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남자 봉환의 영혼이 조선 말 중전 소용(신혜선)의 몸에 날벼락처럼 내리치며 벌어지는 '비자발 트랜스 젠더(섹스)의 생존기' <철인왕후>가 시청률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신혜선의 발군의 연기에 조연들의 맛깔나는 활약이 재미를 더하며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견인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영혼 성별이 트랜스되자 근엄해야 할 중전 소용이 그 지위를 탈각하고 벌이는 천방지축 퍼포먼스가 압권이라 하겠다.
 
'반여 반남' 소용이 궁에서 살아남기
 
현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렵게 호수에 물을 채운 후 입수한 봉환(소용)은 허망하게도 현재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후 어떻게든 소용의 몸으로 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봉환은 무엇이 소용을 자살로 이끌었는가를 캐내기 시작한다. 그 이유가 생존의 열쇠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불현듯 소용의 기억이 회복되며 봉환은 자신의 영혼과 소용의 기억이 뒤섞이며 일대 혼란을 겪는다.
 
봉환의 영혼에 어느새 "내 거 아닌 데 내 거 같은 기억"이 자리하고, 생각마저 소용의 목소리로 실행되기에 이른다. 몸도 확연한 적응기를 거쳐 거추장스럽기만 하던 치마가 편해지던 어느 날, 배가 뒤틀리는 통증에 이 고통이 생리통이라는 자각에 '멘붕'을 겪는다. 남자 봉환이 트랜스된 여성의 몸으로 조선 시대 '달거리'라 불리던 생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연출이 아쉽다. '내가 생리를?' 하는 소용의 황당한 표정만을 남기고 생리 체험이 이벤트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트랜스된 남자의 생리 경험을 통해 여자의 다른 몸이 주는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기를 바랐던 건 지나친 기대였을까? 생리를 경험해본 남자라면, 생리하는 여자의 불편함과 고통을 희화화해, "마법에 걸렸다"든지, "그날이라 예민하다"든지, "생리휴가 받아 좋겠다"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얼마나 몰이해에 바탕 한 것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다른 몸으로 처해지는 물리적·사회적 위치성이야말로 극명한 역지사지가 아니겠는가.
 
봉환(남자)의 영혼이 트랜스된 여자의 몸으로 좌충우돌 벌이는 일대 소동은 폭죽 같은 웃음을 터뜨리지만, 상황을 톺아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남자스럽다 못해 껄렁껄렁한 말투로 존엄해야 할 중전이 나인도 하지 않을 막말과 기행을 일삼는데, 이것이 조선의 중전의 행태로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카사노바 습성을 버리지 못한 봉환(소영)이 왕의 후궁들에게 연서로 추파를 날리데 이르러선, 웃자고 들면 그냥 웃어버리고 말 일이지만, 추파를 던지는 봉환의 성 정체성이 뭐냐고 캐묻기에 이르면, 결코 웃어 버릴 가벼운 일이 아닌 게 된다.
 
왕의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담하다 못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일견, 몸이 여자인 소용의 섹슈얼리티로만 본다면,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동성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소용의 영혼이 누구냐에 이르면, 동성애 코드가 될 수 없다. 영혼이 봉환(남자)인 한, 소용의 추파는 여성으로 트랜스된 남자가 다시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질문은 매우 복잡해지는데, 그렇다면 소용의 여성을 향한 섹슈얼리티는 동성애적인가, 아니면 트랜스여성의 또 다른 섹슈얼리티로 봐야 하는가에 이른다. 그런데 이 질문은 봉환의 영혼인 소용이 점차 남자인 철종(김정현)에게 끌리기 시작하면서 무력해진다. 이는 마치 트랜스 여성이 그토록 바라던 여자의 몸으로 비로소 남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로맨스의 외피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호오, 그렇다면 봉환의 영혼을 가진 소영의 성 정체성은 대체 무엇이고, 그의 섹슈얼리티는 어디에 이르는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모두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소용의 애정행각이 의도치 않게 '젠더 프리'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용에게 자신의 몸이 여자(남자)이고 아니고는 점차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데, 여자(후궁이나 홍연)에게 연심이 생기다 이내, 남자인 왕에게도 몸과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니 말이다.

담대한 퀴어가 궁의 지옥문을 여는 방식

남편인 철종이 자신을 해하려 했다는 사실에 이를 갈던 소용은 잃었던 기억이 회복되고 궁의 패권 지형을 파악하면서, 그를 연민하기에 이른다. 실상 소용의 연민은 연원이 깊고 인어공주의 서사와 닮아있다. 철종을 어릴 적 우물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 화진(설인아)이 아니라 소용이라는 진실이 밝혀지면서, 소용은 목소리를 잃지 않고도 그토록 원했던 왕의 애정을 수복한다. 철종의 새록새록 커지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해 소용은 담대한 그림을 그리려 한다. 그를 도와 다른 조선을 만든다면, 역사의 새로운 물꼬를 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발아되고 있는 것이다.
 
철종과의 심리적 관계가 돈독해지자, 소용은 그와 불화하던 몸의 관계도 편안해진다. 타임슬립한 중전이 남발하는 미래의 언어에 철종은 당황스럽지만, 돌변한 소용의 모습은 뜻밖의 매력을 준다. 이런 철종의 끌림을 들여다보면, 그의 섹슈얼리티도 색다르다. 중전의 방약무인한 매력에 빠진 철종은 도무지 조선 여인의 것이라 간주할 수 없는 생경한 언어에 지적 호기심을 느끼다. 막말에 준하는 소용의 언어를 서책에 옮겨 익히며 소용을 이해하려 든다.

철종의 이런 면모에 소용은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마침내 "라면 먹고 갈래"라는 유혹의 욕망을 드러낸다. "봉환의 소울과 소영의 기억"이 함께 하는 몸은 바야흐로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다, 왕과 보낸 밤이 "좋았다"고 스스로에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런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스스로도 당황스럽지만 터진 봇물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영혼인 봉환이 여자의 몸으로 가진 남자 철종과의 관계를 "좋았다"고 고백하는 이 드라마, 알고 보면 굉장한 '퀴어물'이 아니겠는가?
 
소용이 궁의 지옥문을 열리라 작정하고 철종에게 "동맹 맺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중의적이다. 성적 관계로서도 동맹이요, 정치적으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부패한 붕당정치로 썩을 대로 썩은 조선의 정치판을 갈아엎어보자는 변혁의 정신으로 소용은, 담대하게 '입헌군주제'를 철종에게 이해시키고, 앞선 시대의 사람으로서 선구적 병무를 전수시킨다. "질게 뻔한 이 남자(철종)에게 모든 걸 걸고 싶어"진 소용은 영영 돌아가지 못할 현재를 포기하고 조선의 궁에 뼈를 묻을 작정을 한 것일까? 문득 철종과 의기투합한 소용의 내면이 궁금해진다.

이는 지아비를 섬기는 중전 소용의 기억이 뻗어낸 발로일까, 아니면 남자 영혼 봉환이 남성 동맹으로 연합한 것일까? 바뀐 몸과 더불어 소용의 복잡다단한 심리 또한 매일이 성과 젠더의 각축으로 파란만장하다. 남자인 봉환이 갈등하는 지점과 여자인 소용이 고민하는 몸과 마음의 경합은 몸과 마음이 별개로 이분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실상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판이다. 협객처럼 장도를 둘러매고 권력자 김좌근(김태우)에게 과감한 도전장을 던지는 모습은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말이 중전이지, "여인이 무슨 힘이 있겠냐"고 권력의 꼭두각시로 세우고, 소용에게 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대놓고 조종하려 드는 잔혹한 권력자 김좌근에게, 어떤 조선의 의인이 이토록 센 도전장을 대담히 던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김문과의 일전에서 승리하지 않고는 궁에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소용은 전략을 세우느라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이런 소용에게 생리는 명함도 못 내밀 경천동지할 '멘붕'이 도래하니, 드디어 임신을 한 것이다. 오호, 남자 영혼 봉환은 여자로서도 일대 역사인 이 임신을 과연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인가?

드라마는 중전 소용의 '회임'을 궁의 권력 판도를 바꾸는 전략적 카드로만 활용하는 뻔한 서사를 뒤로 물리고, 남자 영혼 봉환이 임신을 통해 여자 몸의 위치성을 깨닫고 '입장의 동일함'으로 나아가는 성숙한 서사를 견인해 내기를 바란다. 드라마는 앞서 생리를 이벤트처럼 희화화했던 관성을 지양하고, 소용의 몸으로 겪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봉환이 어떤 변화를 일궈내는지 사려 깊게 그려내기를 당부하고 싶다. 조선 말 '퀴어물'이라면 마땅히, 이 정도의 성인지 감수성은 탑재해야 하지 않을까. 이 바람을 안고 <철인왕후> 본방을 지켜볼까 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철인왕후> 퀴어 트랜스젠더 성 정체성 신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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