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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 지정생존자' 첫방 1년, 그에 대한 몇 가지 기록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제작기 ①] 기획

20.07.03 15:23최종업데이트20.07.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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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 60일 지정생존자 > 단체 포스터 ⓒ tvN


2019년 8월 10일, 합천 청와대 세트장.
<60일, 지정생존자> 마지막 본 촬영.

박무진이 붉은 중앙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에게 주어진 60일이 끝났다. 1층에서 기다리던 참모진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선다. 잠시 권력을 대리하는 동안 그는 모두와 마음을 나누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한다. 별 다른 말을 보탤 게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마지막회 박무진이 청와대를 떠나는 장면을 촬영했다. 리허설 진행하는데,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다들 민망해하며 놀란다. 진짜 눈물이 나네, 하면서.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 년간의 촬영이 끝나는 날이었으니까. 모두 각자의 주마등으로 지난 시간을 되새긴다. 아직 다른 씬이 남았지만 그 자리의 모두 약간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지진희 선배는 실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밝혀 본다. 그래도, 테이크를 반복할 때마다 매번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다. 그리고 모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다. 무진에게도 촬영팀에게도 시청자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하듯.

안세영 민정수석 역의 이도엽 선배가 촬영이 시작되기 전, 연출자가 무진처럼 계단을 내려오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메이킹에 남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제안은 진지했지만 난 감사드리며 웃고 넘어간다. 그 말씀만으로도, 나는 가장 정중하게 이 사람들과 헤어지는 상상을 한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나의 팀과. 

지난 1일은 <60일, 지정생존자> 첫 방송 1주년이었다. 하지만 같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2020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본다. 더 잊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

1. 기획
 

< 60일 지정생존자 > 타이틀 시안 ⓒ 유종선


돌이켜보면 그 댓글부터였다. 2010년에 친구가 쓴 정치 관련 에세이를 내 블로그에 퍼 온 적이 있다. 정색한 글을 쓰는 친구가 아니었는데, 그 글은 분노와 슬픔을 담아 한국 정치를 근심하는 글이었다. 지나가던 손님이 짧은 댓글을 달았다. 

'정치는 무엇일까요.'

한 번쯤, 이 물음을 파고드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런 씨앗이 그 때 심겼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최근에 했던 정치드라마는 <제5공화국>이었다. 한 20여년이 지나면, KBS대하사극을 방송하는 자리에 2000년대 한국 현대 정치를 재현하는 드라마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급변하는 현실 정치가 많은 이들의 삶에 직접적인 타격과 변화를 가져오던 시절이었다. 나 같은 방송국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스크래치가 남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드라마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2016년 가을, 회사를 옮기면서 하고 싶은 장르 중에 정치 드라마도 있다고 스튜디오 드래곤에 이야기했다. 모 작가님으로부터 당시 10회까지 나왔던 미드 <지정생존자>를 추천받아 본 직후였다. 예를 들었다. <웨스트윙>, <하우스 오브 카드> 등의 드라마도 훌륭하지만 <지정생존자>처럼 거대한 사건의 뼈대 위에서 정치 상황을 접목하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고. 가진 건 포부밖에 없는 얘기였다. 얼마 후, 아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반갑기도, 감사하기도, 조금 부담스럽기도 한 얘기였다. 아무래도 <지정생존자>는 미국 이야기인데, 한국 상황에 잘 녹아들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던 정치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흥미로웠다. 당시 한국 사회는 탄핵 후 대행 체제를 거치는 중이었다. <지정생존자>를 가져온다고 해도, 한국에선 대통령이 되는 대신 60일의 대행 체제를 통해 대선을 치러야 한다. 그 60일의 대행 기간이 한국 현대 정치사의 은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이 아무리 빼어나더라도, 한미 헌법의 차이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꽤 뛰어난 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리지널 스토리로 만드는 드라마 이상으로 더 열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톰 커크먼이 아닌 한 사내가 떠올랐다. 갑자기 최고 권력으로 떠밀린 사람이. 그리고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오히려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한 남자가. 

우리는 권력자가 권력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 봉사로써 대해주길 바란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권력의 자리까지 가려면 권력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내세워야 한다. 뽑히기 싫다는 사람을 뽑아줄 국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권력 의지가 권력욕으로 변질되면, 획득한 권력을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쓰게될 위험이 커진다. 반면 권력을 책무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를 기어코 자신만이 해내야할 이유나 의지를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 좋은 권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서 권력자가 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국회 의사당 폭파와 60일의 대행 기간은 현실 정치의 아이러니를 돌파하는 판타지적 설정이었다. 권력이라는 복잡하고 무거운 책무를 질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모두의 불신 속에 권력을 대행하기 시작하지만,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정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면? 

그 생각에 동의해준 분이 김태희 작가님이었다. 그렇게 정치 리셋 판타지, <60일, 지정생존자>는 출발했다. 2017년 2월이었다. 탄핵이 인용되기 전이었다. 탄핵이 정말 인용될지, 누가 대통령이 될지, 한국 대통령과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날지, 감동적이었던 유화 국면 끝에 다시금 남북 관계가 경색이 될지, 볼턴의 자서전으로 또 반전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었던 시점이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연출자입니다. 이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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