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설의 주먹> 학창시절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은 중년이 된 후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 영화 <전설의 주먹> 학창시절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은 중년이 된 후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 시네마서비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될 날 있는 거다. 잘난 놈이라고 평생 잘나게 살고 못난 놈이라고 죽을 때까지 못나라는 법이 있겠니."

내가 어떤 일로 심하게 실망해 있을 때면, 우리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해주시던 말이다. 우울한 인생에도 언제든 볕 들 날이 있으리라는 위로였다. 이것 말고 다른 여러가지 말들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언제든 처지가 뒤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 자체는 우리 주변에서 위로 겸 교훈으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전설의 주먹> 또한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흔한 사례를 보여주며 시작되는 듯했다. 학창시절 주먹깨나 쓰면서 잘 나가던 패들은 이십여 년 후 별 볼일 없는 건달 노릇을 하거나, 파리 날리는 가게를 붙잡고 돈 걱정에 시달린다. 세파에 찌들고 소시민으로 전락한 그들에게서 과거의 위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던 중 한 TV 프로그램이 이들의 화려한(?) 시절을 되살려보자는 제안을 한다. 이름하여 '전설의 주먹'. 말 그대로, 고등학교 때의 '짱'들을 모아 격투를 시켜보자는 것이다. 같은 시기 싸움으로 이름을 날렸던 임덕규(황정민 분), 이상훈(유준상 분), 신재석(윤제문 분)은 모두 출연 제의를 받는다. 처음 제의를 거절했던 이들은 돈 때문에, 혹은 권력에 눌려서 모두 출전을 결심한다.

프로그램이 가진 사회적인 파급력과 상금의 액수는 만만치 않다. 시합에서 승리한 쪽은 대중의 환호와 거액의 돈을 함께 가져간다. 그들에게 다시 볕이 드는가 싶다. 얼핏 보면 양지에서 음지로, 그리고 다시 양지로 나오는 듯한 전개다. 그러나 사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한 번도 양지에 속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영화는 주인공 세 명의 학창시절과 현재를 넘나들며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양쪽의 동경과 멸시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주먹들'

영화 <전설의 주먹> 학창시절 같은 반인 재벌의 아들 송진호에게 시달리던 이상호(유준상 분)은, 자라서도 그의 최측근이 되어, 궂은 일을 도맡는다.

▲ 영화 <전설의 주먹> 학창시절 같은 반인 재벌의 아들 송진호에게 시달리던 이상호(유준상 분)은, 자라서도 그의 최측근이 되어, 궂은 일을 도맡는다. ⓒ 시네마서비스


이야기 속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세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전설의 주먹'들은 언제나 그 사이에 존재했다. 양쪽의 동경과 멸시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집단인 것이다.

흔히 주먹들을 강자라고 생각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휘둘린다. 학교의 '짱인 이상훈은 재벌의 아들인 송진호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바쁘고, 경찰과 거물 조직폭력배들은 그들의 범죄에 고등학교 주먹패를 이용한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상훈은 기업 총수가 된 송진호의 측근으로 일하며 궂은 일을 도맡고, 신재석은 사업가로 변신한, 고교시절 자신을 속였던 조직폭력배에게 여전히 이용당한다.

돈을 가진 자들에게, 주먹들은 그저 노리개일 뿐이다. 판돈을 놓고 누가 더 센가 재미삼아 내기를 걸고 그 시합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귀찮은 일의 처리가 필요할 때면 불러서 써먹는 유용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면 힘 없는 이들에게 학창시절의 '주먹'들은 전설이자 악몽 같은 존재다. 영화 속에서 힘 없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월급쟁이 아저씨'들은, 이리저리 치이고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에 지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 삶에서, 철모르던 학창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꿈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끔, 동창들과 그 시절을 추억하며 버거운 삶을 견딘다. 이 때, 시내를 주름잡던 학교 '짱'들의 영화 같은 무용담은 그들의 왕년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해주는 양념 역할을 한다. 이들이 되뇌이는, 한없이 부풀려진 학교 간의 싸움 이야기는 사회의 냉혹함을 모르던 시절에 대한 반추일 뿐 아니라, 현실에 눌린 '아저씨'들이 품은 서글픈 판타지다.

'주먹'들이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은 딱 여기서뿐이다. 그들이 무용담 속의 주인공이 아닌 같은 반 친구로 다가오면, 힘 없는 이가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개인적인 기억이다. 프로그램 '전설의 주먹'에서 승승장구하며 동창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임덕규는 생전 처음 동창회에 나가보지만, 학창시절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친구들의 분노로 쫓겨나다시피 자리를 뜬다.

'강펀치'를 날리고 돌아서는 뒷모습,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네

영화 <전설의 주먹> 프로그램 '전설의 주먹'에서 연승을 거두고 영웅이 된 임덕규(황정민 분)는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가보지만,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친구들에게 원망만 산다.

▲ 영화 <전설의 주먹> 프로그램 '전설의 주먹'에서 연승을 거두고 영웅이 된 임덕규(황정민 분)는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가보지만,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친구들에게 원망만 산다. ⓒ 시네마서비스


전설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로 남아 있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상대 학교를 제압한 '짱'의 모습은 감탄으로 기억되지만, 어린 시절 굴욕을 주었던 교실 안 주먹패에게는 원망과 분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주먹들은 전설이 된 뒤에야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철저하게 밀려난다.

이렇게 과거의 주먹들은 환호 속에서 고독해진다. 힘 있는 자에게 휘둘리고 멸시당하는 것은 매한가지임에도, 폭력과 괴롭힘이라는 원죄가 따라붙었기에 이들은 약자의 집단에서 배척당한다. 다만 완력에 대한 동경의 산물로, '전설'이라는 껍데기뿐인 이름을 얻는다. 진심을 이해하고 의지할 곳은 같이 몰려다녔던 친구들 뿐이지만, 그들과는 링 위에서 상금을 놓고 싸워야 한다.

<전설의 주먹>은 이들을 통해 배경이 몇 번을 바뀌어도 빛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철저히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그려낸다. 이들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사회의 모순에 희생된 이들로 보여질 수도 있고 완력을 이용해 같은 약자들을 등쳐먹는 파렴치한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영화는 두 가지 해석의 여지를 모두 남겨놓고, 어떤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링 위에서 주인공들이 싸우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만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임덕규는 재력가의 승부조작 권유를 거절하고, 대가로 제시된 돈을 뿌리친다. 그리고 거액의 상금이 걸린 친구 이상훈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친구와는 싸울 수 없다고 선언하고 경기를 포기한다. 더 이상 힘과 돈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돈 대신 친구를 선택하는 임덕규의 모습은, 인간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다.현실이라면,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그처럼 돈 대신 인간성을 선택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인간이 돈과 권력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우리는 임덕규를 통해 '내가 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또 다른 전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일생 동안 자신을 우롱해온 사회에 강펀치를 날리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영화 <전설의 주먹> 마지막 순간 임덕규(황정민 분)는 어려운 처지에도, 돈보다 우정을 택한다.

▲ 영화 <전설의 주먹> 마지막 순간 임덕규(황정민 분)는 어려운 처지에도, 돈보다 우정을 택한다. ⓒ 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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