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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첫 장면에 나온 날짜...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 1917 > 할아버지한테 듣는 옛날 이야기

20.02.22 16:46최종업데이트20.02.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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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 > 포스터 ⓒ (주)스마일이엔티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쟁탈전이었다. 미국과 일본도 중간에 가세하긴 했지만, 이 대전의 본질은 영국·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도전이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은 기존 규칙 하에서는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을 제치기 힘들었다. 그래서 판을 깨고 신질서를 창출하고자 제1차 대전을 도발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유럽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과 동쪽을 동시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서부전선의 프랑스를 신속히 제압한 뒤 동부전선 너머의 러시아를 제압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개전 2개월 만인 1914년 9월부터 전쟁은 오랜 교착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기동성을 바탕으로 서쪽을 친 뒤 동쪽을 치려던 애초의 의도와 달리, 땅 속에 참호를 깊숙이 파고 지구전을 벌이는 장기전 양상이 출현하게 됐다.
 
이 같은 참호전은 전쟁을 끔찍하고 참혹한 양상으로 이끌어갔다. 저 멀리 참호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적군을 제압하자면, 일반적인 무기로는 힘들었다. 그래서 대량살상용 신무기들을 사용하다 보니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91년에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전략개론>은 "참호전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장기 소모전화되자, 이를 타개하고 돌파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신무기가 등장하게 되었다"면서 "이 당시 무기의 변화로는 무엇보다 기관총의 경량화와 전차의 출현을 비롯하여 독가스, 박격포, 총류탄, 화염방사기 등의 출현을 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총류탄은 유탄을 말한다.
 

영화 < 1917 > 스틸컷 ⓒ 드림웍스픽쳐스

 
참호전과 신무기로 인해 참혹하고 끔찍해지다 보니, 제1차 대전은 참전국 숫자뿐 아니라 전사자 규모에서도 신기원을 이루게 됐다. 1천만 명 이상이 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처참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지난 19일 국내에서 개봉됐다. 영화 < 1917 >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9일 아카데미 감독상 시상식 때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아이리시맨>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 뒤 "같이 후보에 오른 샘 멘데스 감독, 토드 감독도 모두 제가 좋아하는 감독들인데, 오스카가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다섯 조각으로 나눠 이들과 모두 나누고 싶은 심정"이라고 소감을 표했다. 오스카가 허락했다면 감독상 트로피의 5분의 1을 떼어 가졌을 수도 있는 샘 멘데스가 < 1917 >의 감독이다.
 
< 1917 >은 독일군과 대치하던 중에 잠시 참호 위 들판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던 두 영국 병사가 갑자기 특명을 받는 첫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8대대 소속의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 일병과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 분) 일병이 바로 그들이다. 두 병사는 사령관인 에린모어(콜린 퍼스 분) 장군의 호출을 받고 급히 불려간다.
 
참호로 내려간 두 병사는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며 한쪽 끝의 굴 속으로 들어간다. 어둠침침한 데서 지도를 펴놓고 있던 에린모어는 "누가 블레이크이지?"라며 "데번셔연대 2대대에 형이 있나?"라고 묻는다. 블레이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에린모어는 블레이크의 형을 포함한 영국군 1600명을 구출하기 위한 특명을 내린다.
 
인근 지역에서 참호를 파고 대치하던 독일군이 갑자기 철수하자, 데번셔 연대 2대대장인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독일군을 추격해 섬멸하겠다며 다음날 일출 직후에 공격을 개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린모어의 특명은 일출 직전까지 매켄지 중령한테 가서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통신선이 파손돼 버렸으니 직접 가서 전달하라고 에린모어는 지시했다.
 
매켄지 중령은 독일군이 진짜 철수하는 줄 알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영국군을 유인하려고 전략적으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켄지의 계획대로 했다가는 데번셔연대 1600명이 몰살할 수도 있었다. '네 형을 살리고 싶으면 단짝인 스코필드와 함께 내일 아침 일출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명령서를 전달하라'는 게 블레이크에 대한 에린모어의 협박성 하명이었다.
 
형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블레이크는 '생각 좀 하고 가자'는 스코필드의 말을 무시하고 허겁지겁 데번셔연대 쪽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은 험난한 길이다.
 
시신이 널린 들판과 시신이 둥둥 떠 있는 물도 건너야 하고, 독일군이 파놓았으므로 혹시라도 매복이 있을지 모르는 참호도 지나야 하고, 어느 쪽 군대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마을도 지나야 했다. 거친 물결이 포효하는 계곡도 건너야 했다. 양쪽 전투기들이 이따금 교전하는 공중의 하늘도 머리에 이고 지나가야 했다.
 
그런 험난한 상황을 뚫고 익일 일출 전까지 명령서를 전달해야 했으니,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전사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극도로 불리한 조건에 놓인 두 병사가 이 미션에 대처하는 과정이 영화 속에서 잔잔하게 전개된다.
 
미션을 향해 나아가는 두 영국군 전령을 보면서, 관객들은 지배층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서 전쟁에 동원된 두 평민의 눈으로 제1차 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관객들이 마치 두 병사의 머리와 눈과 귀를 빌려 참호전과 신무기로 장식된 제1차 대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 1917 >은 첫 장면에서 "1917년 4월 6일"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이 시점은 러시아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한 직후였다. 레닌에 의한 11월 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으로, 러시아가 혁명 열기로 들끓을 때였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한테는 이 상황이 다소 유리했다. 동부전선에 대한 부담이 완화되고 서부전선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17년 4월 6일"이란 자막에 더해, 영화의 사실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요인이 있다. 감독인 샘 멘데스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작품의 사실성에 대한 관객의 신뢰도가 높아질 수 있다.
  

영화 < 1917 > 스틸컷 ⓒ (주)스마일이엔티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멘데스(Alfred Mendes, 1897~1991)는 1917년 전년도인 1916년 19세 나이로 영국군에 입대해 프랑스 전투 현장에 투입됐다. 이때 이야기가 그가 쓴 <알프레드 멘데스 자서전 1897~1991(Autography of Alfred Mendes 1897-1991)>이라는 비망록에 담겨 있다. 손자인 샘은 이 자서전을 기초로 < 1917 >를 만들었다.
 
영화 작품의 사실성을 검증하는 '역사 대 할리우드(History vs. Hollywood)'라는 사이트가 있다. 제목 그대로 '히스트리 vs. 할리우드 닷컴(historyvshollywood.com)'이란 도메인을 갖고 있는 사이트로 'CTF 미디어'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 사이트에 '< 1917 >은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준 실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1917 Was Inspired By A True Story Sam Mendes' Grandfather Told To Him)'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 첫 문장에 "감독 샘 멘데스의 친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맨데스가 소년 시절의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느슨하게 근거하고 있다(it is loosely based on account that director Sam Mendes' paternal grandfather, Alfred Mendes, told to him when he was a boy)"라는 문장이 있다. 할아버지한테 들은 바를 기초로 했지만, 그것과 꼭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느슨하게(loosely)'란 단어가 들어간 것이다.
 
알프레드는 전령이 아니라 통신병이었다. 그의 부대는 1917년 10월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484명 중 158명이 상상 또는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때 실종자들을 찾아나서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다.
 
영화 속의 두 병사는 전령이었다. 이들은 상관의 명령을 받고 출발했다. 실제의 알프레드는 전령이 아니라 통신병이었기 때문에 실종자 수색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부대에 대한 의무감을 느꼈다. 나는 자원했다(I felt myself under an obligation to the battalion. I volunteered)"라고 알프레드는 비망록에서 말했다. 수색에 나선 그는 생존자들을 구해냈고 이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영화에서처럼 1600명을 구할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전우들을 구하는 일에서 공을 세웠다.
 
영화의 배경이 1917년 4월인 것과 달리 알프레드의 경험은 그해 10월의 일이지만, 두 시기의 전황은 거의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4월보다 10월이 독일군한테 좀더 유리했다는 점이다.
 
그해 11월의 러시아혁명에 다가가면서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부담을 덜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알프레드처럼 서쪽에서 독일과 싸우는 병사들은 좀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점은 영화 속의 두 전령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할머니한테 듣는 옛날이야기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샘 멘데스는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전쟁 무용담이었고, 그는 이것을 기초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를 만한 명작을 만들어냈다. 샘 멘데스가 들려주는 '실제 사실에 느슨하게 근거한 옛날이야기' 덕분에, 관객들은 참호전과 신무기로 한층 더 잔혹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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