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김용택 시인님께.

 

봄에 여강을 다녀오고 시인님께 처음 편지를 드린 후, 어느새 여름이 깊어갑니다. 여름날 뜨거운 햇살 아래서 꽃들이 더 요염한 향기를 뿌리고, 과일들도 붉게 잘 익어가네요. 섬진강의 여름은 어떤 색깔인지요.

 

영화 <시>를 보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 손을 잡고 다시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봤습니다. 늦은 밤 극장엔 관객들이 얼마 없어 한적했는데 엔딩 타이틀이 오를 때 박수를 치고 싶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할머니 미자씨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혼한 딸이 남기고 간 중학생 손자를 데리고 살며, 비좁은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간병일을 하는 가난한 미자씨는 몸빼바지 같은 것을 입고 다니지 않고, 늘 소녀처럼 화사한 모자와 예쁜 옷을 입고 다닙니다. 늘 곱게 화장을 하고 소녀처럼 수줍게 '호호호' 웃기도 합니다.

 

어느날 팔이 자꾸 저려서 병원을 찾은 미자씨는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의사는 냉정한 어조로 명사부터 시작해서 동사까지 서서히 잊게 될 거라고 일러줍니다. 언어를 잊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우연히 동네 문화센터에 시 창작 강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시상이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사과를 응시하고 깨물어보고 나무도 올려다봅니다. 바람 소리도 느껴보고요. 도무지 시는 그녀에게 쉽게 와주질 않습니다.

 

문화센터의 김용탁 시인(김용택 시인 분)에게 미자씨가 호소합니다.

 

"선생님, 도대체 시를 어디서 찾아요?"

 

김용탁 시인은 열심히 찾으러 다니라고 그러나 분명 근처에 있다고 일러줍니다.

 

어렵게 근근이 키워가는 손자는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거나 다른 곳(TV나 게임 화면)을 보고 있습니다. 손자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는 미자씨는 딸에게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손자를 키우지만, 어느날 손자가 같은 학교 여학생의 죽음에 가해자로 관련되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무를 올려다보고 강을 바라보고 주방 싱크대를 바라보아도 시상을 건질 수 없던 미자씨는 이제 죽은 여학생의 흔적을 찾아 다닙니다. 여학생이 걸었을 교정과 불꺼진 과학실, 작은 성당, 유년이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까지… 종국엔 여학생이 몸을 던진 강까지 찾아갑니다. 강가에서 시상을 떠올리려고 노트를 꺼냈을 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립니다. 미자씨가 흘리는 눈물처럼 노트에 뚝뚝 떨어집니다. 강가에서 얻는 미자씨의 시는 눈물이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손자를 경찰에게 넘긴 미자씨는 그제야 시를 한편 완성했습니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쓴 시는 미자씨의 목소리였다가 어느새 죽은 여학생의 목소리가 됩니다. 시를 통해서 미자씨와 여학생이 한 사람이 됩니다. 아기였던 시절, 사랑받던 희미한 기억이 인생이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기억하는 미자씨. 아기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결하던 미자씨가, 노인의 성적 요구의 대상이 되던 간병인 미자씨가 다시 여학생의 삶과 죽음을 통해 순결한 미자씨로 태어납니다. 

 

시는 온전히 순결한 마음, 옆에 있는 사소한 사물들이나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찾아오는 선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를 쓰려는 노력은 누구나 해야합니다. 문화센터에 시를 배우는 어른들은 다 보잘 것 없는 이웃들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해보라니까, 어떤 아저씨는 기껏 월세 10만원짜리 방에서 큰大자로 누웠던 순간, 어떤 아기엄마는 아기를 낳던 순간, 또 어떤 아줌마는 하룻밤 연애를 못 잊어 말합니다.

 

미자씨 주변에 있는 다른 학부모들, 대체로 부동산 사장님이거나 노래방 사장님인 이들도 밉지가 않습니다. 자기 자식 하나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돈으로 무마하려는 이들이지만 다 이웃입니다.

 

김용택 시인님, 우리 누구에게나 시가 들어있다고 하셨지요. 그걸 끄집어 내야 한다고 하셨지요. 저는 시인님이 말씀하신 누구에게나 들어있는 '詩心'이 곧 인간의 착한 본성, 순수한 본성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순결한 본성을 느낄 때, 옆에 있는 아프고 힘든 사람에게 눈감지 않을 때 그때 내면의 목소리가 곧 시가 되나 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에 바치는 찬사 같은 것이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이웃들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

2010.06.17 13:47 ⓒ 2010 OhmyNews
이창동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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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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