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다. 라디오에서 멋진 보컬과 달콤한 멜로디, 세련된 관악 연주가 나왔다. 미국 밴드 시카고(Chicago)의 '하드 투 세이 아임 소리(Hard to Say I'm Sorry)'였다. 그해 그래미상도 받고, 인기를 끌었다.

라디오 키드였던 나는 팝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시카고 노래를 그 뒤에도 꽤 접했다. '유어 디 인스퍼레이션(You're the Inspiration)', '하드 해비트 투 브레이크(Hard Habit to Break), 윌 유 스틸 러브 미(Will You Still Love Me?)' 등 히트곡이 이어졌다.

취향은 변한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팝을 수동적으로 듣다가 나만의 입맛이 생겼다. 하드록,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록, 재즈로 관심이 옮겨갔다. 라디오에서 점차 멀어졌고, 시카고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음악 동네의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1970년대 사이키델릭과 재즈록에 닿았다. 시카고 트랜시트 오서리티(Chicago Transit Authority)라는 밴드와 조우했다. 풍성한 관악에 날렵한 일렉트릭 기타, 몽롱한 듯 감싸는 해먼드 오르간, 거치면서도 그루브가 담긴 보컬. 내가 딱 좋아하는 소리였다.

로고를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경력을 뒤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카고 첫 번째 음반이었다. 시카고 트랜시트 오서리트라는 이름으로 인한 법적 분쟁을 피하려고 이름을 시카고로 바꿨다. '시카고 시 교통당국'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서다.

시카고는 관악을 전면에 앞세운다. 트럼펫을 부는 리 러그넨(Lee Loughnane), 목관 주자 월터 패러자이더(Walter Parazaider), 트롬본의 제임스 팬코우(James Pankow)가 주인공이다. 리 러그넨은 이름만 보고 발음하기 어려운데, 인터뷰에서 스스로 "시카고 트럼펫 주자 리 러그넨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이 뿜어내는 시원한 관악 파트는 여느 재즈 캄보 밴드 못지않다.

또 다른 축은 기타 주자 테리 캐스(Terry Kath)와 건반 주자 로버트 램(Robert Lamm)이다. 테리 캐스는 전형적인 음악 천재다. 진득하면서도 힘찬 노래에 기타 실력이 기가 막힌다. 시카고 공연장에 왔던 지미 헨드릭스는 연주를 듣고, 패러자이더에게 "기타 주자가 연주를 정말 잘한다. 나보다 낫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극찬이 또 있을까. '백인 레이 찰스'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노래 실력도 빼어났다.

로버트 램도 작곡, 노래, 키보드 3박자 실력을 갖췄다. 그가 작곡하고 노래한 5집 수록곡 '새터데이 인 더 파크( Saturday in the Park)'은 지금 시카고 공연 때 빠지지 않는다.

개명 이후 처음 낸 음반이 <시카고 2>다. 1970년에 나왔다. 이번 회에 소개할 음반이다.
 
 미국 밴드 시카고 2집.

미국 밴드 시카고 2집. ⓒ 시카고

 
이 두 장짜리 음반은 데뷔 음반의 음악적 성취를 잇고 있다. 록과 재즈를 기본으로 다양한 색채를 자랑한다. 클래식에서 영향을 받은 '메이크 미 스마일(Make Me Smile)'에서는 캐스의 기타 연주가 폭발한다. 2분 45초부터 1분간 지속되는 기타 솔로는 당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프로그레시브 재즈에 맥이 닿아 있는 '더 로드(The Road)', 기타와 키보드의 유니즌 플레이가 돋보이는 '웨스트 버지니아 팬터지스(West Virginia Fantasies)도 귀에 쏙쏙 박힌다. 그런가 하면 '컬러 마이 월드(Colour My World)'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플롯이 끼어든다. 1970년대를 풍성하게 했던 사이키델릭 팝의 전형이다.

최고의 곡은 '트웬트 파이브 오어 식스 투 포(25 or 6 to 4)'다. 작렬하는 관악에 기타와 키보드의 총주에 베이스 연주자 피터 세테라(Peter Cetera)의 맑은 고음이 쨍쨍하게 울린다. 가사가 마약 복용을 비유한다는 이유로 국내에선 금지곡이다가 1990년대 돼서야 풀렸다. 로버트 램이 만든 곡이다. 새벽(제목 뜻이 4시 25, 26분 전)에 잠 못 이루며 곡을 쓰는 상황을 담고 있다.

천재의 만용, 어이없는 죽음
 
시카고2 밴드 시카고의 2집 음반 내부

▲ 시카고2 밴드 시카고의 2집 음반 내부 ⓒ 최우규

 
이후에 내놓은 음반들도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호사다마랄까. 테리 캐스가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다. 1978년 1월 23일 캐스 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총기 수집가였던 캐스는 몇몇 총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총기를 치우라고 했다.

캐스는 만용을 부렸다. 장전이 안 됐음을 보여주려고 총구를 머리에 대고 쐈다. 총알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32살 생일 며칠 전이었다.

이렇게 1기 시카고 시절이 끝났다. 12집 <핫 스트리트(Hot Streets)>부터 2기로 볼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피터 세테라는 세련된 팝 음반을 만들어 냈다. 주요 상을 타며 인기를 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들은 음반들이다.

세테라는 시카고 밴드와 솔로 활동을 겸하다가 1985년 팀을 떠났다. 그 이후를 3기로 볼 수 있다.

당대 함께 했던 밴드나 아티스트들은 숨지거나 은퇴했다. 시카고는 건재하다. 올해 7월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콘서트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와 노래와 연주 실력을 들려줬다. 창단 멤버 중 로버트 램, 제임스 팬코, 리 러그넨은 70대 현역이다.

40대만 돼도 노장 취급을 받고 설 무대도 없는 한국 대중 음악계 현실에 비추면 부러울 뿐이다.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스(Blood, Sweat & Tears)를 좋아한다면 이들이 '교통당국'으로 오해받던 데뷔 음반과 시카고 2집부터 9집도 구미에 맞을 것이다. 세련된 어덜트 컨템퍼러리 팝을 좋아하면 '하드 투 세이 아임 소리, 유어 디 인스피레이션, 윌 유 스틸 러브 미?' 등이 담긴 16, 17, 18집을 들으면 된다.
B메이저AZ록 CHICAGO2 테리캐스 재즈록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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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기자로 23년 일했다.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홍보기획, 연설기획비서관을 했다. 음반과 책을 모으다가 시간, 돈, 공간 등 역부족을 깨닫는 중이다. 2023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말과 글을 다룬 책 <대통령의 마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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