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민자영 그리고 민영익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0월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서울예술단


시국이 워낙 하수상한 세월이다. 정치가 대중문화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하다. 하루가 다르게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현실, 문득 얼마 전에 끝난 한 작품이 떠오른다. 바로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이다. 지난 10월 11일에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하여 10월 23일에 막을 내렸다.

"모든 문화 콘텐츠는 그 콘텐츠가 피어난 시·공간적 배경과 얽혀 있다. 똑같은 작품이어도 몇 년도에 어느 나라의 무대에 올라오느냐에 따라 그 작품이 갖는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에서 김옥균으로 분했던 강필석 배우를 인터뷰하면서 썼던 문장이다. 지난 2013년과 2015년에 이어 벌써 세 번째로 올라온 <잃어버린 얼굴 1895>이 지금 유독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도 아마 그런 게 아닐까(관련 기사: '민비'와 '명성황후'의 간극, 잃어버린 야누스의 얼굴). 작품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데, 2016년 지금 시점에서 곱씹어보니 느끼는 감상이 사뭇 다르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가 김옥균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그렸다면,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의 관점에서 당시를 그린다. 다만, 뮤지컬 <명성황후>처럼 일방적으로 그녀를 미화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 단 한 장도 명확히 남지 않은 그녀의 사진처럼,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처럼, 그녀를 둘러싼 복합적인 감정을 한 데 모은다.

그러나 자꾸만 혼란스러웠던 역사에서 그녀가 저지른 악행과 광기에 눈길이 간다. 요즘의 현실 때문이다.

자꾸만 겹쳐 보이는 그분의 그림자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갑신정변의 실패 김옥균(김도빈 분)의 갑신정변은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 실패에 크게 기여한 게 바로 명성황후 민자영이었다. 혁명으로 분출된 시대적 요구를, 당시 정치권은 해결하지 못했다. ⓒ 서울예술단


"민초들은 어찌 이리 우매한가. 내 적들이 만들어낸 거짓 소문을 어찌 이리 진실이라 믿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가. 나는 이곳을 연못으로 만들겠다. 물 한 방울도 새지 못하도록 못을 더욱 깊이 파고, 이 촉새 같은 입들을 모조리 쓸어 담아 가두리라. 나 왕비가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울었노라고. 울어서 이곳이 못이 되었다고 새기리라. 죽어라. 다 죽어라." -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명성황후의 대사 중에서

명성황후 민자영은 당대 최고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봐도 '어진' 군주는 아니었다. 자신의 실정을 인정하기 보다는, 무지한 백성을 탓했다. 그리고 죽였다. 자신을 비난하는 민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불통의 상징이었다. 마치 그분처럼.

그녀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피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김옥균과 급진개화파가 주도하는 작품 속 갑신정변은, 그녀가 청나라를 끌어들이며 일본의 배신으로 이어져 실패한다. 그렇게 새 시대를 꿈꾸었던 위로부터의 혁명은 좌절된다.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전봉준과 백성들, 그러나 을미적 을미적 거리더니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백성의 요구 역시, 그녀는 묵살한다. 전봉준에게서, 누군가의 죽음이 겹쳐 보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서울예술단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또 어떤가.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대사 한 마디 없지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가 바로 전봉준이다. 임오군란 이후 '새야새야'에 등장하여 각 잡힌 안무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당시 정권이 끌어들인 외세의 개입 탓에 실패로 돌아간다. 전봉준 역시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그 명을 다한다. 권력이 죽인 그의 혼은 계속 명성황후 주변을 맴돌며 쉬지 못한다.

"이 나라의 어머니 차갑기만 하신 분. 모두가 기다리던 그분은 그저 다정한 손길로 힘내라 우리를 위로해주리라 믿었는데. 싸우고 내쫓고 죽이는 이 나라의 어머니. 굶주린 아이의 눈물을 차갑게 외면하시고 산 우리의 주린 배를 못 본 척 하시고 우리의 바람과 고통을 눈 감아버리죠. 민비가 죽인 사람이 흘린 피가 천지를 뒤덮는다. 돈 없다 죽이고, 말 안 듣는다 죽이고, 잔인하고 잔인한 이 나라의 왕비." -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제1막 No.07 '새야 새야' 중에서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대원군이 환국한다. 작품 안 명성황후와 고종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각자가 이 나라를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와중에 정작 통치의 주체만 있고, 대상은 사라진다. 백성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자신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며 소리 높이는 정치권과 비슷하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민중의 노래는 아직 의사당에 제대로 닿지 못하는 것만 같다. 그때 전봉준이 그랬듯이.

개인사적 비극, 정치적 책임의 '면피'가 될 수 없다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외로웠던 민자영 갑작스럽게 주어진 황후의 자리 그리고 권력. 저 삭막한 궁궐 안에서 그녀는 외로웠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외로움이, 그녀의 정치적 실패를 옹호해주지는 못한다. ⓒ 서울예술단


물론 민자영이 날 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롭게 자란 그녀는 궁에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의 집착과 광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강하게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혼자였던 그녀는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는 민영익에게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실정까지 이해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나 임오군란 당시 쫓겨났던 명성황후는, 그녀의 환궁을 맞힌 무당 진령군을 궁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무속 신앙에 의지하며 궁에서 굿판을 벌인다. 황궁의 대소사를 진령군의 점괘에 의지했다. 굿을 벌이는 동안에 국고는 소진됐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가니 원성이 터져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많은 이가 진령군에게서 최순실(최서원)을 떠올리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다.

작품 속에서 백성 전반의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 휘와 건수는 명성황후의 이런 면들을 비판한다. 명성황후를 곁에서 모시는 선화는 그녀가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녀가 불쌍하다고 해서 권력자로서 당시 시국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명성황후가 불쌍한 것보다 훨씬 그 이상으로 불쌍한 건, 아무 죄 없이 그녀 탓에 힘겨워 했던 백성이다. 2016년 현재, 어버이연합으로 대표되는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대통령에게 죄가 없다며, 조실부모하여 얼마나 외로웠겠냐며 하소연하는 게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유와 같다.

"당신은 어떤 왕비로 기억되기를 바라오?" -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고종의 대사 중에서

정치인은 공인이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공적 책임이 요구된다. 자신의 책임을 등한시하고 있는 그는 과연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될까. 2014년 4월 16일 참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한 건 2주가량 지난 29일이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안에는 언제나 '유체이탈' 화법을 써가며 면피했고, 내치보다는 외교에 치중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그랬던 대통령은, 지난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관련 단독 보도에 바로 다음날인 2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하는 신속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시 침묵.

만약 언젠가 <잃어버린 얼굴 2016>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대통령을 향해 물러가라는 구호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도 연민 받을 구석이 있기는 한 걸까.

최소한 작품 속 민자영은, 일말의 이해 받을 구석이라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방황하며 결국 망가져가는 한 인간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 있는 그분은 아니다. 그녀는 가난한 적도 없었고, 시대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도 않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무수한 사람의 생활을 파괴한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조선이 조선으로 제대로 서지 못한 상황에서, 민자영의 마지막 사진을 결국 불태우는 휘의 모습이 자꾸만 겹친다.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세 번째로 관객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지난 23일 성황리에 폐막했다. 특히 '여왕' 김선영이 2년 만에 복귀작으로 택한 무대라 더 주목을 받았다. 김선영, 조풍래, 박영수, 이창엽, 금승훈, 김도빈, 이혜수, 김태훈, 정원영 등.

▲ 사진을 찾아서 사진관의 '휘'가 마지막으로 촬영해서 가지고 있던 명성황후의 어진. 조선이 우뚝 섰을 때 사진을 박겠다고 했던 명성황후였지만, 결국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죽은 이후에야 액자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유일한 사진을 민영익은 찾아 헤매지만, 휘는 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의 국운이 다했을 때, 그 사진을 불태운다. 2016년의 우리는 그녀의 사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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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김준수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안 뻔(Fun)한 티켓북] 김준수의 팬만 환호할 괴작,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다른 얘기 하나. <빅뱅 메이드>라는 영화가 있다. 10주년을 맞은 아이돌 '빅뱅'의 월드투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관련 기사 : 10년차 빅뱅이라면, 좀 다를 줄 알았다) 이 영화를 영화적 완성도로만 평가하면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서사가 딱히 없다보니 집중하기 어렵고,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각자의 목소리가 잘 엮이지 않아 깊이가 얕다. 하지만 빅뱅의 팬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콘서트 실황 영상도 훌륭한데, 중간중간 자유롭게 나와서 무대 뒤의 일상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이들의 모습까지 곁들여지니 팬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또 다른 얘기 하나. 2013년에 있었던 MBC <무한도전> '응원' 특집을 기억하는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응원단과 함께 <무한도전> 멤버들은 응원 구호와 동작을 땀 흘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정기전에 직접 무대 위에 올라 양교의 학생들과 함께 호흡했다. 학생시절, 모교가 지상파 예능의 소재가 되어 몇 주간 전파를 타니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유재석과 함께 내가 언제 "필승 전승 압승"을 외쳐보겠는가. 그러나 이 응원 특집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노잼' 특집이었다. 이후 더 큰 국민적 축제에도 함께하려고 했던 이 장기 프로젝트는 결국 2013 고연전(홀수해의 정식 명칭은 고연전, 짝수해는 연고전이다)을 끝으로 중단됐다.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웃음을 줘야 하는 공중파 예능에서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는 소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고, 이를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양교의 학생들은 '민족의 아리아'와 '원시림'을 부르며 환호를 보냈지만(나를 포함해), 예능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분명 아쉬움이 많은 기획이었다.<빅뱅 메이드>와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비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전자는 과오가 작고 후자는 크다. <빅뱅 메이드>는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빅뱅이라는 아이돌과 이들을 오랫동안 응원해 온 팬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다. 빅뱅과 VIP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빅뱅의 팬이 아닌 사람이 보고서 "빅뱅 팬만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이네"라고 비판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다.반면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다르다. 학벌 구조 피라미드의 정점에 속하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이 두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혹은 뒀던) 학생들만 열광하고 이 두 학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기는 어려운 문화가 공중파를 탔다. 일종의 공공재 개념이 포함된 지상파에서, 특정한 사람들만 희열을 느낄 내용을 구성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물론, 그 특수성을 모두가 함께 웃고 즐기며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으로 연결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시 특집은 실패했다. 오랫동안 <무한도전>을 사랑한 팬들 입장에서는 왜, 내가 사랑하는 저 남자 연예인들이 응원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슬링 특집에서 그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감동하며 울었던 시청자들이지만, 응원 특집에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다.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빅뱅 메이드>처럼 김준수의 팬들만을 위한 뮤지컬이었으면 모를까, 아니면 김준수의 콘서트 내에 한 꼭지로 삽입된 연출이었다면 모를까. 연극·뮤지컬 장르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불협화음이 된 비빔밥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도리안 그레이>의 면면은 훌륭하다. 이지나 연출이 추구했던 미장센은 매혹적으로 무대 위에 구현됐다. 김문정 음악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넘버들은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탄탄하다. 조용신 작가가 선택하고 다듬은 어휘들은 그 선율 위에 유기적으로 붙어서 철학적 메시지와 시적 운율을 동시에 붙잡으려 한다.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모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자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 넣는다.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였을 때, 엄청난 무게감으로 충돌하는 웅장하고 거대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이 조합에서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각 요소는 훌륭한데 한 데 모아놓고 보니 별로인 극은 안 그래도 우리 뮤지컬 시장에 많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극 중에서도 <도리안 그레이>는 정점에 속하는 극이다. 이천 쌀로 지은 밥에 값비싼 로브스타와 횡성 한우를 얹은 뒤 덜 익은 김칫국물을 부어서 비벼버린 느낌이랄까.특히 원작과는 다른 모호한 결말은 이 극이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의심케 한다. 극단적 탐미주의의 추락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우리를 옥죄는 도덕과 관습이 여전히 인간이 더 아름다운 존재로 비상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작품 전체가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유미주의인 건지.<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타락해가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 잘생기고 아름다웠던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화가 배질은 도리안의 초상화를 일생의 작업으로 생각하여 완성한다. 그리고 헨리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헨리는 도리안에게서 바로 그 가능성을 엿본다. 도덕이라는 룰을 깨야 인간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도리안을 죄의식 없는 존재로 만들려 한다.도리안이 자유로워질수록, 도리안의 영혼을 담았던 초상화는 점점 추하게 일그러진다. 헨리는 결국 도리안이 초인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도리안 역시 파멸하고 만다. 배질은 도리안의 타락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실패한 건 이 세 남자만이 아니다. 제작진도 이 이야기가 파멸로 좌초하는 걸 막는 데 실패했다.조용신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계급적인 문제를 논하는 극이 많은데 그 외의 이야기도 표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계급의 문제를 고발하는 뮤지컬 작품이 과연 국내에 많은지는 의아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충분히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더 다양한 소재, 더 다양한 메시지를 장르 안에서 소화해야만, 그 장르 자체가 보다 넓어지고 성장한다.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주제의식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 건 박수 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 결과물이 목적에 위배될 뿐이다.강 대 강으로 충돌하는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는 하나하나 무겁다. 곱씹으며 소화시켜야 하는데 이 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소화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명언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가슴에 닿지 못하고 무대 위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대사는 현학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나중에는 결국, 저들이 왜 그토록 싸우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배질은 왜 그토록 기존의 전통과 도덕에 얽매여 있는가. 헨리는 왜 그토록 그 틀을 깨고 인간을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 그 실험대상은 왜 도리안이었으며, 도리안을 통해서 헨리는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배질은, 그런 헨리를 막아서고 죽는 순간까지 도리안의 회심을 믿었던 걸까. 그래서 도리안은 결국, 무엇이 되었던 걸까. 인간인가 혹은 괴물인가. 작품 속 세계는 퇴폐적이다. 세기가 바뀌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은 이전에 신의 영역으로 치부했던 자리를 조금씩 넘보기 시작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도덕은 지배자들이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장하고 재생산한 문화이다. 정치권력 혹은 종교권력이 세상에 군림할 때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족쇄를 부수고 도덕의 경계선에서 예술의 영토를 확장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 <도리안 그레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의 인간 해방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냥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만이 돌아다닐 뿐 어디에도 인간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다. 시대적 고민도, 철학적 성찰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도 담지 못했다.기자간담회에서 니체의 초인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감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있는가. 무엇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는가. 무엇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규정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 초인이라는 그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과 생경함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선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원작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보다도 지루했다. 감정이입이 안 되는 채로 인물들은 논쟁만 하고, 주인공은 점점 타락하는데 그 서사가 딱히 치밀하지도 않다. 그러니 시계만 볼 수밖에.잘못된 김준수 사용법 "김준수는 까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동료 기자가 했다. 동의한다. 김준수의 잘못은 아니다. 김준수라는 배우가 '하드 캐리'하는 이 극은 김준수를 빼면 별로 볼 게 없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그 김준수 때문에 극이 망가져 버렸다.김준수가 노래한다. 김준수가 춤을 추고, 김준수가 연기를 한다. 김준수가 키스를 하고, 김준수가 잠자리를 갖는다. 김준수가 땀을 흘리고, 김준수가 눈물도 흘린다. 김준수가 잘하는 것, 김준수가 할 줄 아는 것, 김준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극에 쏟아 부어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과용된 김준수가 극을 망쳐버렸다. 저 배우가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토드(죽음)로 분해 나에게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던 그 배우가 맞는지 눈과 귀가 의심스러웠다. 특히 1막 마지막 곡에서 보여준 안무는, 김준수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재확인해줄 뿐 별다른 감흥이 없다. 전체 작품의 톤에서 튀기만 할 뿐이다.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리면 냄새도 맡기 싫어진다. 아무리 맛있는 양념이어도 정량을 초과하면 음식 전체를 해친다. 김준수라는 좋은 재료를, <도리안 그레이>는 과용했다. 굳이 김준수의 모든 것을 무대 위에 보여줄 필요는 없다. 김준수라는 배우는 그 분량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빛난다. 그런데 선장도 김준수, 1등 항해사도 김준수, 갑판장도 김준수, 측량사도 김준수를 세워놨다. 배가 제대로 순항할 수 있을리가 없다. <도리안 그레이>는 본래 헨리와 배질의 사상적 갈등과 논쟁이 극의 중심을 잡았어야 했다. 헨리와 배질은 어느 한쪽도 손쉽게 택할 수 없는 인류의 오랜 갈등을 대변한다. 르네상스의 태동도 그랬고, 휴머니즘의 발아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김준수 보여주기에 치중하다보니, 이 논쟁은 그냥 감정싸움이 된다. 악역이 아님에도 헨리는 마냥 나쁜 사람 같고, 배질은 그저 지나치게 착하기만 한 도덕주의자이다. 그토록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김준수인데, 그가 연기하는 도리안 그레이는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연기력이나 가창력의 문제가 아니다. 타락한 도리안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으니. 하지만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를 시키고, 감동하게 하고, 객석에 앉은 관객을 (김준수의 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리안 그레이라는 청년의 그릇된 욕망과 불행에 투영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가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는 표현이 충분치 않았다. 왜 그토록 늙기 싫어하는지,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하는지조차도. 정작 설명되어야할 부분인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망가져가는 게 별로 안타깝지 않다.오로지 김준수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이 작품을 과연 완성된 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리뷰에서도 쓴 문장이지만, 극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배우가 오든 다른 배우가 오든 극은 극대로 존재해야 한다. 배우라는 선원들의 조합에 따라 다른 매력을 뽐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배우가 아니면 출항할 수 없는 배라면, 애초에 설계도부터 잘못 그린 거다.예전에 한 말 한 번 더, 없는 개연성을 배우의 열연으로 채워넣는 건 배우가 박수받을 일이지만, 극이 칭찬받을 일은 결코 아니다. 김준수뿐만이 아니다. 박은태·최재웅처럼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열연하며 어떻게 어떻게 메워보려고 하지만 말끔하게 가리기엔 이미 이 배의 구멍이 너무 크다. 김준수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게 다이다. 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이 그릇된 유미주의적 극은, 그 극단적 '미'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추하게 변해버린 도리안 초상화와 꼭 닮은 모양새로 망가진다. 그리하여 끝내, 아름답지 않다.

원고 불태운 문학인들... 권력 입맛에 맞추긴 싫어

[안 뻔한 티켓북] 억압과 폭력의 시대, 예술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 뮤지컬 <팬레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서 그저." - 뮤지컬 <팬레터> No.08 '신인 탄생' 중에서그런 시대였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조선에서 희망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시대, 그 안에서 치열하게 조선어를 가꾸는 이들이 있었다. 경성의 모더니스트 문인들의 동인 '7인회'. 자꾸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도 7명이었던 적은 없지만(아마도 그건 누군가의 지적처럼 무대 위 의자가 7개가 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정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순수예술을 향한 이들의 열정 모두가 빛났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반짝이는 문인이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소설가 김해진. 7인회에 합류하기로 한 그의 결정에 기존 회원들은 크게 기뻐했다. 김해진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그의 팬이자 작가 지망생 정세훈의 마음은 특히나 더 터질 것 같았다. 7인회의 곁에서 이들의 일을 돕던 세훈은 바로 옆에서 해진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다. 그런데 그 만남이,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라 누가 생각했으랴.지난 5일, 서울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린 창작 뮤지컬 <팬레터>는 폭압의 시대에 강렬하게 무언가를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특수한 시공간 속 보편적인 감정에 대하여 세훈은 이전부터 해진을 향해 '히카루'라는 가명으로 팬레터를 보냈다. 해진은 세훈의 팬레터에 크게 고무되어 히카루와 끊임없이 서신을 교환한다. 서로의 진솔한 감정을 나누며 교류하던 어느새, 해진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히카루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 일방향적 애정의 교차, 세훈은 해진의 문장을 동경하며 사랑을 보내고, 해진은 세훈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히카루에게 연심을 품게 된다.처음에 세훈은 이 오해를 모두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실망하게 될 해진의 얼굴을 지근거리에서 볼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자기 내면의 히카루를 보다 구체화시켜 나간다. 원고지 안에서만 존재하던 히카루는 점점 명료한 인격이 되어간다. 해진의 '뮤즈'가 된 히카루는 이제보다 적극적으로, 격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해진은 폐렴과 맞서 싸우면서, 히카루와 함께 자신의 유작이 될지 모르는 소설을 써 나간다.히카루로서 해진과 함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스스로 생을 갉아먹으면서 글을 쓰는 걸 더 지켜볼 수 없다는 세훈으로서의 욕망. 두 욕망이 충돌하면서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극은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 파국을 목도한 세훈은, 결국 다시는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회로 돌아간다. 전쟁 중에도 사랑이 꽃피듯,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에도 한 줌의 인간성을 유지한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경성이라는 시공간의 폭력을 특별히 폭로하지도 그렇다고 순화하지도 않는다. 비록 폭압의 시대였지만, 이 순진한 예술가들은 문학의 힘을 믿었다. 그래서 <팬레터>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설익은 사랑과 설익은 욕망이 뒤범벅된 이 작품은, 온전하고 완성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그 풋풋하면서도 어설픈 감정에 대해 노래한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관계없다. 우리는 각자의 뮤즈를 꿈꾸고, 그 뮤즈 때문에 다치고, 그 뮤즈 덕분에 성장한다. 뮤즈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7인회가 그랬고, 히카루라는 뮤즈를 지나치게 사랑한 해진도, 해진이라는 뮤즈를 너무 아꼈던 세훈도."뮤즈, 달콤하고 뮤즈, 잔인해. 영감을 주고, 생명을 빼앗아가는 그들은 잔인한 천사. 그러나 누가 그들을 감히 거부하겠는가. 내 모든 걸 잃어도 좋으니 오늘 밤 나의 창가에 찾아와주오." - 뮤지컬 <팬레터> No.10 'Muse' 중에서공연 칼럼니스트 권혜은은 지난 10월 19일 <아이즈>를 통해 "<팬레터>의 배경을 우리의 근현대사 중 아무 때를 골라 치환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공감 가는 지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굳이 이런 배경을 설정해야 했는지 극은 명쾌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이전까지의 김태형 연출이 보여줬던 완성도에 비하면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리는 부조화도 간간이 눈에 띈다.하지만, 그 다소 안 맞는 아귀의 우리네 감정을 극이 보여주려고 했기에,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 하나씩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하기에 그렇게 나쁘지 않다. 흔들리던 혼란의 시대만큼이나 그들의 감정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테니.극의 제일 마지막, 해진은 히카루의 손을 잡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세훈 앞에 나선다. 히카루는 해진의 손을 잠시 놓고 세훈에게 다가온다. 실수하고, 오해하고, 아팠던 그 마음을 다시 움켜쥐고, 과거의 미진했던 나를 마주한다. 세훈은 잃었던 뮤즈를 다시 찾았다. 그렇게 삶과 죽음, 예술과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세훈은 자기만의 글을 완성한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그도, 이 야만의 시대에 낭만을 노래하는 문인이 된다. 마지막의 감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객석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 감동의 파고가 높은 건, 그 이전의 혼란스러움이 있었기에, 그런 폭력적인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뮤즈를 찾고 그 역경을 이긴 끝에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잘게 분해되는 몸 위로 따뜻한 햇살이 덮였다. 영원히 잊히지도 넘길 수도 없는 그 페이지를 붙들고 오늘을 살아. 난 아직도 그 한가운데에, 하루해살이 풀처럼 내 사랑이 죽었을 때, 내 청춘도 죽었고, 차마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봄을 이제야 보낸다." - 뮤지컬 <팬레터> No.19 '내가 죽었을 때' 중에서그러니 우리도, 이토록 아픈 오늘을 이토록 간절하게 붙잡는다. 다시 오지 않을, 너무 고통스럽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청춘의 오늘을, 사랑의 오늘을.순수와 참여에 관한 고민, 여전히 유효한 까닭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사이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러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논박이었다. 7인회가 가장 아름다운 순수문학을 추구했다면, 그 반대편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아래 카프)이 가장 적극적인 참여문학을 주창하고 있었다. 영화 <동주> 속 윤동주와 송몽규의 논쟁도 순수와 참여의 대립이었고, 뮤지컬 <명동 로망스>에도 반영된 박인환과 김수영의 언쟁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그저 예술적인 '미'를 추구할 것인가, 그 예술의 쓰임새와 효용에 관해 이야기할 것인가. 예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가, 사회적 맥락에서 힘을 발휘할 때 더 의미가 있는가. 예술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그 자체로 목적성을 띠는가. 이에 관한 질답이 오가면서 우리 문학은 사회와 소통하면서도 더욱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현대에서 이 물음표가 마침표로 바뀐 이유는 단순하다. 순수와 참여를 무 자르듯이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각자가 지향하는 예술의 목표 지점은 다르다. 한 예술가가 건설하고자 하는 예술 세계 속에서, 순수와 참여의 비중은 제각기 다르게 분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100% 순수한 예술도, 100% 참여적인 예술도 없다. 예술은 사회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독립된 섬이 아니기에 온전히 순수할 수 없고, 동시에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온전히 참여적일 수도 없다.7인회가 추구했던 모더니즘 문학은 어떨까. 그들이 쓰고 읽고 나누었던 글 자체에는 저항의식이나 시대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라는 거악이 조선을 탄압하던 시절, 조선어를 지키고 가꾸려는 그 노력 자체가 곧 저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빼앗긴 들에 언젠가 봄이 오리라 믿으며, 그 봄이면 피어날 씨앗들을 애써 품고 지키는 게 문인의 역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시대의 야만 속에서도 낭만과 서정을 지키는 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저항이다. "갑자기 투서에다 검열이라니? 왜 이렇게 됐지? 확실한 건, 누군가 있어. 마치 저 위에서 우리를 가지고 노는 듯. 이것도, 저것도, 숨겨, 태워. 엎드려서 잠시만 넘겨. 지금은 이렇게 태울 수밖에. 빼앗긴 들판에도 다시 봄은 올 테니…." - 뮤지컬 <팬레터> No.12 '투서' 중에서투서가 전달되고, 문인들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7인회는 불안해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땀을 잉크 삼아 쓴 원고들을 어쩔 수 없이 불태운다. 부패한 권력은 예술을 억압한다. 권력의 손아귀에 넣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것만 예술로 인정한다.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의 잣대는 권력의 손이 아니라 예술가의 손에서 결정되어야 함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글이 사라질까 불안했던 만큼, 그들이 자신들의 문장을 지키고 싶어 했던 만큼, 딱 그만큼 그들은 일제에 맞서 투쟁한 셈이다.2016년, 억압의 시대가 돌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을 한 번도 독대한 적이 없다는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을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한겨레> 단독 보도를 통해 제기됐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상상의 한계를 넘어 닿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게 예술일진데, 이 정권은 예술조차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예술과 아닌 예술로 나눴다. 특정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 코너 때문에 CJ를 향한 정권의 외압이 거세졌다는 의혹도 계속 제기되는 건 왜일까. 아니 땐 굴뚝에서 나는 연기일까.그러니, 이처럼 회귀와 탄압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낭만을 지켜야 한다. 시대가 야만적이라고 우리의 영혼까지 야만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으니까.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무대를 보는 이 모든 과정, 예술을 만들고 나누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이요, 저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위에 것들과 맞서 싸우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아름다웠던 무대를 기억하자.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은 해진처럼, 다시 문학을 노래하는 세훈처럼.뮤지컬 <팬레터>의 김태형 연출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1인이다."더 멋지게, 더 현대적으로. 예술만은 자유로워도 괜찮아. 너희의 글은 무슨 의미냐, 혹은 이런 시도 미친 짓이니 때려치워라 따위 말들을 하지만, 부끄럽지 않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난해도 사랑은 알지.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올 테니. 아무리 점령당한 땅이라 해도 예술마저 점령당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 뮤지컬 <팬레터> No.04 'Number 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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