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거벗은 페미니스트>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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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페미니스트>(루이사 아킬리 감독·오스트레일리아·2003)는 ‘포르노는 여성을 증오하는 언어형식’이라는 평서문과 ‘만약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포르노그래피 배우를 선택하겠느냐’는 의문문으로 시작된다.

'식상한' 평서문과 의문문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러나, 전혀 식상하지 않게 전개되다. 식상하기는커녕 흥미진진하다. 제6회 서울여성영화제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벌거벗은 페미니스트>는 포르노그래피를 다룬 '식상하지 않은' 다큐멘터리다.

그 여자들의 사정

“14살 때부터 내 길이 섹스산업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키스 부스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남자가 내 키스를 얻어내면 1분 정도 짜릿한 키스를 하는 거예요. 애무하지 않고 그냥 키스만.”

“교회와 가족을 한꺼번에 엿먹이는 방법이 누드배우가 되는 거였어요.”

“같이 살던 남자가 월세를 내기 위해 나를 배우로 일하게 했죠. 그런데 하다보니 이 일이 내가 잃어버린 뭔가를 찾아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너무나 창조적이고 소중한 일이에요.”

포르노그래피와 여성주의의 만남

포르노그래피 하면 떠오르는 우울한 그림들-인신매매, 마약중독, 폭력조직의 착취로 찌들고 불행한 여성들-은 적어도 <벌거벗은 페미니스트>에는 없다(현실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씩씩하고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리고 그런 밝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를 찬성하는 자신들은 여성주의적 포르노 배우(혹은 제작자)라고.

도저히 화해하지 못할 것 같은 두 영역, 포르노그래피와 여성주의는 이렇게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접촉을 시도한다.

그들은 여성주의적 포르노그래피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여성주의적 포르노란 여성의 통제하에-이를테면 여성이 언제 옷을 벗고 누구와 어떻게 섹스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식의- 여성의 욕망을 전달하는 포르노를 일컫는다. 그들은 희생자나 패배자로 불리길 거부하며 성인영화의 배우며 제작자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여성은 “일이니까 음경을 빨지만 일을 얻기 위해서라면 음경을 빨지 말라”고 조언한다(음경을 빨아줄 다른 여자는 언제든지 나타날 것이며 그렇게 해서까지 일을 얻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 포르노 가능할까?

그렇다면 여성주의적 포르노그래피는 실제로 가능하단 말인가? 아킬리 감독은 ‘포르노에 대한 판단 대신 이런 생각을 하는 여성들도 있다는 것을 봐달라’고 주문했지만 <벌거벗은 페미니스트>는 그리 간단히 넘길 영화가 못되었다. ‘아 이런 생각을 가지는 여자들이 있구나’하고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무언가가 남는다는 말이다.

그들이 여성주의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여성주의적 포르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여성의 욕망을 여성의 통제하에 표현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포르노라고 말한다.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자의적이기 짝이 없는 정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대관절 여성의 욕망이란 게 뭐지?’하는 뚱한 생각을 참기 힘들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사실 우리는(심지어 여성들도) 여성의 욕망에 대해 그리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남성지배적인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여성 자신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성의 욕망은 부정되고 왜곡당했다.

그 중에는 처음에는 여성의 욕망이었으나 남성의 욕망으로 환원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마치 화장을 하고 몸을 꾸미는 것이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 사랑과 관심을 얻고자 하는 행위인지,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자아실현의 행위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은폐되고 왜곡된 여성의 욕망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럼 그들이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는가? 영화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흥미롭게 불편한 영화 <벌거벗은 페미니스트>

또한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성의 통제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호하다. 그들이 실제로 통제하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몸, 그들의 섹스타이밍, 체위? 정말 그러하다면 그들은 ‘배를 집어넣고 섹스신을 찍’을 필요가 없었다. ‘아침 9시에 일어나 항문성교를 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여성이 주도적으로 지시하고 여성이 리드하는 체위로 섹스를 하는 것이 곧 여성의 통제라고 여긴다면 그건 너무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이다.

그들이 통제한다고 주장하는 내용들이 남성들의 판타지가 허용하는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하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일반적’ 포르노에 물린 남성들이 즐길 수 있는 조금 색다른 포르노와 별반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여기서 물음은 다시 여성의 욕망에 대한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이쯤에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 역시 여성주의적 포르노를 원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보면서 성적 흥분을(불편함과 역겨움 대신)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전혀 ‘땡기지 않을 때’ 피와 열정의 온도를 올려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부심과 협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뿐만 아니라 우리도) 여성의 욕망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더 고민해야 한다.

여성들은 ‘의외로’ 남자가 주도하기를 혹은 단순한 삽입섹스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성의 정액을 얼굴에 맞으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여성들의 욕망이 위와 같은 ‘~할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의 문장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페미니스트>는 그 불확실함에 대해 명료해지기를 요구한다. 포르노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그저 성적 표현과 여성들의 욕망에 대해서. 그리하여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욕망에 귀기울이고 우리의 어머니와 자매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벌거벗은 페미니스트>가 흥미롭게 불편한 영화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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