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모파상의 단편 <비곗덩어리>를 떠올리며
 
기 드 모파상의 작품 중 <비곗덩어리>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교외로 피난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다. 여객마차에 합승한 고귀한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일행 중 '비곗덩어리'라 자기들끼리 멸칭으로 부르는 한 여인이 불편하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비곗덩어리'는 붙임성 있고 친절한 성품에 열렬한 애국자이지만 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일행들에게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들이 말 섞기 곤란한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급히 떠난 피난길에 유일하게 비상식량을 준비한 이는 비곗덩어리뿐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전쟁 통이라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하거나 식사를 할 곳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고상한 신사와 숙녀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급기야 한 부인이 실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기갈에 굴복한 일행들은 넉살좋게 그녀에게 아양을 떨면서 비곗덩어리가 친절하게 나눠준 성찬을 즐긴다. 그렇게 피난길은 계속된다.
 
그러나 곧 독일 군 점령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난관이 닥친다. 일행들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다. 그전까지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던 열혈시민들은 다들 눈치만 보는 참이다. 독일 장교가 성 접대를 원한다는 걸 파악한 일행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적군 장교에게 접대부를 붙이기로 합의한다. 결국 '비곗덩어리'는 전체의 안전을 명목으로 성 접대를 강요당하게 된다. 일행 중 누구는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이는 어른다. 혹자는 애국심에 호소하고 또 다른 이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그녀의 희생을 재촉한다.
 
결국 비곗덩어리는 일행을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그녀의 희생과 노고에 돌아오는 건 급한 불 끄고 안도한 일행의 멸시와 외면일 뿐이다. 프랑스 국민이라도 일등, 이등이 나뉘는 것이다. 김동령·박경태 감독의 기지촌 연작을 보자마자 그 소설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들은 보다 우월하고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할 품위 있는 시민들이니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타인은 기꺼이 희생해 마땅하다는 극단적 규칙 공리주의의 풍경이다.
 
비곗덩어리의 비참한 운명은 (한국 현대사에서 수만 명이 거쳤던) 기지촌의 유흥·윤락업소 종사자들 대부분에게는 더 가혹하게 펼쳐졌다. 전혀 위로가 될 리 없지만, 이들에게 공허한 치사로 '외화벌이 애국자'라던 상찬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한국사회는 그녀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지워버리려는 태세로 전환한 지 오래다. 하지만 분명 실재했던 존재들이 잠자코 지워질 순 없는 노릇. 20여 년 째 기지촌 주위를 맴돌며 이들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기억 투쟁'을 벌이는 두 감독의 신작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감독들의 작업에서 정점에 오른 현대의 신화를 탄생시킨다.
 
2_신화가 탄생하기 전 단계: <거미의 땅>의 기록
 
"거미의 땅"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거미의 땅"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주)시네마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설마 할까 했던 우려를 떨치고 극장 개봉을 시작했다. 개봉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배급사가 염려될 정도로 이 영화는 만만하지 않은 주제와 그에 어울리는 파격적 표현양식을 가졌다. 과연 누가 이 기이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지 궁금함이 밀려온다. 그런 양가적 감정을 억누르며 극장에서 영화를 맞이하기 위한 복습을 준비한다. 감독들의 전작은 주인공과 공간 배경이 연결되는 <거미의 땅>(2012)이다. 이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어떻게 했는지 전부 다 보긴 했다. 한숨이 턱 나오고 긴장이 풀렸지만 편두통 같은 여운이 머릿속을 맴돈다.
 
김동령, 박경태 두 공동감독은 2002년부터 20년째 기지촌의 과거와 현재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고 한다. 각자 다른 경로로 기지촌에 발을 들여놨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권리를 지원하는 '두레방'에서 만난 뒤로 현재까지 공동으로 작업 중이다. 두 감독은 개별 작업도 병행하지만 진득하게 기지촌 동네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영화 외적인 주거나 일상의 곤란한 문제들도 함께 의논하거나 형편 되는 한 도움을 나누며 관계를 맺어왔다.
 
그런 공동감독의 협업은 여타의 기지촌 문제를 담은 작품들과 심급이 다른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 인내와 성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게 바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직전 작업인 <거미의 땅>이다. 이 작품은 바로 한국현대사의 '비곗덩어리'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국위선양을 전제로 '한강의 기적'이라 자화자찬하는 놀라운 전후재건과 경제성장은 수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수반했음을 사실 우리 모두 잘 안다.
 
하지만 (누구나 재수 없어 끌려갔지만 인정하긴 싫기에 무용담만 기억하고픈 군 생활처럼) 우리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위대한 독재자의 선견지명과 그에 충심으로 화답한 신민들의 신화로 그 과정을 기억하려 한다. 베트남 정글과 중동의 사막과 독일의 탄광에서 외화벌이에 분골쇄신한 이들은 나중에 공허한 상찬의 대상이라도 되었지만 똑같이 외화벌이 애국자로 칭찬을 듣던 어떤 이들은 철저히 후대 역사에서 지워진다. 바로 '양공주'라 불리던 기지촌 여성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근 반세기 동안 수만 단위를 유지했던 이들의 존재는 기이할 만큼 외면되어 왔다. <거미의 땅>은 그런 회피와 망각에 맞서 저항하고자 하는 '기억투쟁'의 목적으로 기획하고 그런 의도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에는 3명의 주인공 격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비엄마' 박묘연은 30년간 기지촌 마을에서 분식집을 운영해왔다. 그녀는 왜 자신이 '바비엄마'인지 사연을 토로한다. 그 사연 속에 숨겨진 과거에 무심코 듣던 순간 숨이 턱 막힌다. 강인순은 기지촌 여성들이 그 땅을 탈출하기 위해 종종 택하던 경로를 시도했었다. 미군과 결혼해 기회의 땅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두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의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던 끝에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빈털터리로 기지촌으로 되돌아와 폐지를 주우며 살고 있다. 안성자는 흑인 혼혈이다. 어느 날 어린 그녀를 어머니는 고아원에 버리고 갔다. 3학년이 되면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아이는 그게 거짓임을 깨닫는 과정에서 '어른'이 된다.
 
노쇠한 지금 각자의 삶에는 조금씩 다른 결이 그어져 있지만, 세 사람 모두 기지촌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기지촌에 산적한 유흥업소에서 각자 접대부로 살았고, '뺏벌'이라 불리는 기지촌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채 노년을 보내는 중이다.
 
셋이 들려주는 각자의 이야기는 지독히 개인적인 동시에 하나로 합해지는 순간 거대한 지형도로 통합되는 보편적인 내용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그 동네에서 특별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저 예시이자 표본일 뿐이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수십만 명이 그곳에서 원하지 않았거나 강요된 상태 속에서 좌절하며 무한루프의 시간을 보냈지만 누구도 이제는 그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빨리 사라져야 할 대상일 뿐이다. 세계 10위 국민소득 3만 불 선진국의 이름에 누가 되는 '비곗덩어리'들인 것이다.
 
하지만 비록 '볼드모트' 마냥 누구도 언급조차 꺼리지만 그들은 분명히 현대 한국사회에 실재했었다. 지금도 그녀들의 공간은 과거 빈곤하던 시절 우리 모습을 닮은꼴로 곳곳에서 흘러온 이방인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규모가 줄어들거나 자국민이 종사하는 경우가 적어져서 그렇지 '기지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 집단이 한국현대사에서 갖는 위치는 실로 복잡하다. 그만큼 그들의 위상 또한 다양한 결로 이해하고 해석될 수 있다. 무능한 남성 가부장 대신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하던 존재, 인신매매 등 폭력에 의해 유린당한 여성잔혹사의 시각, 민족주의 관점에서 외세 점령군에 의해 (자국남성에게 분배될 몫을) 빼앗긴 딸 프레임, 국제정세 상으론 동북아 냉전구도 하 군사주의의 용인 가능한 희생양으로 치부되어 왔던 존재들이다. 공통적으론 고대 부족국가에서 집단의 안녕을 위한 희생제물의 현대판 격이다.
 
<거미의 땅> 작품 속에는 그들의 한평생을 가로지르는 한과 원념이 영화 속 그들이 일체화된 공간 전체에 유령처럼 떠돈다. 감독들은 그들이 마치 그 공간의 '지박령'인 양 공간과 인물들을 동기화해낸다. 비록 그들을 이용하고 버린 한국사회는 그 공간을 이제 아파트로 뒤덮어 흔적조차 말살하고자 하지만 말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사과도 없는 후안무치로 일관중이다. 하지만 적어도 <거미의 땅> 영화 안에선 지우려 해도 지워질 수 없는 거대한 원념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그 진실에 접속하기 두려운 감정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화면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스즈키 코지의 링 바이러스가 전이되는 기분이 들 지경일 수도 있다. <거미의 땅>은 기억되지 못한 이들과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들을 소환하는 제례이자 아래로부터의 역사서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 기록된 그들의 일상사는 신화화되어 후속 작품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로 이어진다. 이제 기지촌의 신화, 우주적 혼돈과 공포를 마중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3_기지촌 '암흑신화'의 탄생: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시네마달

 
김동령, 박경태 공동감독은 전작 <거미들의 땅>을 선보인 뒤 후속작품을 준비한다. 영화의 소재로는 전작에 출연했던 세 주인공 중 박인순의 이야기가 채택되었고 여기에 다큐멘터리와 판타지 픽션을 혼합한 실험적 스타일이 가미된 작품으로 7년이 걸려 완성하게 된다.
 
<거미의 땅>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박인순이 다시 등장한다. 전작에서 기구한 인생편력이 소개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걸까? 영화는 '뺏벌'이라는 기이한 공간에 대해 그 유래와 기원에 대해 풀어내기 시작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진위를 알기 힘들지만 꽤 공들인 듯 설명이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한다. 임진왜란 때 침략자에 맞서 싸우다 쓰러진 의병들의 한이 서린 땅은 수백 년 후 또 다른 원념이 서리기 시작한다.
 
전반부에는 박인순을 취재하려는 교수와 예술가가 등장한다. 실제로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유린 관련 국가책임 소송 과정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위한 인터뷰 자리다. 가상의 픽션으로 삽입된 부분이지만 관객은 눈썰미가 좋아 배우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면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선에 머물게 된다. 박인순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려 하지만 그는 기구한 인생 역정을 줄줄이 풀어내면서도 인터뷰어들이 원하는 내용은 거의 들려주지 않는다.
 
박인순의 거처에는 그가 생업으로 주워오는 폐품을 캔버스 삼아 그린 그림들이 가득하다. 기괴한 느낌의 그 그림들에 담긴 의미를 묻지만 결국 제대로 된 설명도 이해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들은 인터뷰를 했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 박인순의 서명을 요청하지만 그는 서명을 갖고 있지 않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숫제 글도 배우지 못한 박인순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그림으로만 자신이 살아온 지난한 삶과 그 결과로 황폐해진 자신을 공개할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배운 사람들인 인터뷰어들은 박인순의 이야기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다.
 
인터뷰를 마친 예술가는 동네를 다니면서 취재를 이어간다.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유흥업소 골목에 잠입한 그는 뭔가 건질만한 게 없을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저것 메모하고 사진에 담는다. 그런데 문득 그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홀연히 등장한다. 그도 관객도 갑자기 등장한 존재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이 상황을 시작으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본격적으로 암흑 판타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기지촌 위안부 혹은 양공주라 불리던 이들은 죽어서도 뺏벌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개 동네 인근 산자락 무연고 묘지에 묻히곤 한다. 그래서 그들의 혼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수도권 변두리에까지 불어 닥친 욕망의 재개발과 함께 고단하고 기구한 삶을 살았던 그녀들은 이름 없는 묘마저 파헤쳐지게 된다. 누가 나서서 이장하거나 수습할 리 만무하니 사방으로 흩어진 뼛조각과 함께 퍼져나간 그들의 한과 서슬 퍼런 기운은 원념으로 떠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살을 갖추고 옷을 입으면서 소재는 좀 세지만 익숙한 구조의 다큐멘터리가 종잡을 수 없는 판타지 신화로 변신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시네마달


저승사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마땅히 저승에 도착해야 하지만 숨어있거나 저승의 행정체계가 놓쳐버린 혼령들을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저승사자들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이름도 없고 기록도 없는 존재들인 기지촌 여성들은 이미 살아생전부터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외부인은 관심도 이해도 힘든 그들만의 소우주, 뺏벌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승사자들의 고충 토로와 죽음도 비켜갈 정도의 잔혹한 운명을 살아가는 박인순, 그리고 그의 옛 동료 꽃분이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중후반을 이어간다.
 
박인순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리가 튼튼한 바람에 타인들은 안식을 취하는 시간에 쉬지 못한다. 그는 낮과 밤의 어슴푸레한 경계에서 끊임없이 뺏벌을 방랑하는 중에 저승사자들을 만난다. 이제 박인순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 저승사자들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을 수거하는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그 기괴한 여정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명부로의 여행 구조를 똑 닮았다. 그저 동네 뒷산을 몇 명이 오르내리는 장면들이 탄탄하게 의미가 부여된 장면들과 최소한의 소품과 배경으로 인해 환상적 시공간으로 변신한다. 여러 신화에 등장한 상징적 이미지들이 관객에게 영화의 몇몇 국면들을 암시하는 장치로 효과적으로 차용된다.
 
과연 박인순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꽃분이는 죽어서라도 뺏벌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걸까? 저승사자들은 임무를 딸성할 수 있을까? 궁금한 이들은 영화를 직접 보면 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전하는 기이한 신화적 순간들은 대신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온전히 전달되기 불가능한 성격의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놀라울 정도로 고대 신화나 전설의 원형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과 그 시도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왔던 기지촌 문제를 다룬 영상작업의 영역을 경이적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전하고플 뿐이다.
 
박인순이란 개인은 이미 전작에서부터 기지촌 여성의 한 초상으로 그저 기구한 개별의 삶으로 국한되지 않는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었지만, 체계적 연기수업은커녕 정규교육에서도 배제된 삶을 살아온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경이 그 자체다. 고대 비극의 주인공 혹은 설화를 전하는 무녀의 형상을 귀기 어리게 재현하는 그가 등장할 때마다 초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인간 박인순은 완벽하게 영화 속 뺏벌이라는 상징적 공간과 동기화되어 있다.
 
다큐멘터리로 꾸준히 관련 사안을 작업해왔던 두 감독은 박인순이자 뺏벌인 기지촌의 역사, 그 비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했을 테다. 쉽게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형식적 실험, 그리고 처음에는 낯설지만 곱씹어가며 집중하면 아주 익숙한 신화적 상징 장치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잊힌 그녀들을 기리는 거대한 가상신화를 본 작품에서 완성해버렸다. 기지촌의 원념들이 주인이 된 신화, 한국현대사에서 지워진 암흑우주의 풍경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4_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원죄, 개방되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주)시네마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한국 독립영화가 다뤄온 특정한 소재 관련 수십 년간 쌓여온 실험과 도전이 한 종말점에 도달한 것 같은 결과물이다. 두 감독이 기지촌 문제에 대해 20년이란 시간 동안 집중해온 노력이 집대성된 성취이자 우리의 고정관념을 직격하는 문제작이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제시할 만하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2편(+개별 작업) 영화는 우리가 과거의 치부로, 혹은 각자의 고정관념에 따라 남의 일처럼 재단해온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당사자들과의 (영화 마치고 끝나는 게 아닌) 삶의 접속과 관계 유지를 통해 최대한 그들 자신의 목소리가 전해지도록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해놓는 격이다. 그런 성격이 정점에 도달한 게 <거미의 땅>이라면,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을까 오랜 고민의 결과물이자 새로운 단계 진입의 첫 등정 성공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인 셈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갖는 위상은 이 영화가 비록 극장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결코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당사자들이 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시혜적 혹은 자기목적성에 기반을 두고 접근해온 해당사안에 대한 경향에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은 물론, 당사자들의 글로 표현되기 힘든 지난한 삶을 하나의 역사로 재구성하는 구술사/민중사의 새로운 방식을 온전히 시도한 성과다.
 
거기에 더해 한국의 사회현실을 담는 판타지 표현방법론에서도 후대에 참고해야 할 묵직한 족적을 실현해낸 시도다. 그저 장르 표현방식으로만 이해되곤 하는 판타지를 이 정도로 책임감 있게 다루고 일정한 수준에 도달시킨 개별 시도는 국내에선 지극히 희귀한 존재다. 특수효과 물량에 의지할 게 아니라 창의성에 주목한다면 소재를 넘어 본 작품은 반드시 참조할 만하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흥미로웠다면 전작 <거미의 땅>으로 복습을 권한다. 가능하면 2편을 모두 접하기를 청한다. 정서적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지만, 보기 드문 '영화적 체험'의 시간이 될 것만은 기꺼이 보증할 수 있다.
 
<작품정보>
거미의 땅 Tour of Duty
2012|한국|드라마/다큐멘터리
2016. 1. 14. 개봉|150분|15세 관람가
감독 김동령, 박경태
주연 박인순, 안성자, 박묘연
제작 및 배급 (주)시네마달
 
2013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 단편/다큐멘터리 부문
2013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심사위원특별상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The Pregnant Tree and the Goblin
2019|한국|판타지/다큐멘터리
2022.01.27. 개봉|115분|15세 관람가
감독 김동령, 박경태
주연 박인순
출연 조은경, 신윤숙, 변중희, 김아해, 김미숙, 신승태, 이승아, 그렉 프리스터, 김명선
제작/배급 (주)시네마달
 
2019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 특별상
2020 이미지포럼 데라야마 슈지상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거미의 땅 김동령 박경태 감독 박인순 기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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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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