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세상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비단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인습의 잔재에 영향 받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노스햄튼(Northhampton)의 찰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구두 공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찰리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만약 제가 구두를 만들고 싶지 않으면요?"라고. 하지만 찰리의 질문에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클랙튼(Clacton)의 사이먼도 마찬가지이다. 챔피언 벨트를 간절히 손에 쥐고 싶었던 아버지는,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뤄주기를 바랐다. 사이먼은 소질이 있었고, 권투를 곧잘했지만 챔피언 벨트는 사이먼이 바라는 길이 아니었다.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니며 '롤라'가 될 때 가장 행복한 사이먼은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으며 억지로 연습하러 가야만 했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못난 아들 찰리(왼쪽, 김호영)와 롤라(오른쪽, 강홍석)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으며 살기에는 각자의 가슴에 품은 게 달랐다. ⓒ 곽우신


"나 아주 어릴 땐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 그랬었지. 늘 하시던 말씀 강하게 싸워라. 별난 짓 말아라. 어울려 살아라. 나를 봐 힘없이 숨을 죽인 채 힘겹게 억눌린 나란 존재를. 그가 원한 사람, 난 쉽지 않았어. 자유롭게 숨도 못 쉬었어. 진실한 내 모습 그는 외면했지.

나는 못난 아들 그가 원했던 모습이 아냐. 정말 노력하고 애써 참아 봐도 난 될 수 없었어. 아빠의 그림자. 끝없는 기대의 고통 속에 지쳐 쓰러졌지. 아팠어. 하지만 난 깨달았어. 괜찮다고, 이대로. 내 모든 걸 다 바쳐 원하고 원해도 난 될 수 없었어. 아빠의 그림자. 그 속에 설 수 없었지. 거울 속 내 모습, 너와 나." - 뮤지컬 <킹키부츠> 1막 No.09 '못난 아들(I'm not my father's son)' 중에서

사이먼은 사이먼일 수 없었다. 그는 롤라이고 싶었다. 하이힐에 가짜 가슴을 달고, 드레스를 입은 채 춤추며 노래하는 여장남자 아니 드래그 퀸(Drag Queen)이 그의 정체성이었으니까. 그의 언행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남자다운' 것이 아니었고, 결국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야만 했다.

찰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구두 상자. 이 상자는 사실 하나의 '맨박스'(교육자 토니 포터가 제시한 용어. 남자를 '남자다움'이라는 틀 안에 억압하는 시선이나 편견)였다. 공장을 잘 이끌고 가업을 물려받는 것. 자신의 길에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자다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남자의 길이 갑자기 교차한다.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이들 앞에 놓인 도전 과제. 길이 80cm의 강렬한 빨간 부츠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1년 8개월 만의 컴백, 더 화려하고 강렬하게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정성화의 롤라 <영웅>의 안중근, <레미제라블>의 장발장도 잘 어울렸지만 <킹키부츠>에서 롤라를 소화하는 정성화도 굉장히 매력적이다. 희극인 출신임에도 안정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그는, 생각보다 넓은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이다. <라카지> 때 보여줬듯이, 이번에도 정성화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뽐낸다. ⓒ 곽우신


<킹키부츠>가 서울 블루스퀘어로 돌아왔다.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줬던 초연에 이어 재연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올라왔다.

우선 배우. <라카지>에서 이미 소수자 역할을 진정성 있게 소화했던 정성화는 무대를 휘어잡는 매혹적인 롤라였다. 초연에서 누구보다 빛났던 강홍석은 그때 그대로 다시 한 번 롤라가 되어 돌아왔다. 제 옷을 입은 듯한 김지우는 로렌으로 분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한다. 신의정의 니콜라는 배우의 역량에 비해 캐릭터 분량이 너무 적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신 스틸러로 활약하는 돈의 고창석과 심재현의 재능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됐다. 관능미 넘치는 엔젤들은 관객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데 특히 한선천은 이 역을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두 명의 롤라 롤라 역에 더블 캐스팅된 정성화(왼쪽)와 강홍석(오른쪽). 초연 때 이미 자신의 재능을 뽐낸 강홍석이 제 옷을 입고 돌아왔다. <드라큘라>의 반 헬싱 같은 역할보다는 역시 이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니콜라와 로렌 두 아들들(찰리와 롤라)의 이야기가 주된 극의 흐름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지분이 적다.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짙은 감성을 호소하던 김지우(오른쪽)는 로렌으로 분해 열연하는데, 특히 자신의 솔로 넘버 '연애의 흑역사(History of Wrong Guys)'는 초연 때 정선아의 로렌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나다. 니콜라(왼쪽)는 다소 아쉬운데, <난쟁이들>의 백설공주로 무대를 휘저었던 신의정 배우의 끼가 다 발산되기에 니콜라의 분량이 부족하다. 솔로 파트라도 하나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터인데….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돈 심재현(왼쪽)과 고창석(오른쪽)은 돈 역에 캐스팅된 배우들이다. 돈은 전형적인 남성성,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끊임없이 롤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이지만, 권투 시합 이후의 변화 그리고 마지막에 직접 킹키부츠를 신고 밀라노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의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편견을 주변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깨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엔젤들 <킹키부츠>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인 엔젤들. 앙상블이면서 댄서인 이들은 존재 자체로 무대에서 가장 강렬한 포인트를 찍는다. ⓒ 곽우신


다른 역할들에 비해 주인공 찰리가 살짝 아쉽지만, 이지훈이나 김호영 두 배우 모두 자신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기념비적인 도전을 수행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 일단 첫 시도치고는 선전하는 모양새이다. 특히 이지훈의 '스텝 원(Step One)'과 김호영의 '소울 오브 어 맨(The Soul of a Man)'이 이미 강한 흡입력을 뿜어내는 점에서 발전 가능성도 엿보인다. 초연 때 찰리를 맡은 배우 김무열이 개막과 폐막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던 것처럼 갈수록 나아지기를 바라본다.

여기에 화려한 조명과 눈을 사로잡는 의상이 더해진다. 쇼 뮤지컬의 교범이라고 할 만한 <킹키부츠>는, 쇼 뮤지컬의 기본에 충실하다. 보는 재미를 강조하여 관객의 시각적인 부분을 극한까지 만족시킨다. 듣는 재미는 또 어떤가. 초연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익히 알듯이, 신디 로퍼의 작업물은 굉장하다. 한 곡 한 곡 모두 훌륭하지만,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넘버(음악)의 배치가 특히 도드라진다. 재미와 감동의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다가 어느새 눈가를 훔치게 한다. 배우와 관객이 함께 춤출 수 있는 커튼콜도 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한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섹스 이즈 인 더 힐(Sex is in the Heel) 아름다운 남자, 예쁜 남자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롤라와 엔젤들. 페미니즘이 구원하는 건 여자만이 아니다. ⓒ 곽우신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점은, 이 모든 요소가 묵직한 메시지와 흥미로운 서사에 잘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노래만 듣기 좋거나, 엉망인 극을 살려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에게 연민이 가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은 <킹키부츠>라는 이름 아래에 완결성 있는 꼴을 잘 갖추고 있다. 노동자(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나라 영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종종 볼 수 있는(<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려 보라), 현실 고발과 노동 가치의 존중을 저변에 깔았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유달리 부족한 부분 없이 탄탄하게 흘러가는 이 극에서 무엇보다 눈이 가는 건, '남자다움'에 대한 편견을 벗고 '나다움'을 찾아 나가는 주인공의 갈등과 화해이다. 사실 세상이 정한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 말 자체가 과연 온당한 조어인지 물음표가 붙지만, 사회가 정한 그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관계없다. 남자다운 여자이든, 여자다운 남자이든 중요한 건 그 '다움' 앞에 '나'가 붙을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니까.

누구도 나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할 수는 없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완성된 킹키부츠 표준 남성의 몸무게를 지탱할 정도로 튼튼하면서, 매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꾸며줄 수 있는 아이템. 킹키부츠는 드래그 퀸을 위한 맞춤형 패션 아이템이다. 누구나 '나다움'을 찾기 위해서는, 그 나다움을 잘 표현하기 위한 나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모두가 똑같이 따라하는, 기성 사회가 강요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 곽우신


하지만 사회는 각자에게 존재하는 나다움의 개성보다는, 통념에 걸맞은 인간을 요구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남자다움도 마찬가지이다. '어디 가서 맞느니 차라리 때려라'라든가 '남자는 우는 거 아니다'라든가와 같은. 물론 이런 잔소리에 단순히 자식을 통한 욕망의 대리 실현만 포함된 건 아니다. 굳이 모나게 현실의 풍파를 겪느니, 둥글둥글하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길을 따라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어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그저 다수가 걷는 길을 따라, 별다른 감흥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행복할까. 그런 모습을 보는 우리의 부모는 정녕 만족해할까.

누구도 우리의 인생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 '누구도'에는 가족도 포함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거친 세상의 가시밭길에 발이 다치지 않도록 튼튼한 구두를 신겨주는 것뿐이다. 그 구두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내 인생을 걸어나갈지는, 내가 결정할 뿐이다.

찰리와 롤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어떻게든 이 시골을 벗어나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찰리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공장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자신이 '프라이스 앤 선'의 사장이 될 것이라 상상치 못했던 그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떠밀려진 이 책임을 억지로 수행하느라 버둥거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신의 구두 끝이 정말로 이 공장을 향하고 있었음을. 어렸을 적 보아왔던 가족들(노동자)과 함께 이 일터이자 삶터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아름답고 위대한 신발을 만드는 것. 그게 그의 꿈이자 열정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버지의 유지를 이으려 노력하던 찰리는, 아버지가 자신(찰리)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고 공장을 팔려고 했었던 사실을 안 후에도 밀라노에 가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찰리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프라이스 앤 선 공장으로 돌아왔고, 이 구두 공장을 훌륭하게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소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롤라는 아버지의 소원과는 달리 권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드래그 퀸으로 남았고, 브래지어와 하이힐을 한 채 노래를 부른다. 프라이스 앤 선 공장의 디자이너가 된 후에도 그는 힐을 신고 스카프를 두른다. '정상적인' 남자 옷을 입은 사이먼일 때 그는 부끄럽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힐과 드레스만 있다면 누구든 무릎 꿇릴 수 있는 넘치는 자존감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남자답지 못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던 아버지와의 연은 끊긴다. 아들과의 연은 끊으면서 담배는 끊지 못해 요양병원에 가 있는 아버지를, 롤라는 계속 원망하고 있다.

요양원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롤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찰리는 말한다. 만약 남자다움이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뜻하는 것이라면, 세상 전체와 맞서 싸우는 롤라만큼 남자다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남자다운 게 아니다. 롤라다운 것이었다. 휠체어 앉아 있는 아버지 앞에 누구보다 슬프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그.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아버지 앞에 노래하는 아들 <킹키부츠>의 장점 중 하나는, 아들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아버지들을 그저 파괴하고 싸워야 할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는 것이다.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법 그리고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킹키부츠>는 이야기 한다. ⓒ 곽우신


"그대 이제 날 잊나요. 내 얼굴 보기조차 싫겠죠. 춤추는 내 모습도, 행복한 목소리도 더 이상 의미 없어. 모르죠, 진짜 내 모습을. 가장 거짓 없고 진실한 나. 하지만 이 순간 난 네 옆에 서있어. 이대로 그대 마음속에 새겨줘, 나를. 이해해줘요, 이 모습 그대로. 놓지 마. 날 포기하지 마, 나를.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줘도, 우린 서로가 너무도 소중한 걸. 그대 마음속에 새겨줘, 나를. 날 받아줘요. 이 모습 그대로." - 뮤지컬 <킹키부츠> 2막 No.15 '그대 맘 속에 나를 새겨줘(Hold me in Your Heart)' 중에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롤라. 노래를 마친 후 이별 인사를 하고 나오는 롤라의 손을 아버지는 꼭 부여잡는다. 그건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교차하는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대사 없이 잠시간 흐르는 그 정적이 묵직하다. 찰리와 롤라의 다른 선택은 같은 곳으로 귀결된다. 내가 가고 싶은 길, 나다움을 찾아 나섰던 그 길로.

찰리의 아버지도, 롤라의 아버지도 사실은 자신의 아들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만 아들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 걸어가는 길이, 그 행복에 닿기도 전에 지나친 불행을 감내해야 할까 봐 나무라고 말렸다. 하지만 두 아들이 그 길의 끝에 결국 손에 '나다움'을 쥐었을 때, 누구보다 축하하고 안아주는 것 역시 이 아버지들이었다. 극의 마지막, 찰리와 롤라의 어렸을 적 모습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각자의 아버지 품에 안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가슴에 안았다.

연휴 동안 학업, 취업, 결혼 등에 관한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데 지친 당신이라면, 이 뮤지컬이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 세상 풍파 앞에 맞서려는 자녀에 대한 걱정이 지나친 부모라면,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를 거스르고 나만의 길을 찾기를 주저하는 자녀라면, 그래서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준 사이라면 더더욱.

만약 그런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함께 손을 잡고 이 작품을 보기를 추천한다. 블루스퀘어를 나오는 가족의 손은 찰리와 롤라, 그리고 두 아버지들이 서로를 안았던 것처럼 뜨거우리라. 뮤지컬 <킹키부츠>의 마지막 넘버는 '저스트 비(Just Be)'라고 외친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밀라노 패션쇼 그리고 화해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지난 2일 개막한 <킹키부츠>는 오는 11월 13일까지 상연된다. 극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 넘버부터 커튼콜까지 이어지는 그 '흥'은 관객을 일어설 수밖에 없게 한다. 보고 듣는 재미와 메시지를 잘 버무린 <킹키부츠>를 놓치지 말자.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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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가 부끄러워 할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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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의 장점이 뭐였을까. 글자들의 움직임을 잘 보여주는 영상, 적재적소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조명,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배치된 매혹적인 프레임, 돌출된 무대 뒤로 형상화된 이질적 날개까지 외적으로 꽤 충실했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피트 지휘석에서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그 뒷모습만 봐도 반할 것 같은 김성수 음악감독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유감없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에릭 울프슨의 원곡을 편곡한 넘버도 그렇고, 그가 새롭게 쓴 곡들도 하나같이 마스터피스(특히 '갈가마귀'는 기립박수 받아 마땅하다)라 할 만한 근래 듣기 드문 결과물이었다.에드거 앨런 포를 맡은 세 배우(마이클리, 김동완, 최재림)와 그리스월드를 맡은 세 배우(최수형, 정상윤, 윤형렬) 각각의 매력은 이 선율 위에서 춤을 췄다. 아홉 가지 조합으로 각각 다른 색깔을 뽐냈던 이들은 혼신의 연기와 노래로 빛을 발했다. 덕분에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는 마니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난 7월 24일 막을 내렸다. 그리고 성원에 힘입어 오는 13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콘서트를 연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음악적 완성도와 배우의 역량이 궁금하다면, 아마 13일 콘서트가 최적의 현장일 것이다.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인기를 끈 건 결코 이 작품이 '괜찮은 극'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귀를 즐겁게 하는 넘버 뒤에 숨어 있을 뿐, 극적으로만 봤을 때 이 작품은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음악적 완성도는 훌륭한데... 한 인물의 일대기를 표현한 뮤지컬의 성공과 실패는, 그 작품이 주인공 인물과 얼마나 닮았는지, 그를 얼마나 극 안에 담았는지, 하여 그 인물'다운' 극이 되었는지에 달려있다. 예컨대 <마타하리>는 주체적인 여성 '마타하리'와 거리가 너무 먼,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수동적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로빈 후드>에는 숲에서 혁명을 꿈꾸고, 권력과 구조를 조롱한 민중의 영웅 '로빈 후드'가 없었다. 그저 정통 계승권을 가진 왕자에게 왕위를 돌려주려는, 충직한 신민만이 남았다. 반면 <빈센트 반 고흐>는 작품 전체가 그림으로 구원받고 싶어 했던 불운한 화가 '고흐'와 닮았고, <윤동주, 달을 쏘다>는 그 작품 안에 고뇌하는 지식인 윤동주가 담겨 동주다운 아우라를 뽐냈다.그런데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는 전혀 '에드거 앨런 포'답지 않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할 정도로 실험적이고 기괴하면서도, 단순한 음산함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흥미를 자극하는 깊이가 있다. 신선하고 생경하면서도 읽다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이 있었다. 대체로 천재는 시대로부터 외면받는다. 시대는 그를 품지 못했고, 천재는 자신을 거부하려는 세계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한다. 개인과 세계의 싸움이라는, 패배가 예정된 전투이지만 천재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맞부딪힌다. 결과적으로 그가 파멸하고 사라질지라도, 인류 전체의 유산이 되어 후대에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세계와의 싸움에서 천재는 작은 진일보를 이루고, 그 진보들이 쌓여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한다.에드거 앨런 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추구했던 문학은 당시 미국 주류 문학과 궤를 달리하는 사조였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는 평범을 거부했고, 죽음과 인간의 어둠에 천착했다. 인간의 밝은 면만이 낭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기괴한 면 역시 낭만적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인간의 어두운 단면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똑바로 마주하며 이를 극복하고 고양하려 했다.도덕적 교훈에 매달리지도 않고, 주류 문학계의 관습을 비판하며 날을 세우던 그는 적이 많았다. 극 중 그리스월드로 대표되는 미국 문학계의 기득권은 그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불운했던 삶은 포가 지속해서 글을 쓸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매의 날개를 달고 저 태양 높이까지 날아오르고 싶었던 갈까마귀, 에드거 앨런 포는 이카로스처럼 결국 추락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는 문장들 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뜻을 품었고, 인류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도 그랬어야 했다. 그가 "허세 가득한 사랑 얘기" 대신 손에 쥐고 싶었던 "천상의 성배"가 뭔지 나와야 했다. 포가 매의 날개를 달고 닿고 싶었던 그 끝은 대체 무엇이며, 불멸의 작품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고,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지 묘사되어야 했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지속해서 그를 나락으로 빠트리려는 세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에 진정성을 느끼게끔 해야 했다. 거대한 흐름과 맞서서 자신의 모든 걸 거는 그 숭고미도 함께. 그러나 정작 이 작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비범하고 독특한 시인의 이야기로 만든 뮤지컬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전형적이며, 그나마도 별로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보고 듣는 데 치중하다가 극의 메시지나 이야기를 놓치는 게 우선 그렇다. 1막 내내 고조되며 기대감을 품게 하던 분위기가, 2막부터 급전직하식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것도 그렇다. "그저 지나치듯 한 번쯤" 볼 만한, "선을 넘으려는 수많은" 뮤지컬 중 하나일 뿐이 되어버렸다. 작품의 완성도는 음악적 완성도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OST는 사고 싶지만, 내 돈 주고 재연을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은 뮤지컬계에 이미 여럿 된다.여성은 소비되고, 극의 개연성은 없고 세부적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우선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국내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형편없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여성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포의 첫사랑 엘마이라, 포의 사촌이자 그가 결혼하는 버지니아, 포가 어렸을 때 사망한 어머니 엘리자베스. 이 세 인물은 다분히 평면적인 데다가 지나치게 도구적이며, 잠깐 소비되고 버려진다. 세 여성 인물의 분량은 모두 합해도 어지간한 극 중 한 명의 보통 캐릭터에도 못 미칠 정도인 데다가, 그 작은 분량 안에서 나름의 존재감이나 비중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예컨대 <레미제라블> 판틴의 경우, 분량은 작지만 그 비중이 작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중량감 있는 캐릭터이다) 포는 기억도 거의 없는 엘리자베스에게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녀는 딱 두 번 등장하는데, 포가 지쳤을 때 위로하는 장면 한 번, 그리고 포가 죽을 때 안고서 저세상으로 데려가는 장면 하나. (그러니까 1막에 한 번, 2막에 한 번이다) 왜 포의 정신세계에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중요한지 알 수 없다. 포는 대체 엘마이라를 왜 사랑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 엘마이라는 단순한 대사 몇 마디로 쉽게 떠나버린다. 포의 사랑은 왜 갑자기 또 버지니아에게로 향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 그나마 버지니아는 '죽기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이다.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후, 엘리자베스 묘비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포에게 사라졌던 엘마이라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결과적으로 버지니아는 포를 다시 엘마이라에게 맺어주기 위해 죽었나 보다) 묘비 앞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포와 엘마이라는 보고 있노라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멍해지다가, 엘마이라 덕분에 희망을 얻은 포가 바로 그다음 장면에서 어이없게 무너지는 걸 보면 화가 날 지경이다. 물론, 이 정도로 홀대받는 캐릭터를 위해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배우들의 면면을 볼 때부터 화가 났지만. (이 세 인물을 위해 캐스팅된 배우들의 라인업은 얼마나 훌륭한가!)극의 개연성은 심각하게 부족하다. 포의 천재성과 포의 불우했던 환경을 함께 보여주고자 했지만, 그 가운데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예컨대 그는 아무런 뒷배경 없이도 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으로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리스월드의 방해 속에서도 시 한 편만으로 현장을 장악하는 천재였다. 그런데 펜 한 자루로 문학계 전체를 들었다 놨다 했던 천재가 갑자기 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독창적이라 당시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건지, 술과 약물에 취해 기량이 떨어진 건지, 문학계 권력이었던 그리스월드의 지속적 방해 때문인지 그냥 관객이 마음에 드는 걸 스스로 골라잡아서 상상해야 한다.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부분은 너무 곁다리로 흘러가 버린다)왜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지는지, 결과적으로 그리스월드가 왜 실패했는지도 상상에 의지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월드가 죽은 포 앞에서 그의 작품을 영원히 잊히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냥 생각을 중단하고 노래만 듣자는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반면, 머릿속에 한 번 물음표가 생기면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 탓에 끝까지 찜찜하다.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는 개별 사건들을 성기게 엮다 보니 따라가기가 어렵다. 극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미완성의 극을 배우들이 스스로 갈아넣고 채워넣는 건, 그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낼 일이지, 작품을 칭찬할 일은 절대 아니다. 라이선스 작품이기에 국내 제작진이 건드릴 수 있는 부분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거 앨런 포>는 훨씬 더 잘 만들어야 하는, 그리고 더 잘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서사 안에서 더 빛을 발해야 하는 넘버가, 오히려 따로 떼어서 들었을 때 더 감동적이라면 심각한 거다. 대미를 장식하는 '영원'은 분명 훌륭한 노래이지만, 별 감흥 없이 흩어지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그래도 기대를 품자면, <에드거 앨런 포>만의 매력 포인트는 리드에서 상술했던 것처럼 확실히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욕하는 나도, 음악과 배우의 힘으로 여러 번 티켓팅해서 봤으니 말이다. 함량 미달의 결정체였던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초연 프리뷰에서 본 공연 그리고 재연으로 오면서 조금씩 나아지지 않았나. <에드거 앨런 포>도 재연에서는 더욱 나아지리라 믿는다.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가 최소한 '에드거 앨런 포'에게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테니.

김준수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안 뻔(Fun)한 티켓북] 김준수의 팬만 환호할 괴작,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다른 얘기 하나. <빅뱅 메이드>라는 영화가 있다. 10주년을 맞은 아이돌 '빅뱅'의 월드투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관련 기사 : 10년차 빅뱅이라면, 좀 다를 줄 알았다) 이 영화를 영화적 완성도로만 평가하면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서사가 딱히 없다보니 집중하기 어렵고,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각자의 목소리가 잘 엮이지 않아 깊이가 얕다. 하지만 빅뱅의 팬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콘서트 실황 영상도 훌륭한데, 중간중간 자유롭게 나와서 무대 뒤의 일상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이들의 모습까지 곁들여지니 팬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또 다른 얘기 하나. 2013년에 있었던 MBC <무한도전> '응원' 특집을 기억하는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응원단과 함께 <무한도전> 멤버들은 응원 구호와 동작을 땀 흘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정기전에 직접 무대 위에 올라 양교의 학생들과 함께 호흡했다. 학생시절, 모교가 지상파 예능의 소재가 되어 몇 주간 전파를 타니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유재석과 함께 내가 언제 "필승 전승 압승"을 외쳐보겠는가. 그러나 이 응원 특집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노잼' 특집이었다. 이후 더 큰 국민적 축제에도 함께하려고 했던 이 장기 프로젝트는 결국 2013 고연전(홀수해의 정식 명칭은 고연전, 짝수해는 연고전이다)을 끝으로 중단됐다.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웃음을 줘야 하는 공중파 예능에서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는 소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고, 이를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양교의 학생들은 '민족의 아리아'와 '원시림'을 부르며 환호를 보냈지만(나를 포함해), 예능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분명 아쉬움이 많은 기획이었다.<빅뱅 메이드>와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비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전자는 과오가 작고 후자는 크다. <빅뱅 메이드>는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빅뱅이라는 아이돌과 이들을 오랫동안 응원해 온 팬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다. 빅뱅과 VIP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빅뱅의 팬이 아닌 사람이 보고서 "빅뱅 팬만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이네"라고 비판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다.반면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다르다. 학벌 구조 피라미드의 정점에 속하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이 두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혹은 뒀던) 학생들만 열광하고 이 두 학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기는 어려운 문화가 공중파를 탔다. 일종의 공공재 개념이 포함된 지상파에서, 특정한 사람들만 희열을 느낄 내용을 구성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물론, 그 특수성을 모두가 함께 웃고 즐기며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으로 연결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시 특집은 실패했다. 오랫동안 <무한도전>을 사랑한 팬들 입장에서는 왜, 내가 사랑하는 저 남자 연예인들이 응원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슬링 특집에서 그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감동하며 울었던 시청자들이지만, 응원 특집에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다.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빅뱅 메이드>처럼 김준수의 팬들만을 위한 뮤지컬이었으면 모를까, 아니면 김준수의 콘서트 내에 한 꼭지로 삽입된 연출이었다면 모를까. 연극·뮤지컬 장르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불협화음이 된 비빔밥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도리안 그레이>의 면면은 훌륭하다. 이지나 연출이 추구했던 미장센은 매혹적으로 무대 위에 구현됐다. 김문정 음악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넘버들은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탄탄하다. 조용신 작가가 선택하고 다듬은 어휘들은 그 선율 위에 유기적으로 붙어서 철학적 메시지와 시적 운율을 동시에 붙잡으려 한다.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모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자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 넣는다.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였을 때, 엄청난 무게감으로 충돌하는 웅장하고 거대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이 조합에서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각 요소는 훌륭한데 한 데 모아놓고 보니 별로인 극은 안 그래도 우리 뮤지컬 시장에 많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극 중에서도 <도리안 그레이>는 정점에 속하는 극이다. 이천 쌀로 지은 밥에 값비싼 로브스타와 횡성 한우를 얹은 뒤 덜 익은 김칫국물을 부어서 비벼버린 느낌이랄까.특히 원작과는 다른 모호한 결말은 이 극이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의심케 한다. 극단적 탐미주의의 추락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우리를 옥죄는 도덕과 관습이 여전히 인간이 더 아름다운 존재로 비상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작품 전체가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유미주의인 건지.<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타락해가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 잘생기고 아름다웠던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화가 배질은 도리안의 초상화를 일생의 작업으로 생각하여 완성한다. 그리고 헨리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헨리는 도리안에게서 바로 그 가능성을 엿본다. 도덕이라는 룰을 깨야 인간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도리안을 죄의식 없는 존재로 만들려 한다.도리안이 자유로워질수록, 도리안의 영혼을 담았던 초상화는 점점 추하게 일그러진다. 헨리는 결국 도리안이 초인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도리안 역시 파멸하고 만다. 배질은 도리안의 타락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실패한 건 이 세 남자만이 아니다. 제작진도 이 이야기가 파멸로 좌초하는 걸 막는 데 실패했다.조용신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계급적인 문제를 논하는 극이 많은데 그 외의 이야기도 표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계급의 문제를 고발하는 뮤지컬 작품이 과연 국내에 많은지는 의아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충분히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더 다양한 소재, 더 다양한 메시지를 장르 안에서 소화해야만, 그 장르 자체가 보다 넓어지고 성장한다.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주제의식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 건 박수 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 결과물이 목적에 위배될 뿐이다.강 대 강으로 충돌하는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는 하나하나 무겁다. 곱씹으며 소화시켜야 하는데 이 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소화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명언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가슴에 닿지 못하고 무대 위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대사는 현학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나중에는 결국, 저들이 왜 그토록 싸우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배질은 왜 그토록 기존의 전통과 도덕에 얽매여 있는가. 헨리는 왜 그토록 그 틀을 깨고 인간을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 그 실험대상은 왜 도리안이었으며, 도리안을 통해서 헨리는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배질은, 그런 헨리를 막아서고 죽는 순간까지 도리안의 회심을 믿었던 걸까. 그래서 도리안은 결국, 무엇이 되었던 걸까. 인간인가 혹은 괴물인가. 작품 속 세계는 퇴폐적이다. 세기가 바뀌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은 이전에 신의 영역으로 치부했던 자리를 조금씩 넘보기 시작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도덕은 지배자들이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장하고 재생산한 문화이다. 정치권력 혹은 종교권력이 세상에 군림할 때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족쇄를 부수고 도덕의 경계선에서 예술의 영토를 확장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 <도리안 그레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의 인간 해방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냥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만이 돌아다닐 뿐 어디에도 인간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다. 시대적 고민도, 철학적 성찰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도 담지 못했다.기자간담회에서 니체의 초인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감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있는가. 무엇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는가. 무엇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규정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 초인이라는 그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과 생경함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선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원작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보다도 지루했다. 감정이입이 안 되는 채로 인물들은 논쟁만 하고, 주인공은 점점 타락하는데 그 서사가 딱히 치밀하지도 않다. 그러니 시계만 볼 수밖에.잘못된 김준수 사용법 "김준수는 까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동료 기자가 했다. 동의한다. 김준수의 잘못은 아니다. 김준수라는 배우가 '하드 캐리'하는 이 극은 김준수를 빼면 별로 볼 게 없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그 김준수 때문에 극이 망가져 버렸다.김준수가 노래한다. 김준수가 춤을 추고, 김준수가 연기를 한다. 김준수가 키스를 하고, 김준수가 잠자리를 갖는다. 김준수가 땀을 흘리고, 김준수가 눈물도 흘린다. 김준수가 잘하는 것, 김준수가 할 줄 아는 것, 김준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극에 쏟아 부어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과용된 김준수가 극을 망쳐버렸다. 저 배우가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토드(죽음)로 분해 나에게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던 그 배우가 맞는지 눈과 귀가 의심스러웠다. 특히 1막 마지막 곡에서 보여준 안무는, 김준수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재확인해줄 뿐 별다른 감흥이 없다. 전체 작품의 톤에서 튀기만 할 뿐이다.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리면 냄새도 맡기 싫어진다. 아무리 맛있는 양념이어도 정량을 초과하면 음식 전체를 해친다. 김준수라는 좋은 재료를, <도리안 그레이>는 과용했다. 굳이 김준수의 모든 것을 무대 위에 보여줄 필요는 없다. 김준수라는 배우는 그 분량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빛난다. 그런데 선장도 김준수, 1등 항해사도 김준수, 갑판장도 김준수, 측량사도 김준수를 세워놨다. 배가 제대로 순항할 수 있을리가 없다. <도리안 그레이>는 본래 헨리와 배질의 사상적 갈등과 논쟁이 극의 중심을 잡았어야 했다. 헨리와 배질은 어느 한쪽도 손쉽게 택할 수 없는 인류의 오랜 갈등을 대변한다. 르네상스의 태동도 그랬고, 휴머니즘의 발아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김준수 보여주기에 치중하다보니, 이 논쟁은 그냥 감정싸움이 된다. 악역이 아님에도 헨리는 마냥 나쁜 사람 같고, 배질은 그저 지나치게 착하기만 한 도덕주의자이다. 그토록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김준수인데, 그가 연기하는 도리안 그레이는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연기력이나 가창력의 문제가 아니다. 타락한 도리안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으니. 하지만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를 시키고, 감동하게 하고, 객석에 앉은 관객을 (김준수의 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리안 그레이라는 청년의 그릇된 욕망과 불행에 투영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가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는 표현이 충분치 않았다. 왜 그토록 늙기 싫어하는지,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하는지조차도. 정작 설명되어야할 부분인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망가져가는 게 별로 안타깝지 않다.오로지 김준수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이 작품을 과연 완성된 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리뷰에서도 쓴 문장이지만, 극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배우가 오든 다른 배우가 오든 극은 극대로 존재해야 한다. 배우라는 선원들의 조합에 따라 다른 매력을 뽐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배우가 아니면 출항할 수 없는 배라면, 애초에 설계도부터 잘못 그린 거다.예전에 한 말 한 번 더, 없는 개연성을 배우의 열연으로 채워넣는 건 배우가 박수받을 일이지만, 극이 칭찬받을 일은 결코 아니다. 김준수뿐만이 아니다. 박은태·최재웅처럼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열연하며 어떻게 어떻게 메워보려고 하지만 말끔하게 가리기엔 이미 이 배의 구멍이 너무 크다. 김준수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게 다이다. 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이 그릇된 유미주의적 극은, 그 극단적 '미'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추하게 변해버린 도리안 초상화와 꼭 닮은 모양새로 망가진다. 그리하여 끝내,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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