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판의 미로>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돌아오다

2006년 개봉한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아래 판의 미로)>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돌아왔다. 기괴한 상상력의 거장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화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 <크림슨 피크>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아래 셰이프 오브 워터)>를 한 축에, <미믹> <크로노스> <블레이드2> <헬보이 1> <헬보이 2:골든 아미> <퍼시픽 림>을 또 다른 한 축에 놓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구분의 근거는 '이종 크리처'에 대한 내재적인 접근방식과 외재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이다. 쉽게 말해서 전자가 인간과 이종 생명체간의 소통에 기반을 둔 '심리 판타지'라면, 후자는 인간과 이종 간의 대결에 방점을 둔 '액션 판타지'이다.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중 한 장면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중 한 장면 ⓒ 프라임엔터테인먼트


2018년에 개봉한 심리 판타지 <셰이프 오브 워터>는 감독의 전작 중 특히 <판의 미로>와 영화적 구조와 형식면에서 여러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3인칭 내레이션이 가미된 수미상관의 내러티브 구조, 여성 주인공 캐릭터와 괴물 생명체와의 소통, 척박한 현실을 뒤로 하고 본향으로 향한다는 설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시공간적 배경과 스토리는 다르지만 흡사 두 작품이 연작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44년 스페인, 소녀 오필리아가 '괴생명체 판'을 만나 용기, 인내, 희생의 미션을 수행하고 지하세계의 공주로 돌아간다는 소녀의 성장담은 1962년 미국, 여성 엘라이자가 '아가미 인간'을 만나 사랑을 하고 바다로 돌아가게 된다는 연애담으로 변주된다. 미션을 통과한 오필리아가 엘라이자로 성장한 것이다. '공주'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필리아가 지하세계에서 공주가 되었듯, 엘라이자도 그 선연한 목의 상처(아가미)를 뽐내며 바다의 공주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에는 늘 희생이 따른다.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가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에 집착하는 비달 대위를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엘라이자의 사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지상주의자 스트릭랜드 보안소장과의 대결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그들의 총에 맞은 오필리아와 엘라이자는 쓰러지지만, 결국 둘은 지하세계로, 바다로 돌아간다.

이처럼 두 영화는 많은 부분 닮아 있지만, 영화적 시공간적인 배경이 다르듯 이질적인 측면도 있다. 오필리아를 축으로 민중과 부정한 정권의 대결구도로 연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판의 미로>와 달리 <셰이프 오브 워터>는 엘라이자를 중심으로 캐릭터들의 개인적인 감정에 방점을 찍는다. 전자가 연대를 통한 평화의 성취라면, 후자는 소통을 통한 사랑의 완성인 것이다.

2. 미래가 여기에 있다? 델 토로에게 '1960년대'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시간은 영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미국에서 1960년대 초반은 자동차와 주택으로 대표되는 물신주의의 확산이 정점에 다다른 시기이다. 영화는 반복되는 시계 클로즈업과 "the future is here"이라는 문구, 그리고 출근 전 아침 일상의 몽타주를 통해 시간에 관한 현대인들의 강박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스트릭랜드가 읽고 있는 책이 처세술에 관한 책이라는 것도 이러한 현대적 삶에 대한 비유라고 할 것이다.

감독은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를 절묘하게 포착함과 동시에 시간에 관한 숙명론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도입부의 내레이션인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에 불과하다"라는 구절처럼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1960년대에 대한 날선 풍자라기보다는 그 시절도 우리가 겪었던 과정이라는 회고담이 설득력을 얻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속 낡은 극장, 고전 영화(마르디 그라스와 룻 이야기 등), LP 음악 등이 이제는 흘러 지나가 버린, 잡을 수 없는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게 만드는 것이다. 1960년대 생인 델 토로에게 1960년대란 자신의 근원을 묻는 시대일 것이고, 또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시대일 것이다. 미래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과거도 과거일 뿐이다.

3. 편견은 본질이 아니라 착시에 불과하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사랑하기는 어렵고 상실하기는 쉽다. 영화엔 장애와 편견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엘라이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농아에다 청소 노동자다. 그의 절친 젤다는 흑인 청소노동자이다. 엘라이자의 이웃 자일스는 실업자에다 동성애자이다. 건물주마저 '지지리 궁상' 극장주이다. 그뿐인가? '아가미 인간' 아니 '아가미 괴생명체'는 존재만으로도 편견의 대상이다.

이 결핍과 편견의 캐릭터들은 냉전의 시대, 흑백간의 갈등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과 마주하며 살아야(혹은 넘어서야) 할까? 영화는 이 캐릭터들이 서로의 결핍을 드러내고 사랑하고 연대하는 순간, '편견은 본질이 아니라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위대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찌질한' 자일스가 아가미 인간의 탈출을 돕는 장면에서, 소련 스파이 스테틀러 박사가 아가미 인간을 살리려는 모습에서, 트라우마처럼 보이는 엘라이자의 목 상처가 마지막 씬에서 아가미로 쓰이는 장면에서 편견은 신기루처럼 녹아내린다. 결국 감독은 이분법으로 두 동강 난 미국의 60년대를 소환하여 현재의 분열의 미국을 풍자하고 있다. 역사의 순환 법칙이란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사랑의 모양>의 원제와 한국어 부제는 의미심장하다. 물이 형태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물은 그것을 담는 구조물에 의해 물의 형태가 규정된다. 바로 사랑도 그렇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어떻게 담아낼까? 이것이 바로 기예르모 델 토로가 노스탤지어(향수)가 가득한 사진 앨범을 펼쳐놓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델토로 판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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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을 학생들과 나누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입니다. 영화가 중심이 되겠지만 제가 관심있는 생활 속에 많은 부분들을 오마이 독자들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여럿이 다양하게 본 것을 같이 나누면 혼자 보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고 삶의 진실에 더 접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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