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위대한 영부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클라우디아 알타 존슨의 음성 일기(총 123시간)를 뼈대로 하여 1960년대 중후반 미국 정치권의 역사 일부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다(2023년 작품). 다큐멘터리 제목에 나온 '레이디 버드'는 본명보다 더 유명한 그녀의 애칭이다.
 
이 영화는 영부인 레이디 버드의 삶 가운데 공적인 삶에 각별히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 공적인 삶의 영역을 제대로 부여한 남편의 비중이 반 이상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남편은 케네디(JFK) 대통령 피살 직후 에어포스원(대통령 전용비행기) 안에서 갑작스레 대통령 선서를 함으로써 제35대 대통령 잔여임기를 승계한 부통령 린든 B. 존슨(LBJ)이다.

LBJ는 잔여임기 수행 후 대선에 도전해 압도적 득표율로 제36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다른 대통령들과는 달리 재선도전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후 낙향한다. LBJ의 임기중엔 미국역사상 여러 중요한 사건사고들이 많았지만, 굵직한 것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린든 존슨(LBJ)과 레이디 버드(LB) 린든 존슨(LBJ)의 에어포스원 대통령 선서 직전

▲ 린든 존슨(LBJ)과 레이디 버드(LB) 린든 존슨(LBJ)의 에어포스원 대통령 선서 직전 ⓒ 넷플릭스

 
첫 번째, LBJ는 통킹만 사태를 빌미로 베트남전쟁을 확전하였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을 불행한 쪽으로 밀어붙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 내에서 어마어마한 반전시위를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베트남 파병 파트너인 박정희정권 당시 우리나라에 왔을 때는 인기가 꽤 괜찮았다.

두 번째, LBJ는 미국인들에게 흑인민권법안 통과와 흑백갈등 격화를 동시에 경험케 하였다. 실제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하는 흑인민권법안에 전격 서명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에 과감하게 최초로 흑인을 선발하는 등 흑백화해라는 성과를 냈다고 설명되는 한편, 셀마 행진 등 대규모 흑인시위에 대한 개별 주정부들의 폭력진압에 대하여 적절한 정치적 해결방안을 내지 못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LBJ는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에서 대체로 긍정평가를 받는 대통령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인들의 역대 대통령 평가는 대통령의 당적(민주당 대 공화당)에 좌우되지 않는 편이고 좌우 진영논리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명단에서 LBJ는 10위 안에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정적 시민, 영부인 LB
 
LBJ의 아내 레이디 버드(LB)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손꼽을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한 영부인에 속한다. 예컨대 미래세대 교육을 위한 역사적 여성인물의 활약상을 모아둔 자료창고 격인 미국 국립여성역사박물관 웹사이트(www.womenshistory.org)는 그녀를 "환경운동가, 사업가, 정치활동가, 그리고 영부인"으로 소개한다.
 
LB는 미국 환경보호보건국 설립에 영향을 주었으며(1970년), 영부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미국 의회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1988년). 또 남편의 대통령 재직시 비밀녹취록 850시간을 공개하여 LBJ가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겪었던 정신건강 문제 및 심각한 우울증을 대중에게 알렸으며(1993), 자신의 녹음 일기도 대중에게 공개할 것을 허락하고 세상을 떠났다(2007). 시민의 알 권리를 포함해 공직자의 권한과 의무를 존중하는 동시에 '공적인 삶'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인식하고 실천했던 여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LB는 "나는 다만 열정적 시민일 뿐"이라 말하면서, 영부인이라는 직함(?)을 공적 활동의 도구로 잘 활용한 영부인이었다. 그 때문에 어떤 정치인들에게서는 공격을 받았고, 또 다른 정치인들에게서는 지지를 받았지만, 대학 시절 장래희망이 기자였던 LB는 자신의 판단력과 자기결정력을 믿고 정치적 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LB가 흠결 없이 100% 완벽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100%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으며, 문제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어차피 없다. 그렇지만 LB가 남편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을 낸 것만은 사실이다. LB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것은, 흑백평등과 환경운동이다.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그 내용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흑백평등, 환경미화, 레이디 버드
 
LB가 강조한 흑백평등은 남편 LBJ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그저 정책적 동조, 보여주기 식 수준이 아니었다. LB는 일상생활에서 흑백평등을 몸소 실현했다. 관련하여 다큐멘터리는 LB의 가족 요리사(흑인여성)의 증언을 들려준다. LB가 가족 요리사를 포함한 두 명의 흑인 일행과 여행하던 중 숙박시설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LB는 3명 모두 함께 숙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흑인과 백인이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쓰지 않던 그 시대, 그 숙박시설은 흑인 동반 숙박을 거절했다. 그때 LB는 주저없이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또, 다큐멘터리는 1960년대 미국 정치계의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도 들려주는데 그중 하나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FK)와 흑인민권법안 관련 일화다. RFK는 LBJ가 흑인민권법안에 힘을 실어줄 때까지는 흑인민권에 딱히 무관심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냉담했다(나중에 LBJ의 강력한 대선경쟁자로 나서면서는 열정적 흑인민권 지지자로 변모함). 이것은 LB의 근거없는 감상평이나 흑색선전 같은 것이 아니다. LBJ가 흑인민권법안에 서명할 당시 RFK의 냉소적, 비협조적 태도가 기록필름 안에 남아있다.
 
그리고 재클린 케네디와 LB의 관계도 영화 안에 짤막하지만 흥미롭게 묘사된다. 남편이 암살당한 지 5년도 되지 않아, 시동생(RFK)이 암살당했을 때 시동생 장례식에 참석한 재클린에게서 LB는 극심한 적대감을 느꼈다. LB는, 그 전까진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적대감이었다는 표현을 쓴다. 남편과 시동생을 불과 몇 년 사이 암살로 잃은 재클린의 적대감에 대하여 LB는 생각에 잠긴다.
 
혹시 내가 살아있기 때문일까? 나는 '애도의 말'을 중얼거리고 빠르게 재클린 앞을 떠났다. 우리는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RFK 애도의 날'을 지내고 나면,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이다.
 
생각과 의견에서 드러나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
 
LB가 집중했던 커다란 정치적 주제 중 하나는 백악관에서 비롯된 '환경미화위원회'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단순히 나무를 심고 꽃밭을 가꾸어 도시 내부와 고속도로 주변을 예쁘게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건강증진, 범죄율감소를 포함하는 포괄적 화해활동이었다. 당대 한 정치인의 올바른 평가처럼 LB의 환경운동에는 '환경, 소통'이라는 두 핵심어가 중요하게 들어있었다. 요컨대 "자연세계와 인위세계의 화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는 거의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당대 굵직굵직한 현안들에 대하여 LB의 생각과 의견이 담긴, 녹음한 음성을 그대로 재생해 들려준다. 나레이션이 따로 없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LB를 처음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시대정신과 여론추이를 읽어내고 여러 현안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 개진할 때마다 그녀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지혜가 느껴져,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례로,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기 2주일 전, 대선 선거운동 참모진 중 한 명이 '풍기문란'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건에 대응하는 단계에서 남편보다 더 뛰어난 판단력과 정무적 감각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요즘 총선 기간이라 부쩍 많아지는 듯한데 우리나라에도 여러 정치적 현안들에 관하여 SNS에 자기 나름의 의견을 밝히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그런 한편 시대정신, 정치적 감각, 공정한 판단력 등을 발휘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는 참 쉽지 않다. 즉각적 대응, 감정적 반응, 다른 정당 정치인 희화화 등이 좀 더 많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치적 현안뿐 아니라 아군&우군&정적 모두에게 일관되게 인간존중을 견지하며 독자적 의견을 개진하는 LB의 균형잡힌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영부인의 좋은 예, 아니, 열정적 시민의 좋은 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디버드 영부인 린든존슨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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