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 쉼표

 
<역할들>의 예고편에서 인상 깊었던 건 연극 오프닝을 따온 연기자들의 독백이 두 차례 반복되는 지점이다. 위의 문구처럼, '원초적 불안감, 죽음의 공포, 두려운 미래, 갇혀 있는 삶' 이 묵직한 문장들은 두 차례 반복된다. 그만큼 영화를 만든 이들은 작품의 소화에서 해당 문장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 터무니없이 비장함이 감도는 글귀는 제대로 구현될 것인가가 영화를 관전하는 핵심 포인트일 테다.
 
'내부자들'이 선보이는 자전적 경험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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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 쉼표

 
한국독립영화에서 영화의 내부자들을 다룬 작품은 나날이 늘어가는 중이다. 영화제에 소개되는 단편작품 중 영화과 재학생들이 졸업 작품에 대해 느끼는 중압감을 소재로 한 작업은 차고 넘쳐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 전반에 대한 작품으로 시야를 넓힌다면 너무 많아서 목록 정리가 힘들 수준이다. 이렇게 당사자가 자신들의 숨은 이야기를 다룰 때는 장단점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일단 우리가 흔히 드라마를 보다 느끼는 감정, 총 파지도 제대로 못하는 군인 캐릭터나 메스 한번 안 잡아본 것 같은 의사 캐릭터를 보게 될 위기는 모면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뒤따른다. 만든 이들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 소재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장점은 동시에 치명적 단점으로 언제든 돌변할 맹독성을 감추고 있다. 너무 익숙한 소재를 다루다 보니 제작과정은 더없이 순탄하게 물 흐르듯 진행된다. 그런데 막상 바깥에 나온 결과물은 관객에게 해석불가인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복어 요리사가 처한 것 같은 위기의 상황이다. 만든 이들은 편하고 즐겁고 좋기만 한데 정작 결과물을 즐기며 봐야할 이들에겐 너무 난이도가 높고 진입 턱을 넘어서는 것부터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 단편소설의 영원한 전범, <방망이 깎던 노인>에서 살 사람 본위가 아니라 팔 사람 본위라고 방망이 깎는 노인의 행태에 대해 화자가 투덜대는 상황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런 부류의 작업들은 또다시 내부자 집단의 정체성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스크린 밖의 구성원과 스크린 안의 구성원이 만든 결과물의 색깔은 (같은 영화계 인사이더라 해도) 꽤나 다른 맛을 보여주곤 한다. 감독은 물론 다수의 스태프는 연출을 지향하는 경우라 공통분모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같이 묶어서 봐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스크린 안에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연출한 작업은 딱 꼬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좀 다른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역할들>은 확연하게 드러나는 후자의 색채가 짙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미로 같은 구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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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 쉼표

 
영화가 시작되면 4명의 배우를 중심으로 차례로 각자의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여기에 추가로 2명의 배우가 그들과 연결되며 등장한다) 무명 연극배우들의 일상은 그들이 준비하는 공연과정과 교대로 혹은 섞여들면서 함께 전개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관객 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꽤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소재들의 조합을 통해 <역할들>은 이채로운 풍경을 관객에게 전하려 시도한다.
 
A는 연극 연출을 하며 다른 배우들과 함께 그 준비에 매진하는 중이다. 하지만 개인시간에는 본업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생계문제 해결을 위해 꼭두새벽부터 어두컴컴한 집에서 김밥을 말아 출근시간에 판다. 무명 배우의 애환을 강조하고자 일부러 영화 속 배경도 엄동설한이다. 손님 중 다단계회사 사원은 자꾸만 A에게 껄떡대며 다단계 입사를 권한다. 서비스업 종사자라면 감정이입이 되어 부르르 떨거나 진저리칠 상황이다. 단골 행세를 하니 단호하게 거부하지도 못하고 좋게 넘어가지만 이중의 스트레스는 피할 길 없다.
 
B도 무명배우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그는 이삿짐센터, 택배, 건설일용직을 전전하며 틈틈이 잘 오지도 않는 역할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도중 허리를 삐는 바람에 끙끙 앓는 일이 잦다. 이제 힘들어서 노가다 그만둬야겠다고 푸념하는 그에게 아내는 연기를 그만둘 생각은 없냐고 진지하게 묻는다. 아내가 보기에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B는 부정하는 중이이다. 그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하는 이삿짐 현장에서도 자주 참가하는 오디션 때문에 꾸준히 일을 나가지 못하니 신용을 얻지 못한다. 신경써야 할 일은 자꾸 늘어만 간다.
 
C도 잘 쓰임 받지 못하는 배우다. 그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 곧 2세를 볼 예정이다. 그는 자신감 충전 겸 복싱을 배우러 체육관에 나간다. C는 술집에서 자주 만나는 후배에게 자랑을 잔뜩 섞어가며 복싱의 유용함을 예찬한다. 자기 자랑의 연장선인지 후배를 향한 충언이지 알 순 없지만 그는 후배에게 함께 도장에 나가길 권한다. 하지만 정작 C의 권투실력은 그리 늘지 않는다. 도장의 고1 여학생에게도 흠씬 두드려 맞고 손사래를 친다. 체육관 관장이 제안한 생활인 대상 아마추어 경기에 나서게 된 그는 기대에 부풀어 자신이 끌어들인 후배에게 스파링 파트너를 청한다. 하지만 정작 그 후배는 관장이 권투선수로 전향하라 설득할 만큼 실력자다. 결국 스파링 상대로 나선 후배에게 완패한 끝에 글러브를 내던져버린다.
 
D는 한창 공연을 준비 중인 극단 막내다. 대개 신입들은 바로 공연에 참여하기 힘들다. (이쪽 동네는 중세적 수공업 세계에 가까운지라) D 역시 공연에서 연기 대신 음향과 조명 스태프를 맡고 있다. 무대가 아닌 뒷켠의 어두컴컴한 기계실에서 틈틈이 대본 연습을 하면서 음향과 조명 등을 담당하는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말 못할 고충이 하나 있다. 극단 선배들은 서로 충돌하는 주문을 거듭 반복한다. 배우는 음향 키워 달라 하고 연출은 통일성 깨진다고 줄일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조율하면 될 일을 해결하지도, D에게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다들 어디서 많이들 보던 익숙한 그림들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내부자들이 우리 사정 좀 알아달라고 부르짖으며 이해를 청하는 전형적인 '클리셰' 내용이다. 보고 있으면 애잔하기는 한데 우리 사회가 문화예술인들에게 대하는 관점의 기본자세, "네가 좋아서 선택한 길 아니냐?"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이야기인 게 사실이다. 연극배우들이 벗어날 길 없는 생활고나 사실상 백수 취급받는 주변의 몰이해와 냉대, 비인기 종목 특유의 폐쇄적이고 수공업적인 창작여건 문제들은 다른 문화예술 분야를 조명할 때에도 익숙한 지점들이다. 연극공연을 준비하는 풍경 또한 디테일하게 묘사는 되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룬 관련 작품들을 섭렵한 이들이라면 특별히 새롭게 느껴질 부분은 적어 보인다. 그렇다면 <역할들>은 시대착오적 자기연민에 불과한 철지난 레퍼토리인 걸까?
 
영화를 만든 이들은 여기에 개별 사연들과 공연준비과정을 조합해 중층적 극중극 구조를 제시한다.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배우 각자의 복수 캐릭터 소화를 확인하면 본 작품의 야심을 깨닫게 된다. 그저 배우 출신 감독이 동료들과 함께 자전적 이야기를 담는 작업과 '차이나는' 변별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런 차원에서 <역할들>은 실험영화/메타영화의 범주로 분류될 만하다. 다만 앞서 내부자들의 영화에서 발생하는 한계점을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다. 배우의 입장에서 한 작품에서 10개의 역할을 다 소화해낸다는 건 연기력을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와 별개로 관객이 다중연기를 일일이 구분해가며 관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이 받던 오해가 여기에선 진실에 가까워진 셈이다.
 
화면에 보이는 것 말고도 품은 게 많은 영화
 
 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영화 <역할들> 스틸 이미지 ⓒ 쉼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올라가는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섯 명의 출연자들이 영화의 거의 모든 스태프 롤을 분담해 소화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연기는 물론 촬영과 편집, 음악, 녹음 등 거의 모든 현장 작업을 이들이 분담해 소화해냈다. (스토리 상 몇몇 설정은 출연배우 개인의 체험담에 가깝기도 하다) 제작과정을 놓고 보면 독립영화의 정수를 구현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추가로 제작정보를 보면, 본 작품은 2017년 DAUM 스토리 펀딩 "나는, 무명배우" 프로젝트로 259명의 후원모금을 통해 제작비를 조달한 것으로 나온다. 과정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독립영화 정신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이는 상당히 주목받을 만한 시도다. 한국독립영화는 과거엔 유독 대항언론의 역할을 도맡아 온 역사가 각인되어 왔지만 이제는 과거 향수에 가까운 실정이다. 요즘에는 독립영화가 그저 상업영화로 향하는 견습생 과정으로만 치부되곤 한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본무대'로 스카우트 되길 기다리는 대기실 같은 상황인 셈이다. 여러 유형의 공공기금 지원제도에 목 매달며 지원사업에 뽑히기 좋게 맞춤형으로 획일화된다는 비판도 툭하면 나온다. 또 아마추어리즘과 동떨어져 자기 영화 조건에 맞지 않게 눈높이만 올라간다는 혹평도 듣곤 한다. 학생영화 평균에 딱 걸치는 연출과 시나리오에 비해 과도한 클래스의 배우와 장비를 소모하는 경향들도 곳곳에서 목격된다. 이런 세태와 비교하면 <역할들>의 용감한 도전은 더 응원 받아 마땅한 시도라 하겠다.
 
그렇지만 결과물을 놓고 보자면 아무래도 만든 이들 본위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꽤 흔해져버린 시도, 영화 내부자들에 의해 영화 속 영화 구조로 창작된 작업들 중에선 확실히 변별력을 가지는 건 별개로 논하고 말이다. 물론 연극공연을 즐겨보는 이들과 영화를 주로 보는 이들에게 본 작품의 이해도는 조금 더 달라질 것도 고려해본다. 영화보단 연극공연 실황을 영상으로 담은 데 가까운 작품적 특성이 분명 작용할 것이다.
 
영화에서 복싱을 배우는 출연자가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마다 곡은 바뀌지만 연속성을 띄며 배치된 들국화(전인권)의 노래들이 <역할들>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나르시시즘 예시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곡인데도 이 영화에서 해당곡이 쓰이는 방식은 선호할 수 없다. 너무 익숙한 사용법이라 노래가 흐르는 순간 의도성이 너무 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해당 문제를 알고도 꼭 넣고 싶어서 삽입했다면 과잉에 가깝고, 문제의식을 논의하지 않았다면 관성적 활용이라 판단해본다.
 
예고편에서 배우 중 한 명이 의구심을 드러내는 부분을 돌아보면 영화를 만든 이들은 '확신범'에 가까워 보인다. <역할들> 속 배우들의 연기력과 전하고픈 메시지는 절절히 와 닿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는 걸 감안해보면, 전개상 돌출하는 몇몇 장면들,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음악 사용들은 (제작여건의 빈한함과 함께) 그런 혐의를 더한다. 하지만 그런 과잉이 가져다주는 인상적인 순간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연극무대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듯 말미의 장면들이 특히 그렇다.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 지향의 독립영화보다 때로는 이런 작품들에 더 깊은 인상을 받는 이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 때문에 영화를 다 본 후 엔딩 크레디트 롤을 꼼꼼히 봐 주시길 꼭 권하는 바이다.
 
<역할들>은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영화의 첫 번째 관객으로 자신들을 상정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독립영화와 안 팔리는 연극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라면 영화를 만든 이들 옆자리에서 함께 수수한 무대를 즐기고 뒤풀이에 함께 낄 그런 풍경이 이 작품에는 진하게 묻어난다. 다양한 형식과 소재를 담은 작품은 충분히 더 많이 소개될 권리가 있다.
 
<작품정보>
 
역할들 Moments of Role
2021|한국|드라마
2022.03.31. 개봉|79분|12세 관람가
감독 연송하
주연 윤종구(종구/ 영준/ 복싱선배/ 단속반1 역)
      김범석(범석/ 슬기/ 동창2/ 김밥손님1/ 단속반2/ 에이전시실장 역)
      김원정(원정/ 인희/ 복싱고등학생/ 송하엄마/ 김밥손님2/ 대학선배2 역)
      연송하(송하/ 남희/ 종구부인/ 복싱장단원2/ 대학후배 역)
      윤정일(정일/ 이삿짐사장/ 환경미화원/ 복싱장단원1/ 극단단원1 역)
      박재철(복싱관장/ 다단계아저씨/ 동창1/ 극단단원2/ 대학선배1/ 알바후배 역)
기획/PD 연송하, 백재호
각본 김범석, 김원정, 박재철, 윤정일, 윤종구, 연송하
제작/연출 연송하
촬영 김홍기, 이희섭, 연송하
편집 백재호, 김수범, 연송하
조감독 윤정일
조명/음향 박재철
미술/의상/분장 김범석, 연송하
제작 및 배급 쉼표
 
2020 제7회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폐막작
2020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 개막작
 
P.S.
여기까지 도착하기 전, 아마도 지금까지 소개했던 작품들 중 (수상내역을 빼면) 가장 긴 작품정보를 기재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경유했을 미지의 독자들에게 해명하려 한다. 저 장황한 데이터 내역은 곧바로 <역할들>이란 작품을 소화하는 핵심 키워드로 연결된다. 저 정보에 대한 숙지 없이 해당 영화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어렵다고 판단해 손가락 노동을 감수한 것이니 이해와 배려를 청하는 바이다.
역할들 연송하 윤종구 김원정 김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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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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