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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분 동안 한 장면을? 관객 당혹시키는 베닝의 마법

[김성호의 씨네만세 265] < L. 코헨 > 들고 전주 찾은 제임스 베닝

19.05.19 16:54최종업데이트19.05.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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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막을 내린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의 < L. 코헨 >이라 답할 것이다. 전주영화제가 마스터클래스로 기획한 단 세 편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미국 아방가르드 시네마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베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42년생으로 올해 77세인 베닝은 평생에 걸쳐 실험영화의 성격이 짙은 영상물을 독립자본으로 제작해왔다. 전주영화제는 유독 베닝과 연이 깊은데, 2005년 제7회 영화제에 그의 작품 <원 웨이 부기우기-27년 후>를 초청한 이후 15년 동안 13편(올해 두 편 포함)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전주가 사랑한 영화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미동 없는 카메라로 변화를 포착한다
 

▲ L. 코헨영화 배경인 오레곤 농장.ⓒ JIFF

  
전주영화제에서 세 차례에 걸쳐 상영된 < L. 코헨 >은 베닝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 작품이다. 그의 최근작들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멈춰선 채 미동도 없다. 45분에 이르는 영화 전체가 하나의 시퀀스로 이뤄졌고, 영상 속 어떤 사물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관객 입장에선 적잖이 당혹스럽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은 채 텅 빈 농장만 45분 동안 주시하기 때문이다.
 
안내물엔 다큐멘터리란 설명이 붙었지만 사건과 사람 사이의 진실을 탐구해서 대중에 알리는데 집중하는 다큐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연이 등장하긴 하지만 자연 가운데 흥미로운 지점을 포착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다큐와도 성격이 다르다.
 
< L. 코헨 >은 오레곤 농장의 특정한 시간을 관찰한 영화다. 농장이라고 하지만 건조한 잔디와 전신주, 산들바람, 쟁기, 타이어, 드럼통, 연료 등이 정물화 속 사물처럼 놓여 있는 게 전부다. 따져보면 날아가는 새나 곤충 따위가 있기야 하겠지만, 농장을 찍은 다큐에서 기대할 법한 가축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 없다.
 
특별한 게 아주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아주 특별한 무엇이 오레곤 농장을 지나간다. 영화를 촬영한 날은 개기일식이 있었던 날로, 달이 태양을 가려 빛이 사라지는 순간이 영화에 그대로 담긴다. 즉, 평범한 농장의 전경 가운데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만이 영화 속에서 변하는 전부라 할 수 있다.
 
통상 개기일식을 다룬 영상물이 천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집중하는 반면, 베닝은 그 그림자가 오레곤 농장 지표면을 지나는 순간을 담아내려 했다. 감독 스스로 개기일식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나 책을 통해 순간적으로 온도가 20도 가량 떨어지고 바람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반영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개기일식이 진행된 순간 너무 어두워져 바람에 휩쓸리는 풀은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 제임스 베닝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 섹션에서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제임스 베닝 감독(왼쪽)과 김지훈 중앙대 교수.ⓒ JIFF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진 마스터클래스에서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 영화엔 어떠한 디지털작업도 쓰이지 않았다. 사운드 싱크도 잘 맞춰져 영화 속 전부가 촬영현장에서 감독이 보고 들은 것과 동일하다. 단 한 가지 요소를 제외하고 말이다. 제목으로 쓰인 L. 코헨과 관련된 것으로, 영화 후반 5분여 간 레너드 코헨의 'Love Itself'가 삽입된 게 바로 그것이다. 감독은 이 노래를 삽입한 이유로, 촬영 당시 느낀 감정을 반영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베닝의 영화를 처음 본 관객은 대개 같은 과정을 겪을 게 분명하다. 처음엔 호기심이 일지만 이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중엔 체념한다. 그리고 오직 소수의 관객만이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무엇과 마주한다. 단지 달그림자가 지나가는 순간을 넘어서는 것을 말이다. 마법같은 경험이다.
 
베닝의 다른 작품들이 그랬듯, < L. 코헨 >은 멈춰있음으로 움직임에 민감하게 하고 변화하며 지속되는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얼핏 아무 곳에나 카메라를 가져다 두고 아무 것이나 찍어낸 만들기 쉬운 영화가 아니냐 비판할 수 있겠으나, 베닝이 걸어온 길이 그러한 쉬운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상을 활용해 관객의 감각과 감정의 변화를 촉진하고 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 L. 코헨 > 역시 베닝이 추구하는 영상예술의 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닝은 < L. 코헨 > 외에도 <국가의 탄생>을 갖고 올해 전주영화제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D. W. 그리피스의 동명 고전을 재편집한 것으로, 원작에서 발췌한 세 개의 장면을 동시에 세 채널로 영사한 작품이다. 전주 영화의 거리와 차로 10여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린 '익스펜디드 플러스-유토피안 판톰'전에 전시됐다.
 
베닝이 선택한 세 부분은 친구로 보이는 두 병사가 각기 남군과 북군의 군복을 입은 채 나란히 죽어 있는 장면, 노동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흑인의 모습, 흑인을 사냥하러 진군하는 KKK단원들의 모습을 찍어낸 쇼트다. 그는 이 장면에 미국 국기의 세 가지 상징색인 빨강·파랑·하양을 입혀 동시에 상영함으로써, 미국의 탄생 아래 어떤 희생이 깔려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일깨운다.
 
한편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총 관객 수 8만5900여명, 매진률 55%(총 상영수 697회 중 390회차 매진)로 역대 최고기록을 새로 썼다. 특히 20주년 기념으로 익스펜디드 플러스 전시가 열린 팔복예술공장에도 1만 여명의 발길이 이어지며 부산에 이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제의 자존심을 굳건히 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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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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