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때 한국 사회에서 '노마디즘'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소련과 동독이 붕괴되며 세계를 양분하던 현실 사회주의가 그 존재의 유효성에 있어 의문을 제기하자, 철학적 화두로 노마디즘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이진경에 의해 번역된 <천개의 고원>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이 개념은 일찍이 1968년 들뢰즈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마드(nomad)는 우리 말로 번역하면 유목민을 뜻한다. 그리스어 'nomos'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체의 방식으로 정의됐다.

철학적 대안 모색에서 시작된 노마디즘은 현대 사회의 문화 심리적 현상을 해석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디지털 노마드 족과 같이 특정한 삶의 가치와 방식에 자신을 옭아매지 않고 탈주하여 여행을 떠나는 사유의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지난 4월 15일 개봉한 <노매드랜드>는 그러한 노마디즘적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길을 떠나다
 
 노매드 랜드

노매드 랜드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펀(프랜시스 맥도맨드 분)는 석고 광산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네바다 엠파이어에 정착했다. 남편이 일하던 석고 광산 인사과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지역 학교에서 보조 교사로도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는 삶의 터전이었던 석고 광산을 폐업시켰다. 석고 광산에 깃들어 살던 지역은 급격하게 무너져갔다. 사람들은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펀 부부는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암과 투병하는 남편 곁을 지켰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도, 가정도 사라져버리게 된 펀, 그녀는 작은 밴에 자신을 의탁한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남편에 대한 미련도, 오랫동안 펀의 부부가 살아오던 네바다 엠파이어에 대한 애착도 놓을 수 없었던 펀은 자신이 살던 주변을 맴돈다. 삶은 그녀에게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살던 주변을 떠돌던 그녀가 세계적 유통기업 아마존에서 일 자리를 구한다. 연말을 맞이해 늘어난 택배 물량에 맞춰 긴급하게 수급된 포장 알바다. 그녀의 손을 거쳐 세계를 향해 떠나는 물건들, 하지만 그건 그저 그녀에겐 일용할 양식의 수단일 뿐이다. 그곳에서 펀은 그녀처럼 또 다른 노마드족을 만난다. 자신처럼 차 한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펀에게 그녀는 기꺼이 노마드 공동체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펀은 자신과 같은, 하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길에 나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사놓은 카누를 타보지도 못한 채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배우자 때문에 길을 나섰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살한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길을 나섰다고 한다. 상처와 상실, 혹은 구조적 위기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사람들은 길위로 내몰리게 됐다. 

하지만 펀을 맞이한 공동체는 그곳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려준다. 본의 아니게, 그리고 머뭇거리며 노마드의 삶에 한 발씩 내딛어 가는 펀. 그런 그녀에게 기존의 세상도 여전히 손을 내민다. 

차 수리비 2000달러를 빌리기 위해 만난 언니는 여전한 혈육의 정으로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머무를 것을 청한다. 하지만 경제 위기 속에서 삶을 송두리 채 빼앗긴 그녀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집 투기를 통해 소득의 상승을 자랑하는 언니 주변의 사람들과 그녀는 화합할 수 없다.

또 다르게 손을 내미는 이도 있다. 머물던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 유독 펀에게 호의를 보이던 또 다른 노마드 족이었던 남자는 아들 내외와 함께 정착한 집으로 펀을 초대하고 자신과 함께 살아갈 것을 청한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말끔하고 푹신한 침대 대신 자신의 차로 돌아와서야 숙면을 취하는 펀에게 이미 길은 집이 되어 있었다. 정착하는 대신 펀은 길을 떠난다. 남편과 함께 살던 네바다 주변을 머무르던 펀은 이제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나선다. 

떠남, 또 다른 삶의 방식 
 
 노매드랜드

노매드랜드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떠남은 그녀 자신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그녀 스스로 설 수 있게 했다. 영화 속 펀은 죽어가는 남편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과 평생을 살아왔던 삶의 터전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상실감을 노마드의 시간을 통해 회복했다. 

영화는 길 위로 나선 펀을 통해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삶의 형태로서의 노마디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세상에 버림받은 개인이 아니라, 연대의 공동체로서의 노마디즘을 말한다.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자크 아탈리는 '정주성'을 유구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겨우 1만년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외려 인간종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이어져 온 유목의 특성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인간은 삶의 위기를 맞이하면 늘 떠났다는 것이다. 떠남을 통해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자크 아탈리의 정의를 영화  <노매드랜드>가 다시 증명한 것이다.

경제적 실존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세상이 당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하여 골든 그로브 작품상, 전미 비평가 협회 상의 수상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https://brunch.co.kr/@5252-jh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노매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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