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나 미디어에서 왕자(王子)는 종종 판타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백마탄 왕자님'이라는 클리세가 있을 만큼 잘생긴 외모에 부와 지위, 명예를 두루 갖춘 이상적인 주인공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왕자중에서도 미래의 후계자가 될 왕세자(王世子)라면 그야말로 금수저의 끝판왕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그랬을까. 정작 태어나보니 미래의 왕이 되어야할 운명을 타고난 왕세자의 삶이란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행복하기만 했을까. 25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40회는 '조선은 어떻게 뱃속부터 왕세자를 교육시켰나' 편을 통하여 우리가 모르는 조선 시대 왕세자들의 실제 인생을 조명했다.
 
조선 시대 최초의 왕세자 교육은 1402년, 3대 태종 이방원 때부터 시작됐다. 왕위계승 문제로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던 초기의 조선은 세자 교육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와 형제들을 제치고 권력을 장악한 태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다지기 위해서는 똑똑하고 유능한 후계자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결국 태종을 눈물을 머금고 장남을 페세자시킨뒤, 셋째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니 이가 곧 세종대왕이다. 이후 왕세자 교육은 조선의 역사를 거치면서 점차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놀랍게도 아직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인 태교부터 시작됐다. '태교신기'는 1800년 쓰인 조선 최초의 임산부 태교법 교습서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여기서 '스승이 십년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미가 십개월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표현을 통하여 태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왕가에서는 왕비나 왕세자비가 임산부가 되면 옥판에 기록한 성현의 말씀을 매일같이 읽게 하는 것으로 태교를 시작했다. 임신 3개월째가 되면 왕비는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태교와 몸을 돌보는데 주력한다. 이때부터는 남편인 국왕조차도 왕비를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다. 항상 나라의 대소사를 돌봐야하는 왕의 근심이 자칫 아내인 왕비와 복중 태아에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임신 5개월째가 되면 왕비에게는 주변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당시의 어린이 학습서를 매일같이 24시간 읊어주게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태교를 위한 오디오북 청취였던 셈이다.
 
7개월째가 되면 식단관리에 들어가는데 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고기에 대하여 일부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고, 특히 태교에 있어서 고기가 금기로 여겨졌다. 현재처럼 고기관리와 위생관념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적 상황에서 위생 측면에서 산모에게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단백질은 고기 대신 순두부 등으로 보충했다고.

출산이 임박하면 '산실청'이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되어 출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24시간 가동되는 왕실 산부인과라고 할 수 있다. 각 분야 최고의 어의와 의녀들이 소집되어 상시 대기했다. 산실청의 최고 책임자는 현 국무총리급에 해당하는 현역 정승들이 임명됐다. 왕실의 후사를 낳는 것은 조선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나랏일이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출산할 자리에는 볏짚-돗자리-가머니- 양털방석-기름종이-백마가죽 등을 차례로 깔며 후계를 이을 왕자의 출산을 기원했다. 진통 끝에 왕비가 아이를 출산하면 남편인 왕이 직접 구리종을 쳐서 아이의 출생을 알렸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무병장수한 고위관리의 헌 무명옷을 입혀서 똑똑하고 건강한 기운이 아이에게 전달되기를 기원했다.
 
왕의 장남이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기전의 호칭을 원자(元子)라고 한다. 원자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곁을 떠나 육아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보모상궁과 궁녀들에게 맡겨졌다. 육아 경험이 있는 궁녀들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가 직접 선발했고, 이중에서 특히 모유가 풍부하고 심성이 고운 이들을 가려서 유모로 발탁됐다.
 
조선의 원자는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쓰기가 가능해지는 5세때부터 사부를 모시고 정식 교육을 시작했다. 원자의 교육기관은 강학청(講學廳)이라고 불렸다. 유학국가였던 조선은 소학-효경 등 유교의 기초 경전들이 필수 교과서로 활용됐다. 또한 조선 시대의 교육 방식은 강론이라하여 읽은 글을 스승이나 시관 앞에서 외워서 들려주게 했다.
 
한마디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나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한문 글귀를 달달 외우는 극한의 '암기지옥'을 통과해야했던 것. 암기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왕실에서 민가까지 가장 보편적이고 당연한 교육방법으로 인식됐다. 원자는 아침-점심-저녁으로 매일같이 45분씩 강학청에서 수업을 받았다.
 
물론 교육이라고 해서 항상 책만 외운 것은 아니다. 좋은 집안의 똑똑한 아이들로 선발된 배동들을 원자의 또래 친구로 붙여주어 투호 놀이 등으로 함께 어울리게 함으로서 원자의 사회성을 높이는 교육도 병행했다. 배동은 조선의 공신이나 고위관료의 자제 중 똑똑한 아이들을 다양한 연령대로 선발했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는 친구관계일뿐 아니라 훗날 즉위후에는 국왕의 최측근이 되기도 했다.
 
8살 전후가 되면 원자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이상, 왕세자로 책봉되어 정식으로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 국왕 부부가 거처하는 곳을 대조전, 집무처는 희정당이라면, 왕이 주로 머무르는 공간에서 동쪽에 있는 왕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이라고 불렸다. 여기에는 앞으로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를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에 비유한 의미도 있었다.
 
왕세자로 책봉되면 전담교육기관은 강학청에서 시강원(侍講院)으로 바뀌어 한층 심화된 유교 교육을 실시한다. 동궁에는 생활시설과 교육시설이 함께 위치해 있었고 스승들은 왕세자가 언제든 공부할 수 있도록 24시간 교대로 근무해야 했다. 이는 현대로 치면 왕세자 한 명만을 위한 일종의 왕실 기숙학교였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24시간 스케줄을 돌아보면 현대의 수험생들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다.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왕의 수라상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시선'으로 효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는 왕세자의 자질을 판단하는데도 근거로 활용될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일정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조강을 시작으로 주강-석강으로 이어지는 유교 교육이 실시됐다. 정규수업 외에도 보충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소대(오전)와 야대(야간)까지 있었다. 모두 합치면 왕세자는 하루에 약 12시간을 공부에 몰두해야 했다. 현대로 치면 8살때부터 명문 고등학교 입시반 수준의 치열하고 살벌한 교육을 이수해야했던 것.
 
왕세자의 교과서는 논어, 맹자, 시경 등 이른바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불리우는 대표적인 유교 경전들이었다. 이때도 교육 방식은 역시 스파르타식 암기였다. 어릴때부터 조기교육을 받은 세자들도 인간인지라 암기를 힘들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현세자(16대 인조의 아들)와 현종(조선 18대 국왕) 등은 세자 시절, 예습-복습할 내용을 얼마나 읽었냐는 스승의 날카로운 질문에 '20-30여 차례 정도'라고 나름 머리를 굴려 답했지만, 곧바로 돌아온 것은 "최소한 100번은 읽어야 통달할 것"이란 면박이었다는 이야기가 기록에 남아있다. 공부 안한다고 스승에게 혼이 나는 것은 왕세자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게 양반 사대부들은 모두 높은 수준의 유학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뛰어난 신하들 사이에서 조선의 왕은 더욱 높은 학식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교 경전 100번 읽기는 당대 기준으로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교육열로는 기본적인 상식에 가까웠다.
 
왕세자는 매일 해당 부분을 제대로 공부했는지 확인받는 암기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또한 매달 두세번에 걸쳐 현대판 중간고사라고 할 수 있는 '회강'을 치러야 했다. 여기에는 왕세자를 교육하는 20여 명의 스승은 물론이고, 가끔씩 아버지인 국왕까지 직접 참석하여 왕세자의 교육 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암기에 시험에 시달려야했던 왕세자가 느껴야했을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를 짐작하기 어렵지않다.
 
또한 왕세자가 배워야할 것은 학문만이 아니었다. 왕세자는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등 일종의 교양수업과 예체능까지 두루 섭렵해야 했다. 빡빡하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도 다음날 암기시험을 준비하느라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야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후계자인 왕세자에게 온갖 스파르타식 교육이 집중된 것과 달리, 일반 왕자들에 대한 교육은 느슨했다. 왕자들은 종학이라는 장소에 따로 모여 교육을 받았고 소수의 스승들이 다수의 왕자들을 가르치는 구조였다.
 
훌륭한 군주 양성에 초점을 맞춘 왕세자와, 능력과 상관없이 권력에서 배제되고 작위와 녹봉을 받는 명예직만을 누렸던 왕자들의 교육에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왕은 학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느슨할 수밖에 없는 왕자들을 보고 "여러 왕자들이 종학에서 학습하고 있지만, 날마다 유희를 일삼고 세월을 허비하여 끝내 효과가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도한 교육열이 끝내 비극을 부른 사례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와 정조다. 조선 21대왕 영조는 모친이 천한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었던데다, 이복형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 등으로 인하여 평생 정통성 콤플렉스를 간직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영조는 그래서 후계자 교육에 집착했고 아들인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에게 어린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적 소양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조의 교육을 받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과 2살에 세자로 책봉했고, 보통 8살부터 시작하는 시강원 수업도 3살로 앞당겼다. 초기에는 학업성취가 뛰어난 아들을 보며 만족했지만, 사도세자가 학문보다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지니는 무인 기질을 드러내자 이에 영조는 큰 실망감을 드러내고 갈등이 깊어졌다.
 
영조는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녀서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고, 설사 아들이라고 해도 한번 눈밖에 난 이는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학대했다. 영조와의 계속된 갈등에 정신적으로 흔들린 사도세자는 점점 이상 행동을 일삼기 시작했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문제아로 전락했다.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영조는 "만일 그대로 익히고 따랐다면 어찌 오늘같은 일이 있었겠느냐"며 사도세자의 비극을 자신이 아닌, 왕세자 교육을 등한시한 사도세자와 주변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상적 유교군주 육성에 초점이 맞춰진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애초에 개인의 성향차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특히 강압적이었던 영조의 성향이 더해진 사도세자 교육은 그 부작용이 극대화하며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이나, 수험생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억압하는 교육구조와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사도세자의 사례는 지금도 조선 왕세자 교육사에서 최악의 실패사례로 남아있다.
 
반면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또 달랐다. 정조는 불과 4살때부터 날이 밝기전부터 독서삼매경에 빠질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성품을 타고났다고 한다. 손자가 사도세자처럼 될까 걱정하던 영조는 정조가 12살 때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조가 책을 읽는 게 좋다는 정조에게 "성적이 미달하여 회초리를 맞게 되어도 좋다고 할수 있겠나"라고 질문하자, 정조는 "그럴 경우에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바로 영조가 원하는 모범답안이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크게 만족하고 이후로도 아낌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22대 국왕에 오른다. 아버지의 가슴아픈 비극을 딛고 정조는 왕세자 교육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남았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희생당했다는 트라우마는 평생 정조의 인생을 관통하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말을 물가로 끌 수 갈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최고의 교육환경을 갖췄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개개인의 성향에 맞는 교육일 것이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왕세자의 지위에 올랐으나 교육에 따라 극과 극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사도세자와 정조 부자의 이야기에서 '올바른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벌거벗은한국사 왕세자 교육열 사도세자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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