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과 친중 논란에 휩싸인 SBS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방송 첫 주 만에 폐지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다. 최근 방송가에 불고있는 퓨전사극 열풍 뒤에 가려진 창작의 자유와 역사인식의 중요성 사이에서 깊은 고민거리를 남긴 장면이다.

판타지 엑소시금 사극을 표방했던 <조선구마사>는 지난 22일 첫회 오프닝부터 실존 인물인 태종 이방원이 환영을 보고 광기에 빠져 백성들을 학살하는 인물로 묘사되면서 역사 왜곡에 휩싸였다. 조선 의주를 배경으로 한 기방 장면에서는 월병과 피단, 만두 등의 중국 음식과 소품을 연출한 것을 두고 '중국색'이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구마사>를 쓴 박계옥 작가가 전작인 tvN <철인왕후>에서도 실존인물과 전통문화유산을 희화화하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전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시청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퓨전 사극이라고 해도 역사 고증을 무시한 것을 넘어 고의적으로 한국 역사를 폄하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제작진의 미숙한 해명은 오히려 성난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SBS 측은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한 주간 휴방을 결정했으나, 광고주나 협찬기관들마저 모조리 등을 돌리면서 향후 촬영이 어려워지자 결국 중도 폐지라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조선구마사>가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역사왜곡 드라마에 동참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이미지에 손상을 입게 됐다. 

<조선구마사>을 둘러싼 논란은 한류 열풍을 등에 업고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드라마와 퓨전사극 신드롬 뒤에 가려진 부작용을 돌아보게 만든다. 최근 방송가에서는 해외수출과 판권구매까지 염두에 두고 콘텐츠를 제작하다보니, 드라마 제작사들도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가볍고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시장규모가 크고 한국드라마의 인기가 높은 중국 시장을 고려한 콘텐츠가 늘어났고, 중국 자본의 후원을 업고 제작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제로 최근에 방영된 <여신강림>,<빈센조>,<철인왕후> 등 수많은 인기 드라마들이 중국 기업의 PPL이 대거 등장하거나, 중국 원작을 소재로 하는 등 노골적으로 중국색으로 도마에 오른바 있다.

중국은 최근 한복, 김치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화 동북공정'을 펼치며 국내에서 반중 감정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조선구마사>가 방송된 이후 일부 중국 네티즌들이 드라마에서 묘사한 조선의 모습을 옹호하는 주장들도 등장했다. 이런 현상은 자연히 한국에서도 올바른 역사인식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대중적 파급력이 높은 드라마라는 컨텐츠에서까지 중국식 문화공정을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 <조선구사마>를 통한 국내 시청자들의 강한 분노로 나타난 셈이다.

퓨전사극이라는 장르를 내세워 잘못된 역사관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도 새로운 기준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몇 년간 제작비와 시청률 등의 문제로 정통사극 제작이 난항을 겪으며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좀더 가볍고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퓨전사극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퓨전사극이라고 해서 고증이나 역사관 자체를 아예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시청자들의 요구다.

넷플릭스를 통하여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던 <킹덤> 시리즈는 역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판타지물이지만, 철저하게 가상의 인물과 한국적인 설정을 내세우며 역사왜곡 논란을 영리하게 피해갔다. 하지만 <철인왕후>나 <조선구마사>는 굳이 민감한 내용을 다루면서 실존인물과 역사를 왜곡까지 해야했던 당위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현대 시청자들의 역사적 지식 수준이나 드라마 완성도를 따지는 눈높이가 제작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게 올라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야말로 패착이었다. 자연히 그동안 제작비 투자나 판매라는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중국 자본의 손을 잡거나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작해왔던 드라마 업계에도 이번 사태가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행동하는 시청자'들의 참여방식이 좀더 다양하고 현실적이 되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에도 시청자들이 드라마 완성도나 메시지, 배우들의 연기 등을 놓고 활발하게 의견을 제시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로 인하여 드라마가 실제 존폐까지 이른 경우는 드물다.

<조선구마사>의 경우, 시청자들은 예전처럼 단순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을 넣거나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수준을 넘어서 온라인과 SNS를 통하여 문제된 내용들을 공유하고 드라마 역사적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가 하면, 청와대 국민청원에 제작 중지를 요청하고 관련 기업에는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등 조직적인 '소비자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개개인이 댓글로 드라마를 비판한다던지, 혹은 방심위에 민원을 접수해서 절차를 몇달씩 기다리는 것보다도 훨씬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이다. <조선구마사>가 폐지까지 이른 결정적인 이유도 해당 드라마 제작을 광고하거나 지원해온 기업들이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드라마와 손절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는 앞으로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조선구마사>는 노골적인 역사왜곡 의혹과 그 부작용에 대한 수많은 시청자-언론-학계까지 폭넓게 일치된 공감대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의 시각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 창작물마다 민감한 내용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해서 '잘못된 프레임'에 휩싸여 드라마를 보이콧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칫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위축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조선구마사> 이후 현재 제작중인 몇몇 드라마들이 벌써 방영도 되기 전에 기획의도나 설정 등을 놓고 도마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구마사>가 우리 드라마업계의 미래와 역사인식의 중요성, 그리고 시청자들의 참여의식에게 남긴 또다른 숙제다.
조선구마사 퓨전사극 소비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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