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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 장하다! 돌머리들의 애국질

<디 워>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점

07.10.08 10:49최종업데이트07.10.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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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가 미국에서 개봉한지 3주가 지났다. 2천개가 넘던 <디 워> 상영관도 408개관으로 줄었다. 아직 DVD·비디오란 2차 시장이 남았지만, <디 워> 미국 흥행 성적이 슬슬 가시화 되고 있다. <디 워> 논쟁으로 한 때 '뜨거운 도마'위에 올랐던 문화평론가이자 중앙대 겸임 교수인 진중권씨에게 현 시점에서 본 <디 워>에 대한 글을 요청했다. 진중권 교수는 극구 사양하다가, <오마이뉴스>를 위해 다시금 펜을 들었다. 진중권 교수는 미국 개봉 뒤 일어난 움직임까지 더해서 <디 워>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디 워>의 미국개봉 결과에 대한 소감은 이미 2주전에 <시사IN>에 보냈으니, 그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못 느낀다. 잡지가 지난 주에 발간되었으니 지금쯤엔 홈페이지(www.sisain.co.kr)에도 떠 있을 게다. 9월 14일은 지났고, 이무기의 휴거는 없었다. 앞으로 이런 해프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이 사태에서 배울 몇 가지 점을 챙기기로 하자. 사태를 일으킨 두 주역은 영화와 대중이었다. 그 중에서 먼저 영화의 문제부터 짚자.

<티라노의 발톱>과 <쥬라기 공원>의 차이?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천문학적 제작비를 들이는 것이 미국 영화의 강점이다. 그런 영화들과 경쟁을 하려면, 상대의 강점을 피해가며 자기의 비교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가령 이순신이 거북선에 철갑을 두른 것은, 사무라이와 정면대결을 피하는 '비겁함'이 아니라 그들의 칼솜씨를 무력화시켜 조선수군의 비교우위를 확보하는 '현명함'이다.

하지만 <디 워>는 미국 영화와 CG(컴퓨터그래픽)로 경쟁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사회의 거국적 열광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심형래 감독은 인터뷰에서 <디 워>를 드디어 "인디 영화"라 불렀다. <디 워>의 CG는 한국에서는 볼 만할지 모르나, 할리우드의 관점에서는 그저 저예산 영화 수준일 뿐이다.

그런데도 CG만으로 승부 하겠다? 광고라면 어느 정도 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보통 2시간 정도 가량의 길이를 갖는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서사의 연관 없이 끌고 간단 말인가? 한국의 관객과 달리 미국 관객들은 엉덩이에 애국심의 접착제를 바르지 않는다. 배급사가 러닝타임을 90분으로 줄여달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일 게다.

사실 <디 워>에는 대본이 없다. <반지의 제왕>은 바탕에 완성된 소설이 있다. 반면 이무기의 전설은 실은 얼개조차 불분명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용이 못된 커다란 뱀을 이무기라 부른다'는 정도. 감독이라면, 스토리의 결여를 자신이 채워 넣었어야 한다. 하지만 심 감독은 그런 문학적 상상력을 영화의 필수적 조건으로 보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무지도 문제다. 심 감독은 배우는 미국인을 쓰면서도 정작 대본은 영어로 직역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대사가 한국식 영어회화('How are you? Fine, thank you')만큼이나 어색해진 것이다(대사 중에 그나마 미국적이었던 것은, 통화 중이던 전화를 끊는 이든에게 브루스가 했던 농담. "고마워, 중요한 전화였는데." 이 대사는 누가 넣었을까?).

<디 워> 포스터. ⓒ 영구아트


<티라노의 발톱>과 <쥬라기 공원>의 차이는 CG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 큰 차이는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령 <쥬라기 공원>은 도망가는 장면조차 공포영화를 방불케 한다. 히치콕을 생각해보라. 극적 긴장감을 주는 데에도 고도의 디렉팅이 필요하다. LA를 때려 부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 그것을 '어떻게' 때려 부수냐다.

부라퀴의 캐릭터도 문제다. <괴물>에 나오는 동물은 특징을 갖고 있다. 가령 인골을 토해놓는 장면. 괴물은 수천 장의 밑그림에서 미적으로 선발됐기에 미학적 매력을 갖고 있다. 반면 부라퀴는 그저 소리만 지를 뿐 뱀을 넘어서는 특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동양의 용은 서양인들이 중국집에서 늘 보는 이미지로, 신선함이 떨어진다.

영화는 ①인문학적 상상력을 ②예술적 이미지로 승화시켜 ③CG를 비롯한 각종 영상의 테크놀로지로 실현시키는 작업이다. 그저 특수효과 하나만 들고, 그것도 할리우드 기준에서 보면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그저 그런 기술에만 가지고 미국 시장에 나가는 것을 과연 '아름다운 도전'이라 불러야 할까?

"800만이 봤으니 뭔가 있음에 틀림없다."

<디 워>에 열광하는 대중은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미국 시장을 노린 영화가 미국에서 참패를 했다. 결국 그 '뭔가'는 없었던 것으로 판명 났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들이 그 영화에 왜 그토록 열광을 했는지, 혹시 자기들에게 뭐가 문제가 있는지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평론하는 평론가에게 대중은 왜 분노했을까?

사실 내 관심은 영화나 감독이 아니라 대중의 행태에 있다. 그들을 나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 현상의 근원을 분명히 드러내 의식시켜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이와 비슷한 계기가 생기면 다시 똑같은 행태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대중의 행태를 낳은 생체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중이 평론가를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게 평론가의 임무다. 그런데 평론가가 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대중은 왜 그렇게 분노를 했을까? 물론 그것은 '평론'이 대체 뭔지도 모르는 문화적 무지의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지는 그보다 더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한국의 커뮤니케이션은 구술적이다. 평론은 어디까지나 주체(1인칭)-객체(3인칭)의 문제다. 하지만 구술문화에서는 모든 소통이 주체(1인칭)-주체(2인칭)의 관계가 된다. 평론가가 작품을 평하는 게 평론가와 감독 사이의 인간관계의 문제로 여겨진다. "너희들이 심 감독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해괴한 반응은 여기서 나온다.

작품에 대한 비평을, 그것을 만든 이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구술문화의 전형적 특성이다. <디 워>에 대한 나의 견해를 논박하기보다는, 그 견해를 말한 이의 인격을 공격하고 나서는 것 역시 구술문화에 사는 인간들의 전형적 습속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안이 인간관계의 문제로 환원된다.

논점보다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1인칭-3인칭의 대물관계가 아니라, 1인칭-2인칭의 대인관계다. 중요한 것은 1-3인칭 관계를 특징짓는 '논리'가 아니라, 1-2인칭 관계를 특징짓는 '싸가지'다. 여기서 비평의 목적어인 작품에 대한 분석은 사라지고, 온정적 응원과 감정적 비난만 난무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그 말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보다 그 말을 꺼낸 이가 '좋은지, 싫은지'가 더 중요하다. 진위(眞僞)를 가리는 이성적 담론은 곧바로 호오(好惡)를 말하는 정서적 표현으로 대체되곤 한다.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좋아', '싫어'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유아기의 특성이다(한국의 성인들이 미국의 초등학생에게 훈계를 들었다).

논점보다 태도, 논리보다 '싸가지' 권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어떤 주장이 받아들여지는지 여부는 그 주장의 진위와는 상관이 없게 된다.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수용하는 기준은 호오(好惡)의 감정이다.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은 세계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논리보다 싸가지를 배워야 한다.

친교적인 사회에서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새로운 발견은 종종 고정관념을 깬다.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익숙한 틀이 깨질 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이런 사회에서는 괜히 타인들의 고정관념을 건드려 반감을 사느니 차라리 침묵을 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개인들은 자신의 견해를 내기를 두려워한다. 특히 그것이 다수의 견해와 대치될 때에는. 힘없는 개인은 세계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기보다, 주위사람들과 '친교'를 유지하는 데 몰두한다. 이는 사회적 소통에 새로운 정보들이 유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이것이 그 사회를 발전하지 못하는 정체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들은 세계를 관찰하고 추론해서 스스로 입장을 정하는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견해를 살핀 후 그 설문조사의 결과를 자신의 견해로 삼게 된다. 이 평균치에서 벗어나는 견해를 말하면, 곧바로 공동체의 제재를 받는다. 뜨거운 8월에 평론가들만 털린 게 아니다. <디 워>에 비판적인 대중들의 블로그도 털렸다.

불행히도 자신의 견해가 우연히 다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경우가 생긴다. 이때 개인은 주위 눈치를 봐가며 아예 입장을 180도로 바꾸거나, 아니면 입장은 유지하되 최소한 어조를 조절한다. 이런 사회에서 '완곡어법'은 수사학적 선택 문제가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 기술이 된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개인의 생존을 좌우한다.

대중들만 그런 게 아니다. 강준만이 <디 워>를 '캠프'라 부른 것, 김정란이 <디 워>를 페미니즘의 영화로 만든 것, 김규항이 평론가를 '기생충'으로 끌어내린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대중의 견해에 맞춰 '조정'하려 했고,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문화적 소양을 무식함의 수준까지 끌어내리게 된 것이다.

'완곡어법'을 의무로 부과하고, 그것의 준수를 대중적으로 감시하는 스타일의 독재. 이런 데 익숙한 한국의 관객들은 미국의 평단과 관객이 쏟아놓은 혹평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 혹평들은 드높은 풍자문학의 수준을 보여준다. 평론도 그 자체가 문화인데,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에서 문학성은 감옥에 갇히고 만다.

사실 이번 사태에서 나를 가장 쪽팔리게 했던 것은 대중들의 악다구니가 아니라, 우연히 읽게 된 어느 블로거의 한 마디였다. "미국의 평론에 비하면, 진중권의 것은 아이 장난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독설의 임계치는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마음먹고 독설을 구사했다면 아마 대중의 흥분이 임상의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수치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애국'의 완장만 두르면 모든 짓이 허용된다?

<디 워> 중 한 장면 ⓒ 영구아트



<디 워>의 관객이 800만이라 하나 60%가 방학용으로 봤다고 하니, 성인 중에서 <디 워>를 본 사람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음에 틀림없다. 그 중에는 10번 넘게 중복 관람한 열성자들도 있고, 게다가 <디 워>를 보고 모든 사람이 "재미있다"고 한 것도 아닐 터이니, 성인 중에서 <디 워>에 열광한 이들의 수는 그보다도 적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취향도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누가 자기들의 취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일까? 와인보다 소주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그렇다고 소주가 와인보다 좋은 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보다 이발소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그렇다고 이발소 그림이 피카소보다 위대한 것은 아니다.

평론가가 길바닥 초상화가들의 그림에 대해 "미적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 화가들에게 푼돈 몇 푼 주고 제 얼굴을 그리게 하는 대중들을 무시하는 발언일까? 이런 얘기를 발언이라고 하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는 그 머릿속은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한국 영화의 관객을 이 돌머리들로 대표해도 되는 걸까?

성인이 12살 이하의 아이들이 즐기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것은, 간섭할 수 없는 그의 천부인권에 속한다. 하지만 그런 취향을 보며,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리에 속한다. 어느 미국의 평론가의 말대로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 800만이 봤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한 마디로 한국 관객 수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충무로가 조폭 영화 빼고 뭘 만들었느냐?"고 항변한다. 도대체 나는 한국영화 중에서 조폭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한국영화가 조폭 영화로 대변되어야 할까? 그런 형편없는 영화들의 관객석을 꽉꽉 채운 형편없는 관객들은 아마도 '한국영화=조폭영화'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일 게다.

12살 이하의 지적 수준과, 방학특선 영화를 좋아하는 유아적 취향과 몰려다니면서 해코지하는 싸가지를 가진 자들이 정말로 한국영화의 관객을 대표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한국' 영화를 좋아할 뿐이다. 그들은 사실 영화에는 관심도 없다. 영화를 사랑한다면서 미감이 저렇게 형편없을 리 있겠는가?

하여튼 '애국'의 완장만 두르면 모든 짓이 허용된다고 믿는 돌머리들의 장한 애국질을 보자. 달러 벌어다 준다더니, 미국에 달러만 갖다 바친 꼴이 됐다. 한국영화 알린다더니, 2300개관 규모로 대망신만 시켰다. 영화 평점 조작하다 들켜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키워놓았다. 머리가 딱딱한 것은 개인적 불행인데, 그 머리로 장하게 애국질까지 하고 다니면, 그것은 국가적 불행이 된다.

PS. 쉰 떡밥 하나, "'디빠'여! 평론가는 웬만하면 '정품' 쓰자

"필자는 실명을 글을 쓰는 논객이다. 필자를 비판하려면 정정당당히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던지, 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다." 몇 년 전부터 나를 스토킹 하는 자칭 "논객"이 이렇게 말했다. 소원대로 그의 실명을 밝혀주자. 그의 이름은 변 희재다. 이제 이름과 얼굴을 알려줬으니, 대신에 앞으로는 내 '후배'라고 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위기를 보아 하니 수세에 몰린 'FC 디빠'에서 이 선수를 교체 출전시킨 모양이다. 그라운드에 나오자마자 과연 현란한 개인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골을 넣긴 넣었는데, 골의 성격이 매우 독특하다. 이제까지 '디빠' 구단의 공식 입장은 <디 워> 흥행은 애국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수, 'FC 디빠'의 유니폼을 입고 나와 외치기를 "영화는 국경이 없으나, 관객에는 조국이 있다!" 혹시 용가리 치킨?

'FC 디빠'의 희망으로 떠오른 기대주가 또 있다. 김휘영이라는 선수다. 이 선수의 골도 예사롭지가 않다. 이 선수의 주장에 따르면, 내가 9월 2일에 써서 <문예중앙>에 보낸 원고가 9월 19일 날 자기가 지인에게 보낸 메일을 해킹해서 베낀 표절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진중권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아직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도 골이라고 변희재 선수가 달려와 하이파이브를 해준다. 이 SF 소설을 제가 운영하는 뉴스 사이트에 기사로, 그것도 탑으로 올렸다. 어쨌든 이 두 선수, 그 동안 나한테 무시당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내가 이들의 유별난 극성에도 대꾸를 안 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얘들은 가만히 놔둬도 내가 넣을 골을 알아서 대신 넣어주기 때문이다. 'FC 디빠'여, 구단 형편 어려워도 평론가는 웬만하면 '정품' 쓰자.

디워 심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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