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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본 여성이 전범기업 본사에 폭탄 던진 진짜 이유

[리뷰] 다큐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일본 식민지배 청산에 담긴 보편성

20.08.06 19:04최종업데이트20.08.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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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8월 7일 오전 9시 30분]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스틸 이미지 ⓒ 아이 엠(eye m)


지난 2년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재산 압류조치를 무시해왔던 일본제철(신일철주금)과 일본정부가 태도를 다소 바꿨다.

오는 11일 0시까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으면, 압류된 PNR(포스코 부산물자원화법인) 주식을 처분할 수 있게 되자, 이에 제동을 걸고자 일본제철은 압류 결정에 항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야모토 가쓰히로 부사장이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내놨다. 압류 재산의 현금화를 최대한 지연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1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을 강제징용 해놓고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일본제철이 피해자 4인에게 총 4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에 대해 이처럼 무성의하고 파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은 도리어 한국을 나무란다.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와는 무관한데도 '1965년에 다 끝난 문제를 한국이 계속 거론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대응을 편협한 민족주의의 산물로 매도한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 극우세력도 그런 비난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노력을 반일'민족'주의도 아니고 반일'종족'주의라는 표현으로 폄하한다. 작년에 발행한 <반일종족주의> 제13장에서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를 '저열한 정신세계'로 비하했다. 공동 저자인 김용삼 전 <조선일보> 기자도 제14장에서 '저열한 정신문화'라는 표현을 쓰며 비하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의 항일투쟁
 
하지만 한국인들이 편협한 민족감정이나 저열한 반일종족주의 때문에 식민지배 청산을 추진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오는 20일 개봉되는 다큐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속의 반일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東亞反日武裝前線) 조직원들의 항일투쟁이 한국인들의 식민지배 청산 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도록 만든다.
 
한국의 반정부 혹은 반체제 운동에서는 '반한(反韓)' 혹은 '반한국'이란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일본 투사들은 '반일'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투쟁의 객관성 혹은 보편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70년에 반체제 대학 서클로 시작해 1972년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으로 조직화된 이들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에 맞서고자 투쟁 대열에 뛰어들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는 과거의 농업경제 시대에도 있었다. 최대 지주인 왕실이 소수의 대지주들과 합작해 민중에 대한 수탈 내지 착취를 통해 이윤과 조세를 증대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민중을 동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착취 구조는 자본주의 및 그것의 글로벌 확대판인 제국주의 시대에 한층 극명해졌다. 노동 착취의 강도나 침략 범위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간 착취 시스템이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 맞서 싸운 대상은 바로 그 제국주의다.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그 같은 제국주의에 대한 이 조직의 반일 투쟁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영화는 식민지 한국에서만 10만 명 정도를 강제징용하고 공짜 노예노동을 발판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미쓰비시그룹에 대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투쟁을 비춘다. 이 조직은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중공업 도쿄 본사에 폭탄을 터트림으로써 제국주의적 유산에 발을 딛고 경제적 번영을 이어가는 일본 국가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이들이 1974년, 1975년에 공격한 대상은 미쓰비시 외에도 미쓰이 물산, 데이진 중앙연구소, 가지마건설, 하자마구미 등등이다. 이들은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지원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을 부추긴 한국산업경제연구소에 대한 폭파 공격도 감행했다.
 
해방 뒤에 나타난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 역시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배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은 4·19 혁명에 맞춰 1975년 4월 19일 한국산업경제연구소 공격을 단행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은 제2의 이봉창이었다. 1932년에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가 미수에 그친 이봉창처럼,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8월 14일 히로히토의 열차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히로히토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일본에서 벌어지는 인간 착취 구조의 모순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히로히토의 행선지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기에 애당초 성공할 수 없었다. 이때 쓰지 못한 폭탄은 16일 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때 사용됐다.
 
공교롭게도 일왕 암살 실패 다음날인 8월 15일, 한국에서 재일한국인 문세광이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부인 육영수를 실수로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한 한·미·일 삼각 협력체제의 하부 구조에 있는 한·일 착취구조의 정점을 이루는 두 인물에 대한 공격이 하루 간격으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폭탄 공격을 통해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신(新)대동아 공영권을 책동하는 제국주의 침략기업과 식민주의자들은 해외 활동을 멈추라'고 촉구하는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촉구했다.

1970년대 세계사 정세,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스틸 이미지. 1974년 2월호 <정황>에 실린 나다 가즈모토의 '반일투쟁인가 일본혁명인가'라는 기고문. ⓒ 아이 엠(eye m)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투쟁이 1970년대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세계사의 정세 변화와 무관치 않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은 19세기 초반부터 강렬했지만, 20세기 들어 한층 더 강렬해진 것은 이 시기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한편 지도적 자본주의 국가들이 크게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들에 포진한 대자본들의 배후 조종으로 발발한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심화되는 상태에서, 세계 최강 미국이 1960년대 후반에 베트남전쟁의 늪에 빠졌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치고자 저항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1960년대 후반 이후가 절호의 기회였다. 유럽에서 68혁명이 발생하고 일본에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등의 투쟁이 활발해진 것은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이 일시적으로 취약해진 결과였다.
 
하지만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일본 국가를 무너트리지 못했다. 폭탄 공격으로 일본 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래서 그들은 체포되고 수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그렇게 투옥된 사람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동지·가족·후원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들이 못다 한 계획과 비전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그중에서 에키타 유키코(浴田由紀子)의 사연은 관객을 찡하게 만든다. 그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산하 부대인 '대지의 엄니' 부대에서 활동했다. 영화에서는 '대지의 엄니'라는 표현으로 불렸지만,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자면 '대지의 어금니(大地の牙)'로 불려야 한다.
 
'대지의 엄니'에서 활동하다가 25세 때인 1975년에 체포된 에키타 유키코는 석방되자 중동으로 건너가 이번에는 일본 적군파 활동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1995년 체포돼 투옥된 뒤 67세 때인 2017년에야 감옥 문을 나섰다.
 
2017년이면 공안 당국이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더는 경계할 필요가 없을 시점인데도, 일본 정부는 에키타 유키코의 석방 당일에 맞춰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석방 10일 전에 보안이 용이한 다른 감옥으로 그를 이감한 뒤 차량에 태워 석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런데 석방된 유키코는 돌아갈 데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테러리스트'의 귀환을 꺼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지와 후원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그의 모습을 추적한다. 그의 석방 전에도 주택 대문들에 벨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던 유키코는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는 것을 어색해한다. 동행자의 기색을 살핀 뒤에야 벨이라는 물건을 눌러본다.
 
스마트폰은커녕 핸드폰도 별로 없었던 시절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모든 게 다 뒤바뀐 2017년에 60대 후반 나이로 세상에 나온 그가 현실에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관객의 마음에 생길 수도 있다.
 
그들이 투쟁에 나선 것은 바로 그들 자신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독립투사들도 에키타 유키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투쟁을 벌였다. 그들 한국인 독립투사들은 에키타 유키코와 달리 오늘날 자기 나라에서 칭송을 받는다. 한국인 독립투사들을 칭송해줄 민중과 사회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독립투사들과 전혀 다를 바 없지만, 에키타 유키코 등은 자기 나라에서 칭송받기 힘들다. 대자본이 아닌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 시스템이 일본에 등장하지 않는 한, 혹은 한국의 촛불혁명 같은 사건이 일본에서 발생하지 않는 한, 그들은 '뜻은 좋지만 너무 위험한 반사회적 테러리스트'로 기억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들의 가차 없는 투쟁을 보면서 '과격 테러리스트'라는 느낌과 더불어 '양심적인 일본인'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양심' 때문에 투쟁을 벌인 이들이 아니다. 이웃나라 민중을 착취한 동족의 죄악을 양심상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일을 벌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투쟁에 나선 것은 바로 그들 자신 때문이었다. 패망 전에나 후에나, 일본을 이끄는 것은 미쓰비시 같은 소수의 대자본이다. 미국 및 한국의 동맹자들과 제휴한 소수의 일본 대자본은 일본 정부를 앞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률제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용해 일본 민중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더 나아가 한국 등 이웃나라 민중에 대한 착취 역시 국제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그 같은 착취구조에 저항한 것이다. 자신들이 더는 부조리한 착취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자 폭탄을 들었던 것이다. 이웃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투쟁은 일본제국주의 및 그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이 한국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식민지배 청산을 추진하는 한국인들의 투쟁이 편협한 민족주의나 종족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기초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인들이 식민지배 청산을 추진하는 것은 민족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인간 착취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일본 극우와 한국의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한국인들의 반일 투쟁을 저열하고 저급하다고 욕하지만, 그것이 인간 착취에 저항하는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라는 점을 다큐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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