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여성의 날마다 기다리는 영상이 있다. 마리끌레르에서 기획한 '젠더프리 2024'다. 올해로 일곱 번 째를 맞은 '젠더프리'에는 여성 배우들이 나와 영화, 드라마, 연극 속 남성 캐릭터를 독백 연기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흑백으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에서 내가 몰랐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이 배우가 눈썹을 이렇게 잘 썼던가? 문장 사이의 호흡으로 왜 나까지 숨가쁘지? 등등. 10분 남짓한 영상이 끝나면 '나중에라도 꼭 이런 역할 맡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게 된다.
 
 <젠더프리 2024> 프로젝트에 참여한 8명의 배우들

<젠더프리 2024> 프로젝트에 참여한 8명의 배우들 ⓒ 마리끌레르

 
2018년 처음 시작한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어느덧 일곱 번째 여정을 맞았다. "성과 여성은 형용사가 아닌 수많은 명사 중 하나일 뿐이며, 남성과 여성만이 성별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정의한 이 프로젝트는 여성 배우들이 더 많은 작품에서, 더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기를 기대하며 출발했다. 

첫 영상이 공개되자 뜨거운 반응이 일었다. 한 독자는 "이 영상으로 한국에서 여성 캐릭터를 얼마나 편협하게 다뤘는지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멋지고 무한대의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가두다니"라고 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들이 직접 고른 작품 속 대사가 <신세계>, <연애의 목적>, <올드보이>, <베테랑>, <동주> 등이었다.

지금까지 범죄 스릴러, 끌림과 본능에 충실한 멜로물, 역사물 등의 장르는 남성 캐릭터가 중심이었다. 누군가의 애인, 아내, 어머니가 아니라 자립한 인물로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는 여성 캐릭터가 드물고 귀한 때였다. 

그렇게 젠더프리 프로젝트는 미지의 세계를 열어젖힌 듯한 쾌감과 낯섦을 줬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신세계였고 그 호응에 힘입어 프로젝트는 7년 째 유지됐다. 첫 도전만큼의 신선함이 사라져서일까.

젠터프리 2024는 공개한지 3주가 넘어가는 시점임에도 조회수가 10만이 채 안 된다. 물론 조회수가 관심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수치라고 볼 순 없지만 열기가 사그라든 것은 확실했다. 이 정체가 젠더 반전을 넘어 '젠더 프리'로 향하고 있는 과정일지. 2024년에 오면서 여성 배우가 그린 서사와 얼굴을 되짚어봤다. 

기억나는 여성 캐릭터 5명, 5초 안에 대시오!

누군가 내게 '여성 캐릭터 빨리 말하기' 퀴즈를 낸다면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다. 최근 인기인 <눈물의 여왕> 홍해인부터 <파묘>의 무당 화림, 새 드라마로 돌아온 이보영의 <대행사>까지. 밤새 끝말잇기를 할 정도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가 차츰차츰 등장했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는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을 원하는 독자들의 욕구가 사람들의 선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콘텐츠의 상업성과 만나 발빠르게 성장했다. 2015년 영화 <차이나타운>이 완벽하게 성차를 반전시킨 범죄물이었다면 그 후 등장한 영화 <마녀>, <컬갑스> 등은 단순히 역할을 뒤집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창적인 서사를 쌓았다. 덕분에 가타부타 없는 초능력을 지닌 고등학생을,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전설의 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동일성이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직업,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여성 서사', '워맨스'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장르적 성공까지 거둔 지금. 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프로젝트 속 남성 캐릭터 연기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은 거친 욕설을 뱉는 여성, 남다른 정의감을 가진 여성, 부패한 권력에 아첨하는 여성 모두 스크린 안에서 이미 만나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성 서사'라는 말, 이제 지겨우신가요? 

여성 배우가 연기할 역할이 많아진다는 것은 성별, 나이, 외모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 활동할 수 있는 입지가 다져진다는 뜻이다. '연기력'만으로 설 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변화가 참 반갑다. 물론 따가운 시선도 있다. '여성 서사'와 '여성의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벌써 지겹다는 것이다. 지금껏 무수한 장르물이 '남성 서사'라는 이름 없이 당연한 권력을 갖고 창작되기를 반복한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심정도 든다. 그렇지만 내게도 이 비판은 반은 틀리고 반은 생각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유의미했다. 

사실 나도 '여성 서사', '주체적 여성 캐릭터'라는 말이 지겨웠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 서사'라는 말로 독창적인 장르가 하나의 틀 안에 굳어지는 것에 회의적이다. 여성 서사가 대중에게 각인됐다면 이제 서브 컬처로 남는 게 아니라 주류 장르로 들이려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새롭게 불어온 흐름을 충분히 정돈한 후 다음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인지 배우는 <젠더프리 2024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멋있는 거 하고 있어, 깨어 있는 사람들이야'하는 생각에 도취되어 오히려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은 아닐지 예민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 생산 구조도 고민해봐야
 
 한국 근현대사와 범죄 스릴러가 결합된 <작은 아씨들>

한국 근현대사와 범죄 스릴러가 결합된 <작은 아씨들> ⓒ tvn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된 2018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사람들이 젠더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젠더 프리가 '여성 배우'들의 한계를 지우고 입지를 넓히는 방식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이 프로젝트가 '여성 캐릭터', 즉 보여지는 텍스트를 집중해 미디어 산업의 성평등에 집중했다면 거시적인 차원의 접근도 도전해보면 좋겠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로 배급과 투자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CP-감독-작가-미술감독, 전 캐스팅의 70%가 여성으로 구성됐던 환경이 드라마 <작은아씨들>에 어떤 차별성을 가져왔는지 얘기해볼만 하다. 

한편으로 '젠더 프리'는 반드시 여성 캐릭터에게만 중요한 화두가 아니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있다. '상남자'를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서 유약하고 용기 없는 남성 캐릭터 또한 경계를 허무는 젠더에 속한다.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장면이 성별에 부여된 전형적인 모습을 오히려 선명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용기의 크기, 주체성의 정도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이 미디어를 넘어 현실에서도 적용되길 바라며, <젠더프리 프로젝트 2025>를 기다려본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여성의날 여성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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