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8 07:10최종 업데이트 23.11.0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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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공습 피해를 입은 가자지구 누세이라트 난민촌에서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 2023.10.31 ⓒ AP/연합뉴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한 달을 맞았다. 피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우려했던 전쟁 장기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미 경험하듯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국제사회의 분쟁 조정 능력이 전무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개별 주권국가들의 현명한 공권력-외교력 운용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다.

베스트팔렌 체제*와 뒤 이은 국민국가 시대의 개막은 지극히 유럽적 현실을 반영한 정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의 개념조차 필요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유사한 체제가 존재해왔다. 서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가 불가능할 만큼 여러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면서 다문명 국가들이 존재해왔다.

*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은 '국가' 단위에 최고지상권을 부여하고 국가간 주권의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 이후 유럽 국가들은 점차 국민국가(Nation State)화 되며 근대적 의미의 국가관이 생겼으나 커다란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이래 유럽과 동아시아보다 동유럽, 서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민족-영토 분쟁이 빈번했던 이유 중 하나가 민족과 국가 관계의 모순 때문이었다. 무인 지역 산악, 도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지구촌 영토분쟁은 복잡한 민족적 구성을 단순한 이분법적 국가 경계로 절단하면서 발생했다. 현대적 의미의 '국가'에 부여된 지상권과 주권평등원칙이 당연히 과-남용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 사건, 이스라엘 건립

서구 세계에 국민국가 시대가 열리고 있음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들만의 국민국가를 꿈꿨고, 그럴 마음이 전혀 없던 현지 주민들을 내몰고 건국된 것이 이스라엘이었다. 당시의 이주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합법적 토지 매입에 따른 이주였다는 항변도 많았다. 하지만 땅 매입이 곧 통치권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거주와 권력 수립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국가란 배타적 통치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건국은 가장 기본적으로만 봐도 영토와 국민, 주권이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이 세 요소가 주변의 다른 영토, 국민, 주권과 충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은 바로 이 충돌 위에서 인위적으로 이뤄진 사건이었다.

국민국가 수립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원주민들과* 인위적인 국가 건설을 원했던 시온주의자들의 갈등은 예견된 사안이었다. 그래서 20세기 초부터 줄곧 국제사회는 두 국가 설립과 상호 안전보장을 요구해왔다. 양측이 무언가에 대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할 때, 이를 둘로 나누는 방안이야말로 유대인들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기는 솔로몬 재판의 현실판 아닐까?

* 영국이 아랍국가 수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하는 내용의 맥마흔-후세인 서신도 오스만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아랍 세력의 비밀외교 과정이었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된 결정은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이스라엘 정부는 좌파 노동당이나 우파 리쿠드당 모두 중동 평화를 위한 방안 모색에 적극적이었다. 우파 정권은 중동평화를 위해 과감하게 시나이 반도 포기 결정을 내놓았고, 좌파 정권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 설립과 상호 안전보장이라는 원론적인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들은 한 정치인의 출현과 함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네타냐후의 등장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10월 28일 텔아비브 키르야 군사기지에서 베니 간츠 국가통합당 대표, 요아브 갈란트 현 국방부 장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던 당시의 모습. ⓒ AP/연합뉴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긴 재임 기록을 가진 그의 이름은 베냐민 네타냐후. 그는 증오의 심리를 권력 연장에 이용하는 가장 오래되고 비열한 정치전략을 누구보다 잘 구사하는 인물이다. 1996년 처음 집권한 그는 특히 2009년 재집권 이후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팔레스타인 때리기 전략을 구사했고, 그럴 때마다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인가, 국민이 하는 것인가. 증오의 정치가 권력 연장에 실제 도움이 됐다면 유권자들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의 이스라엘 국민들은 1948년 건국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그들의 전 세대가 가지던 일말의 공생 정치를 향한 양심마저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네타냐후가 그나마 대화의 국면으로 가려 할 때 그것을 막은 것은 이스라엘 국민들이었다.

네타냐후 총리가 1996년 6월 첫 임기를 시작한 후,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생을 위해 네타냐후 총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첫 집권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던 그는 호기롭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진행했고 그렇게나온 결실이1998년 10월 서명된 '와이리버 협정'이었다.

'수정 협정'까지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1999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점령지 군 철수, 팔레스타인 죄수 석방, 팔레스타인 지위에 관한 협상 종결 등의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그 협상이 네타냐후 총리에게 남긴 결과는 지지율 하락이었다. 물론 선거 패배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었지만 같은 해 앞서 5월에 열린 총선에서 우파의 결집된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네타냐후는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 후보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것이 21세기 팔레스타인 문제가 악화일로를 걷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네타냐후 총리를 변론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하고도 마지막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우파 성향의 유권자들은 팔레스타인과 공존의 방안을 모색하려는 거의 모든 정치인들을 정치적으로, 심지어 물리적으로 제거해내면서,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그들의 조국을 사지로 내몰았다.

광란의 권력, 증오의 정치

이후 재기에 성공한 네타냐후 총리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너무나 간단했다. 팔레스타인을 때리면 지지율은 상승했고, 지지율 상승의 보답으로 다시 팔레스타인을 때리는 야만의 정치가 그렇게 반복됐다. 그렇게 네타냐후 세력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기집권을 얻어냈고, 팔레스타인을 역사에서 지울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믿었던 듯하다.

극우 네타냐후는 2021년 6월 뉴라이트 성향의 정당 '야미나' 소속 나프탈리 베네트, 그리고 2022년 7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 '예시 아티드' 소속의 야이르 라피드의 짧은 총리직 수행을 지켜봤지만 2022년 12월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보다 더 극우에 해당하는 샤스, 오츠마 예후디트 등 정당들과의 연정이라는, 이스라엘을 절벽 끝으로 내모는 선택을 통해서였다.

2022년 12월 29일 출범한 마지막 네타냐후 내각은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상 최극단의 우익 정치세력 집합체였다. 올해 이스라엘 발 뉴스들의 상당 부분은 이들이 파괴하고 있는 이스라엘 국가의 헌법적 근간들에 관한 것들이다.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이들은 사법부마저 무력화시켰고, 광란의 권력 칼 놀림은 정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들이 입으로 안보를 말할 때, 실제 이스라엘의 안보는 무너지고 있었다. 네타냐후 극우 내각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모사드, 신베트 등 정보기관 수장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 광적인 이념정치를 뿜어냈다. 이스라엘 국방의 근간이 되는 예비군 장교들마저 훈련을 거부하게 만드는 비이성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마스를 키운 건 네타냐후'

이것이 10월 7일 하마스의 전격 기습공격 전야까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이념지상주의 권력으로의 정보는 차단되고 국방력은 마비됐다. 지난 야이르 라피드 내각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던 니잔 호로비츠는 프랑스의 외교전문 매체 <르 그랑 콩티낭>과 최근 인터뷰에서 하마스를 키운 건 네타냐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장관 시절 총리 산하 안보각료회의의 구성원이기도 했던 그는 가자지구 경계선 일대의 이스라엘 안보 관련 장비와 시설물들을 잘 알고 있다면서 수백 명의 무장 테러리스트가 그 장치를 뚫고 침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명백한 네타냐후 안보 정책의 총체적 실패라는 것이다.

네타냐후 정부의 책임은 안보의 실패뿐 아니라 정보의 실패에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네타냐후 내각이 이념몰이에 매달리는 동안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됐다는 것이 그의 증언에서도 나왔다. "그의 집권 수개월 동안 하마스는 무기를 비축하고, 군을 훈련시키고,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반복"했다면서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은 그 모든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사법 쿠데타'라 부르는 정부의 사법 기능 장악 시도 뒤에 이스라엘의 안보와 국방은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부인의 사치, 총리 자신의 각종 비리 자체는 국가의 안위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부패의 뒤에서 곪고 있던 국가의 정보, 보안, 국방기능은 이스라엘을 안보 마비의 국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역내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유대인들만을 위한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이스라엘 극우 집단의 망상은 정작 첨단 국방장비와 최고 수준의 정보기관을 보유한 자신들의 조국을 깊은 안보 공백의 국가로 만들었다. 

어찌됐든 불안해진 네타냐후의 정치생명
 

지난 10월 27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베나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진을 짓밟고 있다. 아랍어로 '전범'이라고 쓰인 구호가 적혀있다. ⓒ EPA/연합뉴스

 
전쟁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현격한 전력의 차이는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네타냐후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다. 그의 정치는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몰라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원한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또 유사한 비극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 내각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지지도 역시 과거와 같지 못하다. 전쟁 중의 내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국민들이 바라보는 정부에 대한 시선은 무서울 만큼 차갑다. 지난달 23일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가 발표한 설문조사를 보면 유대계 국민의 20.5%만 현 정부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현 정부를 신뢰한다는 아랍계 국민은 7.5%에 불과 했다.

과연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과 자신의 조국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그래 보이지 않는다. 전쟁 후 3주가 경과한 지난달 28일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전쟁을 '제 2의 독립전쟁'으로 규정했다. 정말로 3주 동안 생각해낸 현 시국에 대한 총리의 판단이 그 지경이라면 그의 정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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