 이유로 들것에 실려서 등장하는가 하면, 공판이 5분 만에 끝나자 곧바로 화재 부상자들이 입원해있던 병원 특실에 입원한 사실이 밝혀지며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김씨는 화재에 관련한 직접적인 책임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대연각 사고 이후 국내의 소방과 방재 시스템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고층 건물마다 방공 소방훈련과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고, 최대 23층까지 운용 가능한 소방 고가 사다리가 도입됐다.
 
대연각 사고로부터 6년이 흘러, MBC 제1회 <대학가요제>에 참여한 민병호씨와 서울대 트리오(민병호, 정연택, 민경식)는 '젊은 연인들'이라는 곡을 발표한다. 노래의 작사는 방희준, 작곡은 민병무. 두 사람은 바로 대연각 화재사고의 희생자들이었다.
 
당시 공짜 숙박권이 생겼다며 행복하게 호텔로 향했던 두 서울대생은 끝내 호텔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민병호 씨는 민병무 씨의 동생이기도 했다. 유품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악보 하나를 발견한 동생과 친구들은 "이 노래가 이대로 사라지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대학가요제'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기도 결심한 것이다.
 
지금 들어도 풋풋한 가사와 아련한 멜로디는 그 시절 못다피운 청춘의 안타까움을 상징하듯,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만든 노래는 남겨진 이들의 영원한 청춘이 되었다.
 
'하인리히의 법칙'은 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작은 사건 29번, 더 경미한 사건 300번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거대한 재앙에는 무수한 전조 증상들이 있다는 의미다.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도 기본만 잘 지켰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다. 한편으로 대연각 사고 역시 이후로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게 될 수많은 대형참사들에 대한 무수한 경고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꼬꼬무 대연각화재사고 젊은연인들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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