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 Netflix

 
22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의 주인공이자 전직 노비인 이윤(김남길 분)은 일본군에 부역한 과거를 청산하고 만주(간도)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그가 옛 주인이자 일본군 상관인 이광일(이현욱)의 경고를 뿌리치고 만주로 건너간 뒤 마주하게 된 커다란 현실이 있다. 일제강점기 만주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인 마적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제1회 방송에서는 마적이 이 시대의 배경임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만주로 넘어간 이윤이 친한 누나인 무기 매매상 김선복(차정화 분)과 함께 노점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있을 때에 마적떼가 갑자기 길거리에 출현한 장면이다.
 
드라마가 17분쯤 경과했을 때 등장하는 이 마적떼는 일부는 걸어서, 일부는 말을 타고 거리에 출현한다. 총과 칼을 들고 여관식 식당인 주점에 난입한 이들은 사람들을 마구 죽이며 창문 너머로 던져버련다. 대로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상을 자행한다. 국수를 몇 젓가락 뜨다가 이 상황을 맞닥트린 김선복은 "야! 일어나!"라며 "쟤들하고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마적떼는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마적떼의 본거지인 만주가 아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만주 땅에서 벌어지는 마적들의 출몰 사건은 식민지 한국에서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중들이 기억하던 '마적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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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 Netflix

 
<도적: 칼의 소리>와 동시대인 1920년 9월 2일에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길림 지방에 마적 발호'에 등장하는 마적단의 규모는 상당했다. 3·1운동 이듬해에 발행된 이 기사 속의 마적들은 숫자가 5백 명을 넘었다. 지린성(길림성) 관군 병력이 토벌 작전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출장한 틈을 타서 마적떼가 8월 20일에 약탈을 벌인 사건에 관해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오백여 명으로 조직된 마적의 한 떼는 중국의 륙군 순경이 토벌키 위하야 디방에 출정한 틈을 타서 지나간 이십일 길림성 의란현 상삼성을 음습하야 먼저 감옥 문을 깨트리어 가처 잇든 죄수를 젼부 내여보내고 도윤공서(道尹公署)를 습격하야 불을 질넛슴으로 병(炳) 도윤은 단신으로 도망하얏스나 그의 딸과 계집 하인 두 명은 불 속에 타 쥭엇스며 큼직큼직한 상뎜은 많이 략탈되야손해가 막대하다더라."
 
마적떼가 감옥뿐 아니라 길림성장 밑의 도윤 일가족까지 습격해 그 집 여성 직원들과 도윤 딸이 화재로 희생됐다. 거리에서는 대형 상점들까지 약탈을 당했다. <도적: 칼의 소리>와 동시대에 활약한 마적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사다.

마적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꽤 강하게 각인됐다는 점은 일제강점기 유명 건달의 사례에서도 느낄 수 있다. 구마적이나 신마적으로 불린 건달들이 식민지 한국에 있었다는 것은 마적이란 말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위압감을 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방성수 조선일보사 기자가 쓴 <조폭의 계보>는 1930년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시기 항일 주먹으로는 구마적과 신마적이 대표적"이라며 "경찰 자료에 따르면, 서울 왕십리와 서대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구마적(고희경)을 조선 주먹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보고 있다"고 서술한다. 왕십리와 서대문에서 활약한 서울 건달이 만주에서나 흔한 마적이란 표현으로 지칭됐다. 마적이 한국인들의 심리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수 있다.
 
마적들이 광활한 만주 땅을 활동 무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과 청제국이 1910년부터 2년 간격으로 연달아 멸망한 일과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국가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멸망한 일은 양국의 접점인 만주 지역에서 국가 공권력이 동시에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마적떼의 발호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청나라 멸망과 함께 중화민국이 수립되기는 했지만, 건국 직후의 중화민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했다. 이 신생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베이징이나 난징을 무대로 전개됐다. 그래서 만주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은 한동안 한반도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일본이 만주 점령을 향해 본격적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1927년부터다. 이런 상황들은 한반도와 중국의 접점인 만주에서 제3세력이 힘을 키우는 데 유리했다.
 
중국의 군벌 지도자인 장쭤린(장작림)이 만주의 지배자로 떠오른 것은 1919년경이다. 그 뒤로도 그의 만주 지배권은 완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적들과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수준에 그쳤다.
 
마적떼가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 Netflix


만주에 대한 중앙 정치권력의 영향력이 약했다는 점과 더불어, 마적떼 발호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정치적 요인이 있다. 만주는 베이징 일대나 중국 남동부에 비해 서양열강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덜 활발했다. 서양열강이 베이징·톈진·상하이·홍콩을 대하는 태도로 만주 정책을 펼쳤다면, 마적떼의 힘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88권에 실린 박강 부산외대 교수의 논문 '1920년대 마적과 한인 그리고 아편'은 "만주에는 식민지 조선과 러시아간 국경을 이루는 변경 지역이 있었고, 이에 인접한 산맥 등이 있었다"라며 "이러한 지리 조건은 마적이 활동하거나 은거하기에 유리한 장소를 제공하였다"고 지적한다. 국가권력들이 교차하는 곳이자 산악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마적떼의 근거지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식민지 한국에서 만주로 향하는 인구이동도 마적단의 성장과 무관치 않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국가든 갱단이든 일정 수의 '백성'이 있어야 존립할 수 있다. 식민지 한국에서 만주로 밀려나는 혹은 유입되는 한국인 이주민들은 마적들이 볼 때는 신규 백성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도적: 칼의 소리>에 나오는 마적들은 독립군을 억압하고 일본군을 돕는 방법으로도 자신들의 활로를 모색한다. 이런 방법 말고, 이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원인 된 것은 금품 강탈, 인질 납치 등이었다. 그에 더해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수입원은 마약 취급이었다.
 
위 논문은 "마적의 수입원과 관련해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또 다른 것으로 아편 수입을 들 수 있다"며 "아편 수입은 길림·흑룡강 일대에 발호하는 마적과 그 관계가 매우 긴밀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대한제국과 청제국이 거의 동시에 몰락한 사건은 양국의 중간 지대인 만주 지역에서 마적떼가 창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은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뿐 아니라 한반도에 남은 한국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식민지배와 함께 한국인들이 맞닥트린 커다란 벽은 일본지배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만주 마적떼도 식민지 시대 한국인들이 극복해야 할 커다란 벽이었다.
마적 만주 일제강점기 도적 칼의 소리 지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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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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