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흑금성 공작원안기부의 '흑금성' 공작원 시절에 비밀 방북한 박채서씨가 평양의 5.1경기장에서 안내원과 함께 찍은 사진.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채서 팀은 광고 프로듀서 출신인 박기영에 주목했다. 영화 <공작>에서는 배우 박성웅이 박기영을 연기했다. 배우 채시라를 발굴해낸 박기영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광고를 북한에서 촬영하는 방안을 꿈꾸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박채서는 박기영의 이웃집으로 이사 간 뒤 친분을 쌓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박기영의 열정을 대북침투 루트 중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됐다. 또 대북 활동자금을 상부에서 지원받지 않고 자체 사업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됐다.
박채서는 박기영과 함께 1995년 '커뮤니케이션 아자(AZA)'란 회사를 설립했다. 주먹을 쥐며 '열심히 하자'란 취지로 외치는 그 '아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A에서 Z까지 갔다가 다시 A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띠는 상호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원래 상태(正)로 되돌아가는(反) 것을 반정(反正)이라 불렀다.
'아자'를 앞세운 박채서는 광명성경제연합회 베이징 대표부의 리철 등을 통해 북한에서 광고 촬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김정일의 호를 딴 이 기구는 대남 경제협력 사업을 관장했다.
북한은 1990년을 전후한 동구권 붕괴에 이어 1993년부터의 제1차 핵 위기로 한층 더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거기다가 자연재해마저 겹쳐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96년 북한 신년사에서 '고난의 행군'이 표방될 정도였다. 이런 점을 활용해 박채서는 '광고촬영 사업이 북한에 이득이 될 거'라는 미끼를 앞세워 북한 지도부에 접근했다. 그 결과,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고 독점사업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북한 핵심부의 신뢰를 받게 된 박채서씨는 그 무렵 김정일을 만났다는 보고를 안기부로 올렸다. 박씨는 몸속에 녹음기를 감추고 들어가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고 한다." - 이정훈의 <공작> 중에서.박채서의 사업은 급속히 불어났다. 북한 내 광고촬영 독점을 발판으로, 핸드폰 애니콜 광고의 북한 촬영 건을 삼성전자와 함께 추진하게 됐다. 또 북한 내 TV 촬영 독점권도 얻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MBC와도 합작하게 됐다. 이때가 1997년이다.
박채서가 성공적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북한 쪽 첩보도 잘 얻어왔지만,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한 쪽 정보도 과감하게 넘겨줬다. 기자나 야당 정치인들과도 은밀히 만나 고급 정보를 제공하면서 별도의 인맥을 구축해뒀다.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이성이나 금전, 술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결백했다고 이정훈의 <공작>은 말한다. 영화에서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97년까지는 그랬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동력이 돼 1997년, 그의 나이 43세 때 공작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