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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할머니들 휴먼 다큐, CGV 독과점 꼬집는 물꼬 될까

'CGV 상영 보이콧' <칠곡 가시나들>, 감독 애정 담긴 휴먼 다큐

19.02.26 16:02최종업데이트19.02.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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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글을 깨우친 후 간판을 읽고 있는 할머니들 ⓒ 단유필름

 
'팔십 줄에 문맹에서 벗어나 한글을 사랑하며 새로운 인생을 사는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2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영화다. 팔순 노인들의 삶을 보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내 할머니들이 보여주는 소녀 같은 감수성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개봉 전 영화를 본 관객들이 평가하는 'CGV 골든에그지수'에서 단번에 99%까지 등극하며 실관람객들의 호평 및 추천평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요소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관객 평가만큼 CGV의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8개관 배정으로 감독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관객들의 호평과 스크린 배정은 같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글 깨우친 할머니들이 주는 감동
 
팔순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곳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한 마을. 할아버지들은 다들 없고 자식들은 외지에 나가 있어 할머니들은 모두 홀로 산다. 이들이 글을 배우면서 느끼는 경험과 세상은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글자를 하나하나 알게 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거리의 간판을 하나 하나 읽어가면서 희열을 느끼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주석희 교사의 열정 또한 별미처럼 영화를 돋보이게 한다.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 정성껏 글을 가르치고 돌보는 모습은 한글 공부를 매개로 한 젊은 선생님과 나이든 학생들 사이에 형성된 애정을 엿보게 한다.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 단유필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들은 대부분 어릴 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난 1월 개봉한 <말모이>에서 까막눈 김판수(류해진 역)의 딸로 나오는 순이 같은 분들이다. 어려서 일본말을 배우다가 해방 이후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할머니들은 제대로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한글공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학창 생활을 경험해 보게 된다. 시험을 볼 때 옆 사람 답안지를 흘낏흘낏 쳐다보고, 답을 그대로 베끼기도 하고, 단체로 소풍도 가면서 인생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이름을 직접 쓸 수 있게 되면서 할머니들은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내 시적인 표현들이 드문 드문 스친다. 할머니들이 글로 표현파는 문장들은 아름다운 한 편의 시다. 문장이나 맞춤법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할머니가 진심어린 편지를 쓰는 모습에서는 뭉클한 마음이 든다. 늦기는 했지만 글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할머니들의 인생에 힘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녀와 같은 할머니들의 모습이 매력 있게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다큐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최승호 MBC 사장은 영화를 본 뒤 "할머니들의 꾸밈없는 모습과 할머니들의 지은 시가 좋아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라고한 이유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진모영 감독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영화고 보석이 종합선물세트로 쏟아지는 영화"라고 평가한 것도 영화가 안겨주는 따뜻함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설렘'
 
<칠곡 가시나들>을 연출한 김재환 감독이 재능 있는 다큐멘터리 꾼이기는 하지만 사실 전작들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부분도 있다. <트루맛쇼>(2011) < MB의 추억 >(2012) <쿼바디스>(2014) <미스 프레지던트>(2017) 등은 방송의 맛집 소개 실체와 두 명의 대통령, 종교 문제 등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던 작품이었다.
 
그는 매서운 비판과 풍자에 능한 감독이지만 <칠곡 가시나들>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휴먼다큐로 만들어졌다. 잘못된 현실과 정치권력에 대한 감독의 비판과 풍자가 결국은 사람에 대한 애정에 바탕으로 두고 있음을 <칠곡 가시나들>이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감독 내면의 인간미 넘치는 시선은, 글을 알게 된 할머니들의 삶을 다큐에 감동적으로 담아낸 원동력이기도 하다.
  

<칠곡 가시나들> 김재환 감독과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주석희 교사 ⓒ 인디플러그

 
김재환 감독은 어머니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껏 만든 다큐를 어머니와 친구 분들이 보셨지만 불편함을 느끼셨다"라며 "저희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 분들이 까르르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이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팟캐스트를 통해 우연히 칠곡군 할머니들의 시를 접하면서부터다. 그렇게 알게 된 칠곡군에서 27개 배움학교의 수업을 두 달 반에 걸쳐 모두 들어보고 선택한 곳이 약목면의 배움학교였다.
 
글과 시를 굉장히 잘 쓰는 곳도 있었지만 김 감독이 이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설렘'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할머니들이 처음 한글을 접하면서 느낀 설렘은 일상을 달리 보이게 만드는 어떤 에너지가 되고 있어서 여길 촬영해야 한다는 직감을 갖게 했다"라고 밝혔다. '설렘'은 '재밌게 나이듦'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데, 감독은 영화 <쉘 위 댄스> 칠곡 할머니 버전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1996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쉘 위 댄스>는 샐러리맨인 중년 남성이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사교댄스 교습소의 강사를 보게 되면서 춤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무료했던 삶에 춤이 활기를 불어 넣으며 남자의 생활도 활력이 넘치게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재밌게 버무린 영화다. 미국에서도 2004년 리메이크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휴먼다큐, 영화산업 독과점 문제 불씨 당길까?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 단유필름

 
하지만 안타깝게도 <칠곡 가시나들>은 수직계열화 기업인 CJ CGV로부터 외면받는 상황이 됐다. 관객들의 평가와 상관없는 CGV의 상영관 배정에 김재환 감독은 과감하게 보이콧을 선언했다. 감독이 느낀 모욕감은 개인적인 것보다는 할머니들의 설렘을 가볍게 취급한 데 대한 서운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곡 가시나들>에서는 볼 수 없지만 감독이 그간 전작에서 보인 풍자와 비판 정신은 이번 보이콧 관련해 낸 공식 입장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CGV, 넌 내 인생에서 아웃!"
"업계에서 가장 힘 센 자가 최소한의 금도를 지키지 않고 돈만 쫓을 땐, 교만의 뿔을 꺾어 힘을 분산시킬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투자 배급과 극장의 고리를 법으로 끊어주면 좋겠지만 CJ를 사랑하는 국회의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CGV의 환대에 저도 쌉싸름한 선물로 보답하고 싶다."


직설과 반어인 표현으로 장식된 감독의 입장은 영화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대기업 상영관이 보이고 있는 불균형적인 행태 덕분에 설렘 속에 살아가는 시골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영화산업 독과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칠곡 가시나들 김재환 감독 C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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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주요 영화제, 정책 등등)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각종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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