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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게이도, 게이 감독도 '내 인생의 황금기'

[리뷰] 네 성소수자의 삶을 그린 밝고 유쾌한 다큐 <종로의 기적>

11.05.31 14:42최종업데이트11.08.1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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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종로의 기적>의 한 장면 ⓒ 시네마달


경상도 '고딩' 영수는 또래 중 유달리 눈에 들어오던 한 친구가 이유 없이 좋았다. 수줍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던 그 '시골게이'가 이제 평범할 수만은 없는 30대 아저씨가 됐다. 충정로에서 아담한 스파게티집을 운영하는 영수씨는 지금이 '내 게이 인생의 황금기'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합창단 소모임 '지보이스'의 주축 회원인 그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그 '언니'들이 그렇게 좋다. 그래서 수년 간 만나온 지인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6월 2일 개봉)은 이렇게 남자를 사랑할 운명으로 태어난 네 남자의 건전하고 긍정적인 삶을 그린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버려도 좋다. 영수씨를 비롯해 소심한 영화감독 준문, "일터에도 동성애를 허하라"는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병권, HIV/에이즈 감염자를 사랑하는 욜 등 네 주인공의 일상은 한국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현실과 아픔에 대해 가감 없는 기록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준문은 남자와 자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덕에 1년간 군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투철하게 운동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병권은 "연애를 잘 하고 싶어 운동을 한다"며 웃는다. 감염자 인권 운동에 참여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욜은 언제 감염될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주변의 걱정을 안은 채 사랑하는 이를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종로의 기적>은 줄곧 발랄하고 유쾌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차별과 억압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라고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언제나 팍팍하랴. 그들의 일상은 우리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짙고 매캐한 색안경을 쓰고 볼지 모르지만 이들은 모두 평범하게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싶고, 일터에서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종로의 기적>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은 그들의 진실하고 환한 미소를 잡아낼 때다.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은 일상을 영유하고픈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듯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낙원동 사람들의 무지갯빛 이야기

다큐 <종로의 기적> 포스터 ⓒ 시네마달

"이 땅의 성소수자는 여전히 비정상이자, 종교적 죄인이며, 사라져야 할 변태들이다. 커밍아웃 다큐 <종로의 기적>이 이성애자들에게는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성찰의 다큐멘터리가 되길 바란다." (이혁상 감독의 연출의 변 중)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동성애가 빅토리아 시대부터 이어져온 현대 섹스에 대한 강박관념의 산물이라 못박았다. 동성애가 일반적이었던 고대 그리스시대에도 과연 성소수자들을 '비정상'이라 규정하고 배척했느냐는 물음이다. 2008년부터 이 '커밍아웃 다큐멘터리'를 준비해온 이혁상 감독의 문제제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는 이를 편안하게 웃고 울리는 이 다큐멘터리는 물론 '액티비즘(행동주의) 다큐멘터리'로서의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게이' 감독이라는 차별적 시선을 떨쳐낸 준문의 에피소드는 금기시된 군내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환기시킨다. 또 활동가 병권의 이야기는 포괄적인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또 7년 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운동에 뛰어든 욜로부터는 감염자 인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그 사이 가장 극적이면서 애처로운 장면은 영수씨의 이야기에서 연출된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해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 앞에서 공연까지 마친 그는 이듬해 갑작스런 뇌수막염 판정을 받고 유명을 달리한다. 평생 남들과 다르다는 고민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는 임종 직전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 빈번히 사회적 타살과도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성소수자들의 처지에 반해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영정사진을 보며 훌쩍이지 않을 강심장의 소유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편 <종로의 기적>은 세 트랜스젠더의 삶을 조명한 <3xFTM>(2008), 국내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정치인 최현숙에 대한 다큐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2009)에 이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의 세 번째 프로젝트다. 더불어 작품성을 인정받아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피프메세나상을, 한국독립영화협회 선정 2010 올해의 독립영화상을 수상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해설을 읊는 이혁상 감독은 "주말이 되고 어둠이 내리면 낙원동은 또 다른 활력으로 가득 찬다"고 했다. 이 긍정적인 다큐 <종로의 기적>을 본 관객들이라면 한번쯤 종로3가 뒤편 낙원동 골목을 지날 때 환한 무지개를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또다른 성소수자 영화들, 궁금하지 않으세요?
<종로의 기적>을 보고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면, 연분홍치마의 다큐 <3xFTM>과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를 꼭 챙겨볼 것을 권한다. 트렌스젠더들과 레즈비언의 생생한 삶의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수소자를 다룬 한국영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신호탄은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이 쏘아 올렸다. 1996년작인 이 영화는 한국전쟁에서부터 현재까지 가부장제하에서 살아온 게이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그린다. 황정민이란 배우의 존재를 알렸던 <로드무비>는 한국영화 역사의 대표적인 '퀴어영화'다.

좀 더 대중적이고 장르적인 당의정을 입힌 영화들도 여럿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씨름부 학생의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묘사한다. 여고생들의 성장통과 연애담을 경유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공포영화, 치명적 사랑이란 코드 속에 레즈비언의 질투를 녹인 <주홍글씨>는 스릴러영화다.

커밍아웃한 게이감독들의 영화도 빠질 수 없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는 게이 '신파멜로' 속에 한국사회의 계급문제를 언급했다. 또 그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동백꽃>은 본격적인 '퀴어' 중편 모음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와의 지난한 법정투쟁을 벌인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사이?>도 빠지면 서운할 법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퀴어 멜로'다.

6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국내 유일의 성소수자 영화제인 '서울 LGBT영화제'가 진행된다. 개막작은 레즈비언의 삶을 다룬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다. <종로의 기적>과 더불어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LGBT 영화제를 관람하러 '낙원동'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종로의기적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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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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