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포스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 포스터 ⓒ 영화사 진진

 
1990년,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 <파업전야>는 당시 상영을 하면 형사처벌을 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전남대에서 상영을 준비하던 중 상영을 막기 위해 사복경찰 12개 중대와 경찰 헬기까지 동원하는 등 영화사상 유례없는 탄압을 받았다. 만약 우리 영화계에 <파업전야>가 없었다면 제16회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노동문제를 다룬 영화들도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19년 5월 1일, <파업전야>의 재개봉은 세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노동계층은 사회의 가장 많은 이들이 종사하는 계층이지만 이들에 대한 대우나 인식은 여전히 차갑다. 이들의 단결권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나 사측에 의해 노조가 운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권리를 찾기 위한 단결과 파업은 언론에 의해 매도당한다. 이런 노동계층을 위해 평생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 있다. 바로 켄 로치 감독이다. 36년생의 노감독이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2016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단결과 연대를 통한 저항과 권리의 보장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목수이다.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 심장이 좋지 않으니 일을 쉬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정부에 병으로 인한 생활보조금을 신청하는 다니엘. 헌데 담당 센터는 그를 '정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심장과 관련이 없는 질문 몇 가지를 던지고 '이 정도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일도 할 수 있잖아요'라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담당 센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는 민영화와 관련이 있다. 국가가 주도하고 판단을 내려야 될 보조금 사업을 미국의 한 업체에게 고객 담당을 맡기면서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을 내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니엘은 미칠 노릇이다. 건강보조금과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게 된 그는 결국 관련 기관을 찾아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답답하기는 담당 기관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는 다니엘에게 컴퓨터로 미리 작성할 서류를 작성하지 않았다며 무작정 기다리라 말한다. 그런 다니엘의 눈에 케이티가 들어온다. 이주 절차를 밟고 온 케이티는 5분 지각했다는 이유로 아이 둘과 함께 맨 뒷줄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는다. 다니엘은 케이티를 위해 양해해 줄 것을 부탁하나 공무원들은 절차를 지켜야 된다며 거절하고 결국 다니엘과 케이티는 쫓겨난다. 컴퓨터를 모르는 다니엘에게 서류 작성을 위해 컴퓨터를 배우라 강요하는 장면은 사람을 위한 복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정작 복지보다 행정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빈민촌에서 지내다 아이들을 위해 집을 얻어 이주 온 케이티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케이티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 다짐하지만 두 사람 다 경제적인 문제로 좌절의 순간을 겪게 된다. 복지기관은 다니엘에게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업급여를 줄 수 없다 말한다. 건강급여가 물 건너간 다니엘은 실업급여라도 받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이력서를 넣으나 노력부족을 이유로 실업급여를 지급받지 못한다. 오히려 기관은 제대로 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기초생활지급 급여까지 정지시키겠다고 협박한다.
 
다니엘은 이력서가 붙어도 직장에 나갈 수 없다. 언제 그의 심장이 또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빈곤에 시달린다. 자선단체에 지원이 오자 그 자리에서 통조림을 까먹는 모습이나 식료품점에서 도둑질을 하는 케이티의 모습은 그녀와 두 아이의 생활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케이티는 몸을 파는 극단적인 직업을 택하기에 이른다. 몸을 파는 케이티의 모습을 본 다니엘은 그녀와 그 가족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숨어버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수정자본주의에서 등장한 복지의 개념은 자본의 편중 문제로 인해 제도라 할 수 있다. 99%의 노동자보다 1%의 사업가(자본가)가 성공을 거두는 자본주의의 사회구조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국민들이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영위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이다. 문제는 이런 복지에 대해 사회 상류계층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라 할 수 있는 돈을 지닌 그들은 복지를 위한 증세에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동시에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만 할 것을 촉구하며 그들의 인간된 권리를 무시한다.
 
켄 로치 감독은 이런 사회에 대해 '해결책'을 촉구한다. 이런 변화의 촉구는 켄 로치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생각했을 때 커다란 외침이라 볼 수 있다. 전작 <지미스 홀>에서 종교와 자본가에 잠식당한 마을 젊은이들을 위해 춤추고 놀 수 있는 마을회관을 만들었던 제임스는 결국 사회주의자로 몰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켄 로치 감독의 대표작 <랜드 앤 프리덤>에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노동계층의 시민군은 프랑코 정권의 독재에 반대해 무기를 들지만 결국 좌절을 겪게 된다. 반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실직자 목수에 싱글맘이라는 비록 사회적인 약자일지라도 우리가 뭉쳐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이런 희망을 보여주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다니엘 블레이크가 행정 기관의 벽에 낙서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국민이 아닌 상관과 자본가를 주인으로 섬기는 공무원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짧은 순간이지만 시민들은 이에 동조한다. 사람이 아닌 절차와 자본을 우선시하는 공무원들의 행정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은 이 장면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단결과 연대를 보여준다. 첫 번째 장면이 가슴이 들끓는 열정과 분노를 토해냈다면 두 번째 장면은 가슴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다니엘이 현실에 지쳐 칩거 생활을 택했을 때 케이티의 딸은 다니엘을 찾아온다. 아이는 말한다. 아저씨가 우리에게 힘이 되어줬듯이 우리가 아저씨와 함께 해 주겠다고 말이다. 연대의 힘은 예상 외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다. 혼자일 때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던 일이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입을 열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만든다. 다니엘과 케이티의 연대, 다니엘과 시민들의 연대는 노동계층이 그들의 권리와 안위를 위해 나아가야 될 방향과 행동의 촉구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켄 로치라는 노감독이 더 이상 '좌절하는 노동계층'을 그리기 싫어하지 않았나 하는 상상력을 품게 만든다. <레이닝 스톤>의 딸의 미사 날 새 옷을 입혀주기 위해 사채를 쓰는 아버지, <네비게이터>의 민영화로 바뀐 뒤 해고될 것이 두려워 동료의 죽음을 외면하는 철도 노동자들, <자유로운 세계>의 돈을 벌기 위해 차가운 자본가로 변신해 버린 싱글맘의 모습을 그는 더 이상 그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현상의 재현과 좌절의 조명을 넘어 희망을 촉구한다. 자본가와 국가 권력에 대항한 노동자의 연대와 저항, 이를 통한 권리의 추구라는 희망을 평생을 노동계층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담아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키노라이츠, 루나글로벌스타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나다니엘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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