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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여신'이 이끄는 장수밴드 자우림

[응답하라 1990년대] 20년 넘게 명맥 유지하고 있는 국내 최장수 밴드

20.11.22 13:39최종업데이트20.11.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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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와 강남,이태원 등을 중심으로 발전한 클럽은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이성과의 만남을 노리는 유흥업소로 굳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클럽은 간단한 음료나 주류를 즐기며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공연을 감상하는 라이브 클럽을 의미했다. 하지만 힙합의 유행과 함께 실제 연주를 하는 밴드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고 현재 라이브 클럽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굳이 들국화,시나위,백두산,부활 등이 활동하던 80년대까지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록은 꽤 많은 마니아들을 보유한 '주류음악'이었다. 실제로 고 신해철이라는 걸출한 뮤지션이 이끌던 N.EX.T를 중심으로 홍대 라이브 클럽의 양대산맥이었던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기존의 하드록 밴드들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모던록을 추구하던 델리스파이스 등 걸출한 록밴드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당시 록음악을 주도하던 밴드 멤버들은 대부분 남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강렬한 사운드의 록음악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90년대 후반, 매우 여성적인 보컬을 전면에 내세운 밴드가 등장해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활동하며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바로 '록의 여신' 김윤아가 이끄는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자우림이다.

여성로커에 대한 선입견을 깨준 '록의 여신' 김윤아
 

자우림은 데뷔 앨범부터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들을 가득 담았다. ⓒ 코너스톤

 
물론 자우림이 등장하기 전에도 가요계에 여성 로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여성성을 애써 감추고 '내 록스피릿도 남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아'라고 외치듯 남성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주력했다. 물론 그들의 용기 있는 도전은 그 자체로도 많은 의미가 있었지만 그 시절의 대중들에게 썩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도원경은 1993년 <성냥갑 속 내 젊음아>라는 반항적인 노래로 데뷔했지만 대중들의 기억에 남은 그녀의 최고 히트곡은 애절한 발라드 <다시 사랑한다면>이다. N.EX.T의 베이시스트 김영석이 프로듀싱한 2인조 여성밴드 미스미스터는 목소리만 들으면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역시 타이틀곡 <널 차버리겠어>보다 발라드 <널 위한거야>가 훨씬 큰 사랑을 받았다. 삭발머리로 데뷔했던 리아도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1997년 영화 <꽃을 든 남자>의 OST에 참여하며 데뷔한 자우림은 달랐다. 자우림은 홍대 클럽에서 '미운 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인디밴드였다(밴드 이름을 바꾼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당시 청춘스타였던 김승우와 심혜진, 허준호 등이 출연한 영화 <꽃을 든 남자>는 동명의 화장품 브랜드만을 남기고 쓸쓸히 사라졌지만 자우림이 부른 OST <헤이 헤이 헤이>는 영화의 흥행과 별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 보컬 김윤아의 등장은 당시 '충격', 그 자체였다. 민소매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강한 아이라인, 빨간 입술이 돋보이는 진한 화장, 여기에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김윤아는 마치 '록의 여신'을 형상화한 듯 했다. 김윤아는 선배 로커들이 감추려던 '여성성'을 극대화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기에 깊이가 느껴지는 보컬과 <헤이 헤이 헤이>를 직접 작사, 작곡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자우림은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미 남녀 모두에게 사랑 받는 스타밴드로 떠올랐다. 재미 있는 사실은 팀 내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김윤아가 자우림의 네 멤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라는 점이다. 남자팬들에게는 아리따운 '록의 요정'이 이끄는 팀으로, 여성팬들에게는 남자들의 전유물인 록에 도전하는 '멋진 언니'가 속한 팀으로 자리를 굳힌 자우림은 1997년 11월 정식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대중성과 실험정신이 절묘하게 조화된 자우림 1집
 

▲ 자우림 ⓒ 인터파크 엔터테인먼트

 
김윤아라는 걸출한 셀프 프로듀서를 보유하고 있던 자우림은 강세일이 <밀랍천사>, 이적이 <일탈>의 편곡에 참여했을 뿐 앨범 전곡을 멤버들이 직접 만들었다. 앨범 타이틀은 '자줏빛 심장'이라는 뜻의 'Purple Heart'. 자우림 1집은 그 흔한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연주곡도 없이 12곡의 노래들로 꽉 채워져 있다. 그 중에는 <밀랍천사>와 <파애>, <욕>, <이틀 전에 죽은 그녀와의 채팅은> 등 다소 기묘한 제목의 노래들도 있었다.

하지만 '록의 여신'은 대중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자우림 1집에는 데뷔곡 <헤이 헤이 헤이>가 예고편으로 느껴질 만큼 매력적인 음악들로 가득하다. 충분히 대중적이면서도 자우림 특유의 개성을 잃지 않은 그야말로 '자우림스러운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1집에는 <하하하쏭>, <매직카펫 라이드>와 함께 자우림의 3대 히트곡으로 꼽히는 <일탈>이 들어있다.

이적이 편곡에 참여한 1집 타이틀곡 <일탈>은 김윤아의 변화무쌍한 창법을 통해 '통쾌한 해방감'을 극대화시켰다. 물론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같은 파격적인 가사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대다수 남성팬들은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이라는 가사에 대동단결했다(사실 이 가사 때문에 <일탈>은 사회의 건전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기도 했다).

후속곡 <애인발견!!!>은 평범한 남자들의 로망을 충족시켜 주는 곡이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쿨한 김윤아도 <애인발견!!!>에서는 '나는 너무 약해 네가 날 지켜 줘야 해 지금 이대로 좋은 사람 그대로'라며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연약한 여자가 된다(물론 이것도 고도의 '어장관리'일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일탈>이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서 자우림은 주로 <애인발견!!!>으로 방송활동을 했다.

<일탈>과 타이틀을 놓고 다투기도 했던 <밀랍천사>는 달달한 러브송 같지만 숨쉬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가사 내용을 알고 보면 대단히 으스스한 곡이다. <밀랍천사>의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곡의 모티브가 된 1993년에 개봉했던 영화 <Boxing Helena>(국내 개봉명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때>)를 참고하면 된다. 물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다시 들으면 <밀랍천사>를 1번트랙에 넣은 자우림에게 크게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 밖에 <이틀 전에 죽은 그녀와의 채팅은> 또한 음산한 분위기가 돋보이고 <마론 인형>은 집착이 심한 남자에게 쿨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내용의 노래다. <안녕, 미미>는 2집 타이틀곡 <미안해, 널 미워해>를 예고하는 듯한 처절한 록 발라드곡이다. 대중적으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우림의 단독 공연에서는 자주 들을 수있다.
  
자우림 1집에서 가장 범상치 않은 노래는 <격주코믹스>다. 무쇠근육을 가진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청순가련 섹시걸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만화잡지마다 쏟아져 나오던 천편일률적인 학원 폭력 만화에 일침을 가하는 곡이다. 자우림은 1집 활동 당시 김윤아가 팀 내에서 워낙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당시 공개방송이나 공연장에서는 "우림이 언니 예뻐요"를 외치는 관객이 있었을 정도였다(훗날 '우림이 언니'는 김윤아의 별명이 됐다).

데뷔 후 한 번의 멤버 변화 없는 국내 최장수 밴드
 

90년대 '록의 여신'이었던 김윤아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 올리브TV 화면 캡처

 
자우림은 데뷔 후 11장의 정규 앨범과 11장의 비정규 앨범, 그리고 김윤아의 솔로 프로젝트 4장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의 최장수밴드로 활동했다. 자우림은 1997년 데뷔 후 2017년 드러머 구태훈이 개인사업을 위해 팀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멤버 이동이 없었다. 홀수 앨범은 대중들이 듣기 좋은 가볍고 경쾌한 음악들로 채우고 짝수 앨범은 어둡고 음침하게 만드는 자우림 특유의 음악스타일도 오랜 기간 고수했다.

자우림에게 데뷔 후 끊이지 않고 계속된 논쟁은 바로 '김윤아의 독주'다. 실제로 김윤아는 보컬뿐 아니라 모든 히트곡의 작사∙작곡, 그리고 방송활동을 비롯한 인지도까지 홀로 책임지고 있는 자우림의 '실세'다. 하지만 김윤아는 팀의 막내이자 홍일점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스포트라이트와 시선들을 받아 들였고 결국 음악성과 카리스마, 그리고 미모까지 겸비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뮤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김윤아는 올해로 어느덧 만46세의 중견 가수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고 나머지 멤버들도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지금 우리는 대중음악이 점점 예술적 가치를 잃고 좋은 뮤지션들이 음지로 숨어 '마니아 가수'로 전락하고 있으며 밴드조차 기획사의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20년 넘게 음악적 색깔을 지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자우림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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