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분단현실이 망각되는 시대에
 
"그림자꽃"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그림자꽃"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남북한 분단이 고착화된 한국전쟁 종전 이후 근 70년이 지난 현재, 어느새 우리는 분단현실과 전쟁 위협을 잊은 채 살아가는 중이다. 물론 온전히 잊고 살지는 않는다. 군복무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고(그 와중에 무수한 병영부조리에 시달리고) 사실상 섬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고충은 물론, 군사적 긴장이 심심하면 터질 때마다 '북한 리스크'의 존재감을 새삼 느끼긴 한다. 하지만 그저 늘 있어왔던 잠깐의 일일 뿐, 장기간 지속된 현재 상황은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한 정도로 적응되었고, 과거 세대와는 달리 '북진통일'이건 '평화통일'이건 점점 그 당위성이 희석되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분단현실은 엄연한 실재다. 허용 가능치의 부담과 귀찮음을 넘어 현대 한국사회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여전히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일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상수요소의 비중은 줄어들 줄 모른다. 2020년 기준으로 3만3천 명을 넘어선 탈북자 문제는 이제 한국사회 내에서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난민 문제와 함께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문화사회로의 길을 열어젖히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국방비를 포함한 안보비용은 복지확대에 결정적 장애물로 버티고 서 있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포함 수많은 인권 침해요소가 분단 상황에서 기원한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체감하는 강도가 낮아졌을 뿐 여전히 당사자로서 이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례는 넘쳐나며 21세기 들어 새로운 형태의 쟁점이 속출하는 중이다.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그림자꽃>의 주인공 김련희씨의 저서 제목이다. 문장구조로는 지극히 평범한 이 한 줄의 구어체 제목은,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 현실에선 초현실적 텍스트로 변신한다. '대구에 사는' 김련희씨는 자신을 '평양시민'이라 칭한다. 탈북자이거나 재중동포라면 이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좀 낯선 이방인이지만 '평양시민'이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달팽이의 별>, <달에 부는 바람> 등 일련의 높은 평가를 받아온 작업에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부재의 기억>을 선보여온 이승준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꽃>은 바로 이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다.
 
2_광산 속 카나리아의 경보: 김련희씨 사례
 
"그림자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림자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김련희씨는 70년 넘게 지속중인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해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정면도전하는 쐐기와 같은 존재다. 지금껏 사실로 존재는 했지만 수면위로 떠오른 적 없었던 쟁점이자, 우리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징후'인 셈이다. 과거에 구식 잠수함에서 선내 유독가스 함량이 위험수위에 닿기 전 이를 경보하는 기능으로 공기에 민감한 토끼를 키우던 것을 인용한 '잠수함토끼'나, 폭발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광부들이 카나리아 새의 호흡을 확인하던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하겠다.
 
영화의 기본내용은 이렇다. 2011년 어느 날 '김련희'라는 이름의 북한이탈주민이 한국에 입국한다. 하나원에서 국정원의 조사를 받고 귀순의사가 있는 것으로 규정해 김련희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흔한 존재가 된 전형적인 탈북민이다. 이제 사회에 적응해 동화과정을 거치면 된다. 하지만 김련희씨는 뭔가 유별난 행동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김련희씨는 하나원에서부터 자신은 귀순의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렇다. 자신은 평양에서 의사 남편과 딸과 함께 만족하며 살았고 부모님도 다 거기에 계시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깐 중국으로 밀입국했었으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이런 일은 흔한 경우였고 치료를 마치면 다시 귀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의료의 질과 기회는 차치하고) 무상의료 제도가 확립된 북한에 익숙하던 김련희씨에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도입된 중국의 병원은 예상치 못한 의료비를 요구한다. 그녀는 탈북자를 연결하는 브로커를 통해 중국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남한에 몇 달만 다녀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중국 다녀가듯 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남한 행은 전혀 다른 그림이었고,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강제로 남한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
 
아마 김련희씨가 좀 더 치밀하거나 사전 계획이 주도면밀했다면 국정원에 대놓고 송환을 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을 테다. 영화 속에서도 설명되는 것처럼 근래 간혹 보도되는 방식, 중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전후 과정을 알 리 없던 그녀는 자신의 본의를 밝히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요주의 인물로 구분되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다. 남한이 그녀에겐 거대한 강제수용소가 되어버린 꼴이다.
 
영화는 줄곧 필사적으로 북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자 주인공 김련희씨가 벌이는 갖가지 행위와 그로 인한 파장을 조명한다. 출국금지가 지속되자 김련희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만가지 일을 벌인다. 여권을 위조하거나 밀항을 시도하려 하지만 브로커가 부르는 단가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해외로 나갈 방도가 없다. 급기야 베트남 대사관에 밀고 들어가 망명신청을 내기도 한다. 이마저 실패하자 간첩으로 행세하고 자수하면 강제송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국가보안법을 일부러 어긴다. 하지만 그럴수록 통제와 감시는 그녀를 더욱 옥죄어 오기만 할 뿐이다. 결국 자해시도까지 저질러보지만 지금 상황에선 죽어도 시신으로나마 평양에 돌아갈 수 없다는 하나원 동기들의 말에 그저 멍해질 뿐이다.
 
3_세심한 접근태도가 이뤄낸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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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이 기구한 '평양시민'의 (그 어떤 픽션도 가뿐히 초월하는) 상황을 4년간 꾸준하게 기록한다. 주인공의 시간을 작품으로 담기 위한 1차 관문은 감독과 카메라에 대한 의심 제거였을 것이다. 실제로 김련희씨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연을 영상화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기도 했지만 사람을 쉽게 믿기 힘든 당사자의 상황에서 몇 차례의 접촉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승준 감독은 김련희씨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지지인사를 통해 연락을 넣었고 마침내 '콜 싸인'을 받기에 이른다. 이제 기나긴 감독과 김련희씨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런 유형의 기구한 사연을 담은 인물 다큐멘터리에선 얼마나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가가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이게 실패하면 일단 작업은 진행 자체가 어렵고, 다 만든 작품이라도 관계가 어그러지면 창고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다. 영화 속에서도 종종 등장하지만 주인공과 감독 간의 관계성은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목격되는 형태와는 조금 다른 태도로 드러난다. '같은 편'이라는 동질감으로 이인삼각처럼 합을 맞추는 타입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감독과 제작진은 김련희씨와 온전히 한편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급할 때 의지가 되어주는 이해자의 포지션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이런 태도는 사회적으로 극명하게 평가가 나뉘는 주인공 김련희씨를 향한 우리 내부의 시선과 관련해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단 일단 입장은 접고 그녀가 처한 상황을 당사자 입장에서 이해해 보자는 연착륙 효과를 자연스레 유도하고 있다.
 
이런 감독의 입장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레전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김동원 감독의 <송환>(2003)에서 감독이 비 전향 장기수들과의 대화 장면들에서 곧잘 취하던 입장의 차이와 겹쳐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상징적으로 이승준 감독이 <그림자꽃> 영화 초반에 박아둔 장면이 있다. 대구의 김련희씨 지지자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목격되는 언쟁 묘사는 이 작품에 대해 편견을 갖고 별점테러 기회만 노릴 이들에게 일찌감치 날리는 견제구인 셈이다.
 
기구한 주인공의 체험담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림자꽃>은 김련희씨가 처한 절박함을 관객에게 극대화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불확정성 요소가 넘쳐나는 도전을 감행한다. 이승준 감독의 지인인 핀란드 감독을 투입해 북한에 있는 주인공의 가족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련희씨가 가족을 그리며 눈물짓는 순간에서 점프 컷으로 평양의 남편과 딸이 아내와 엄마를 이야기하는 가족의 수난은 극점에 달한다. 관객은 아마도 설마 하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평양 전경이 실제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꽤나 충격에 휩싸일 테다.
 
가장 가까운 땅, 북한을 대한민국 국민은 정부의 특별한 허가나 승인이 없이는, 그리고 북한 당국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는 사실상 공식적으로 촬영하거나 주민과 접촉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것을 실행하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남한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다(실제로 북한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독일 국적을 취득한 감독도 있을 정도다). 재미동포나 재일동포는 제한적으로 가능한 일이 대한민국 국적으론 졸지에 세계 어딜 가도 가장 가까운 곳은 못가는 결과로 치닫는 역설. <그림자꽃>은 국제적 교류와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감독과 제작진의 역량을 총동원해 그 장벽을 뛰어넘는 '아주 특별한' 스펙터클을 선보이는데 성공한다.
 
김련희씨의 수난사와 대구를 이루는 평양의 남편과 딸의 일상은 김련희씨가 왜 그토록 포기하지 않고 평양시민으로 인정받으려 하는지를 감성적으로 뒷받침한다. 저렇게 멀쩡히 가족이 평양에 있는데, 아내이자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일상을 유지하는 평온한 남은 가족의 풍경은 얼마나 가족이 그리울 지 저절로 상상하게 하는 위력이 있다. 김련희씨가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장성해가는 딸의 풍경은 나날이 절박해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말이 아닌 느낌으로 전달해준다.
 
4_개인의 불행을 넘어 체제모순을 증명하는 확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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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중반 이후 김련희씨 주변에 또 다른 강력한 예시들을 투입한다. 분단현실을 표상하는 다른 작품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이들이 원군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예를 들자면, 김상규 감독의 <앨리스 죽이기>의 주인공 신은미씨나 김동원 감독의 <송환> 등에 등장하던 장기수 출신 노인들의 출연 장면이다. 이들의 분량은 각각의 역할과 의미를 소화해낸다.

<앨리스 죽이기> 영화 속에 상세히 소개되는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이제 당분간 입국하기 힘들어져버린 남한 출신 재미동포 신은미씨는 북한을 방문해 김련희씨에게 몇 년 만의 가족 (온라인으로 찰나의 짧은 순간 동안) 대면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을 통해 김련희씨의 문제는 개인의 상황이 아닌 상시적인 쟁점으로 정체성을 갖춘다.
 
페이스북 라이브로 진행된 너무 짧은 찰나의 가족상봉 순간, 눈물바다가 화면에 펼쳐지면서 차곡차곡 영화 내내 집적되던 개인의 불행이 한반도 분단체제의 모순으로 확장된다. 현 정부의 정상회담 추진 등 기대를 갖게 하던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기대감에 부풀기도 하던 김련희씨와 장기수 노인들의 복잡한 표정은 그저 재수 참 없는 개인의 비극성을 넘어 본 작품의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확장시키는 통로가 된다.

반세기 넘게 거듭 이어져온 남북한 체제경쟁은 헌법 조문의 충돌처럼 모호한 이중성 사이에서 표류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북한은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기능하고 있음에도 헌법상으론 수복해야 할 대한민국 영토다. 그런 상황에서 북에서 남으로 '자유'를 찾아 넘어온 이들을 도로 북한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은 현 체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물론 귀순의사를 거부하는 표류 어선 등의 경우 현재도 바로 송환시키는 중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의 체제 정당성과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김련희 개인의 소망을 결코 들어줄 수 없다. 개인이 아니라 체제를 우위에 두기 시작하면 이는 정당한 결론이 되어버린다. 또한 남한의 사정은 그녀가 이 땅에 (강제로) 머무는 몇 년간 롤러코스터를 타듯 널뛰는 중이다. 지독한 희망고문의 연속 덕분에 지쳐가는 김련희 씨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결실을 맺기보단 보여주기 식에 그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운 평가와 성찰의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결국 문제의 근본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5_국가와 체제의 존재이유를 묻는 영화의 문제의식
 
하지만 굳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 상봉이 그렇게나 정치적 긴장과 연관된 일일까? 일상적 상봉과 교류가 그렇게 대단한 위협이 된다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적 협상카드로 수십 년째 장기 말처럼 구사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가슴 졸이며 마지막 희망을 거는 이들에겐 이런 가학행위가 또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대단한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없는 몇몇 개인을 북으로 송환하는 일이 국가안보에 절대적 문제가 되는지 따져볼 일이다. '정보'의 가치와 활용 측면에서 실용적 고려가 아닌 체제 대결 속 명분 싸움이 가져오는 것들은 너무나 소모적이다.
 
이제 관람을 마치려는 관객들에게, 영화 초반에 마치 돈키호테처럼 좌충우돌하던 김련희씨의 이해 안 되던 캐릭터는 어느 순간부터는 애처롭고 안쓰러운 디아스포라의 상징으로 변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특정 구간에 도착하면 대체 국가와 체제가 왜 그 구성원들 위에 군림하며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소박한 행복추구 기본인권을 포기하게 강박하는지 거대한 물음에 이른다. <그림자꽃>은 그렇게 개인의 기구한 사연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거대한 사회적 비극을 소리 없이 고발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작품정보>
 
그림자꽃 Shadow Flowers
2019|한국|다큐멘터리
2021.10.27. 개봉|108분|12세 관람가
감독 이승준
PD 감병석
주연 김련희
제작 블루버드픽처스
배급 (주)엣나인필름
 
2019년 제11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최우수 한국 다큐멘터리 상-한국경쟁, 개봉지원상
2021년 제12회 타이완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아시안 비젼 경쟁 부문 대상
그림자꽃 김련희 이승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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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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