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바탕에 살짝 흘려쓴 듯한 타이포그라피가 화면 가득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과 벤쿠버, 시체스 등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이끌어낸 바 있는 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이다.

12라는 숫자에는 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고대인들에게 12는 '전부' 혹은 '극한'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올림푸스 12신은 꼭 12명의 신이 아니라 모든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의 12지파도 마찬가지다.

12는 우주와 사람의 순환적 운명을 상징하는 수라고 한다. 그래서 1년은 열두 달, 하루는  열두 시간씩 두 번 반복된다. 불교에서는 12연기설로 인간의 윤회를 설명한다. <북촌방향>은 그래서 더 재미나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열두 번째 영화에서 이전 작품을 모두 아우르면서 우연과 반복을 통한 순환적 운명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하는 듯하다.

반복

안국역 인근 헌법재판소 앞 교차로에서 시작한 영화는 같은 장소에서 끝을 맺는다. 마치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그림들 같다. 돌고 돌아서 결국 제자리로 오는 뫼비우스의 띠, 끝없이 돌고 도는 폭포, 계속해서 올라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계단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 속의 시간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똑같은 음절이 되풀이되는 캐논처럼 사건은 반복되고 이야기는 북촌을 떠다닌다. 어젠지 오늘인지 낮인지 밤인지 모호한 시간 속에서 딱히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똑같은 술집, 똑같은 멤버, 똑같은 얘기. 마치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게 인생이라고 역설하는 것 같다.

전직 영화감독이자 현재는 지방대 교수로 있는 성준(유준상)과 성준의 선배 영호(김상중), 영호의 후배 보람(송선미) 그리고 성준의 옛 애인을 닮은 술집주인 예전(김보경)이 영화의 주요 인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예의 그러하듯 술을 마시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쉴 새없이 이야기가 오간다. 그 속에 약간의 차이와 미묘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보르헤스는 단편 <음모>에서 "운명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병립하기도 하면서 계속 확장된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 나아가서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비록 변형되고 확장된 형태이지만, 결국 반복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북촌방향> 역시 그러하다.

우연

"오늘 참 신기했어요. 제가 네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도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 사람은 영화감독, 한 사람은 영화제작자, 한 사람은 영화음악 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에요. 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에요. 신기하지요? 그것도 모두 20분 안에 일어난 일이라니까요!"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 우연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우연에 둘러싸이고 접하고 스쳐가지만,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들의 점들뿐이니까요."

보람(송선미)은 술을 마시다 그날 자신의 우연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성준(유준상)은 우연으로 가득 찬 우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은 하나의 우연은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만 우연이 반복될 때는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기 전 우연히 성준은 보람이 말한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난다. 다만 마직막이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팬이라는 사진 찍는 여자(고현정)로 바뀌었을 뿐. 이처럼 이야기는 인과관계 대신 우연이란 매듭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막연히 모호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의 활로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인연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구성이 흥미롭다.

모호성

흑백화면은 시간의 모호성을 강화시키고 기억의 혼란을 초래한다. <오! 수정>(2000) 이후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이게 하루의 일인지, 여러 날의 일인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일인지, 각각 다른 에피소드가 섞인 것인지, 데자뷰는 아니었는지 의심스럽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늘상 있었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마치 소설에서처럼 일상의 자잘한 것은 모두 잊고 큰 덩어리만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이란 늘 그렇게 혼돈과 미로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북촌방향>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술집 이름이 '소설'이고, 성준의 옛 애인을 닮은 술집 주인의 이름이 '예전'인 것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북촌방향>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꼬여버리고, 일상과 비일상, 실재와 가상,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영화 속에서 성준의 첫 영화의 배우였던 중원역의 김의성은 실제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주연을 했고, 영화 속에서 영호가 얘기하듯 베트남에서 사업하다 망하고 돌아와 살이 많이 쪘다.

성준의 옛 애인 경진은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 1인 2역)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경진이 예전인지 예전이 경진인지 모호하다. 음식을 사러 나간 예전을 성준이 따라가서 키스를 할 때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예전이 두 번째는 느닷없이 "오빠! 헤어지고 오는 거지요? 나한테?" 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준이 예전과 섹스를 끝내고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자 예전은 "누군지 모를 텐데"라고 말한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로 홍상수 감독과 처음 인연을 맺은 유준상은 <북촌 방향>에서 전직 영화 감독역할로 홍상수표 찌질남의 대를 잇고 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에 유준상의 실제 모습이 찌질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하다. 영화는 재미나다. 소위 먹물들의 찌질한 일상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들의 찌질한 일상을 보며 킥킥거리고 웃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들뢰즈와 보르헤스를 비롯해서 반복, 차이, 시간, 우연, 기억, 재현과 같은 철학개념들을 찾아 바삐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이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모든 감각적 행위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게 홍상수표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성준이 낮술을 함께 마신 영화과 학생들에게 "따라하지 좀 마", "따라오지 마"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장면은 누군가의 작품을 모방하는 그래서 특색없는 영화들이 양산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인 것 같다. 또 자신은 누군가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 상황은 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준의 어색한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북촌의 눈 내리는 어느 날의 풍경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낸 듯한 <북촌방향>을 보노라니 문득 눈 내리는 겨울이 그립다. 지난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보름여 동안 촬영했다는데 흑백의 풍경에 침잠한 북촌 모습이 아주 정겹다.

북촌방향 홍상수 반복 우연 모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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