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 <이국정원> 공연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 <이국정원> 공연 모습 ⓒ 한국영상자료원


희귀한 무대에 이목이 쏠린다. 스크린 속 훼손된 화면은 꽤 낯설다. 폴리 아티스트의 즉석 연주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박장대소가 연발한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배경음악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감수성을 더한다. 뮤지컬 배우들의 즉석 더빙은 생동감 그 자체다. 그러다 어느덧 이 1950년대 사랑 이야기에 깊게 몰입하게 된다.

'라이브 더빙 쇼'라는 특이하고 특별한 형태로 명명된 <이국정원>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사에 있어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만한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그러한 의미를 충분히 인지한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이하 CHIMFF 2015) 측은 21일 오후 충무아트홀에서 열린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이국정원>을 선택했다. 관객의 만족도가 특히 높았던 이 공연은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다.

2015년에 다시 만나는 고전 <이국정원>의 매력

 영화 <이국정원>의 포스터

영화 <이국정원>의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인 <이국정원>은 무려 1957년에 제작된 총천연색 장편영화다. 하지만 필름이 유실돼 자취를 감췄고,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의 노력과 홍콩 쇼브라더스, 홍콩필름아카이브의 협조를 통해 3년여의 노력 끝에 마침내 필름을 찾게 됐다. 하지만 사운드는 소실됐고, 화면 역시 심하게 변색돼 있었다. 리마스터링 거쳤음에도 상영할 정도로 완전히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복안이 나왔다.

<이국정원>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영화를 보며 직접 연기와 더빙을 하고, 배경 음악은 라이브로 연주하고, 음향효과는 폴리 아티스트가 실연을 하는 라이브 더빙 공연으로 거듭났다. 총 연출은 뮤지컬 영화 <삼거리 극장> <러브 픽션> 등을 연출한 전계수 감독이 맡았다. 그리하여 지난 2014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첫선을 보였다. 열띤 호응으로 그해 6월 말 무주산골영화제 개막 공연으로 이어졌다.

"영화 상영과 결합된 '공연' <이국정원>은 무엇보다 반세기를 지나 이 시대로 다시 소환된 이 과묵한 영화에 사운드라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당시의 배우들이 어떻게 말했고 '내 마음의 태양'의 원곡은 어떠했는지 도저히 알 길은 없지만, 그래서 그 시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배우들의 입을 통해, 연주자들의 음악을 통해, 폴리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통해 이 영화의 욕망을 대신 말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당대의 좌절이 역설적으로 투사된, 허영으로 가득한 기름진 욕망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최선을 다해 무대 위에서 번들거려볼 작정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에 대한 저와 공연진의 경의이자 현재의 관객에게 이 영화의 매력을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개막공연 당시 전계수 감독의 연출의 변 중에서)

<이국정원> 프로젝트는 최초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개관 기념으로 기획, 제작됐다. 현재의 더빙 공연과 1950년대식 성우 버전 두 가지로 기획됐으나, 원본 필름의 화질 상태 때문에 현재 '라이브 더빙 쇼' 형식으로 낙찰됐다. 사라진 것, 훼손된 예술 작품을 어떻게 복원할까를 고민하던 영상자료원의 결과물인 셈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국정원>의 호응에 힘입어 몇 가지 복원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다. 사운드가 소실된 김기영 감독의 <죽엄의 상자> 역시 시나리오는 없지만 더빙, 공연 버전을 고민 중이다. 또 시나리오만 남은 1930년대 영화의 낭독 공연도 구상 중이다. 이밖에 <만추>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한국판 <서칭 포 슈가맨>과 닮은 한국 감독 다큐멘터리 시리즈와 자료원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도 기획하고 있다. <청춘의 십자로> <이국정원>의 성과가 또 다른 복원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다.

관객들이 이 '라이브 더빙 쇼'에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 <이국정원> 공연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 <이국정원> 공연 ⓒ 한국영상자료원


<이국정원>의 외형적인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국인 작곡가와 홍콩 가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1950년대의 멜로드라마라니 얼마나 고색창연할까 걱정부터 드는 게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이 기우라는 듯이 <이국정원>은 사료를 확인하는 진귀함과 여러 장르의 예술이 섞인 데서 오는 조화와 전계수 감독의 '대사빨'이 전달하는 재미가 교차해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감흥을 전해줬다.

<이국정원>은 김진규, 최무룡, 윤일봉 등 과거 충무로를 주름잡던 고전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다. 다소 민망할 수 있는 정석적인 연기 위로 뮤지컬 배우들의 더빙 연기가 합쳐질 때, 묘한 재미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소림축구> 등으로 친숙한 조미(자오웨이)를 떠올리게 하는 중국 여배우 우민의 미모 역시 눈길을 잡아끈다. 이날 공연엔 그의 친아들이 참석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한데 의도하지 않았던 긴장감은 <이국정원>의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선진성과 전복성에서 비롯된다. 국가를 넘어선 남녀의 사랑은 과거의 인연과 부모의 방해를 받는데, 회상 장면과 교차 편집 등을 이용해 이를 전개하는 이야기 구조가 꽤 단단하고 풍성하다. 특히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집중하게 하는 극적 갈등과 반전은 1950년대 한국영화임을 의심케 만들 정도다.

어떻게든 국가나 계층 차를 뛰어넘어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제는 시대를 고려한다면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또 <이국정원>은 상류사회의 복식이나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전후인 1950년대 한국의 경제상을 뛰어넘으려는 의도는 판타지로서 영화의 어떤 기능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고전 한국영화에서 확인하는 홍콩의 풍광 또한 컬러로 펼쳐졌을 화면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이를 완성하는 건 새롭고 또 새로운 형식이다. 건반과 바이올린, 드럼이 결합된 밴드 연주는 극의 몰입을 돕고, 공연 내내 분주하게 몸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배우 박영수의 음향 효과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며, 당대의 연기 톤을 공부한 듯 뮤지컬 배우들이 재연하는 고풍스러운 연기는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향수와 재미를 동시에 선사한다.

이 모든 요소를 총체적으로 구현한 전계수 감독의 연출은 놀라움을 안겨 준다. 특히 <러브 픽션>의 영화 속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소소한 대사의 알싸함은 낯선 형식에도 관객이 <이국정원>에 친근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요소다.

뮤지컬과 영화의 독특한 결합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 공식 포스터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 공식 포스터 ⓒ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이날 세 번째로 선보인 <이국정원> '라이브 더빙 쇼'에서는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공연 초반, 갑작스러운 기계 고장으로 배우들이 확인해야 할 정면 모니터가 꺼진 것. 그러나 5명의 뮤지컬 배우 박형규, 수안, 손현정, 서현우, 최미용과 폴리 아티스트로 활약한 배우 박영수는 무대 뒤편의 스크린을 확인하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만족스러운 공연을 했다. 

이런 '라이브성'이야말로 뮤지컬과 영화, 공연과 영화의 결합이어서 가능한 돌발 상황일 터. 21일 시작해 24일까지 계속되는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IMFF 2015)은 이렇게 그간 쉬이 접하지 못했을 다수의 특별한 공연과 상연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충무아트홀 대극장과 중극장 블랙,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어울림광장, 메가박스 동대문점 M관에서 진행되는 CHIMFF 2015는 총 8개의 섹션, 12편의 장편 영화 상영과 라이브 더빙 쇼 공연으로 구성됐다.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헤어스프레이>의 원작영화와 최신 할리우드 뮤지컬영화 <저지 보이스> <숲속으로> 상영, 영화 <미녀는 괴로워>와 함께하는 포럼M&M(Movie&Musical),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즐기는 '싱얼롱 침프'까지 다채로운 형식이 눈길을 끈다.

더불어 90주년 기념작 <오페라의 유령>의 라이브 공연 무대, 라이브 음악과 함께 즐기는 특별 시나리오 리딩 공연 <만추를 읽다>는 <이국정원>과 더불어 CHIMFF 2015가 힘을 주어 강조하는 특별한 공연이다. 특히 24일 오후 8시 상연되는 <만추를 읽다>는 <청춘의 십자로> <이국정원>에 이은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복원공연 3탄 격이다. 지난 4월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만희 감독 40주기 전작전 폐막 공연을 접한 김홍준 CHIMFF 2015 예술 감독이 적극적으로 프러포즈해 이번 공연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상영본이 남아 있지 않아 더욱 전설로 남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라이브 연주와 함께 배우들이 리딩하는 형태로 꾸며진다. 배우 이혜영의 더빙 아래 시나리오로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영화가 낭독 공연으로 재구성된다.

CHIMFF 2015는 일종의 프리페스티벌 형식으로 내년 정식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내년엔 또 어떤 크로스오버와 독특한 예술적 향취로 무장한 작품을 내놓을지 벌써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국정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