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가장 냉엄한 심판자다. 더없이 화려한 성취도 시간 앞에선 퇴색되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영광은 보잘 것 없는 소동이 되고, 어느 성공은 도리어 야비한 술수의 결과로 드러난다. 걸작이라 평가됐던 작품이 완전히 잊히는 것도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다. 잔뜩 휘저어진 흙탕물을 말끔히 정돈하듯, 시간은 남겨질 것과 사라질 것을 가름하는 가장 권위 있는 심판자로서 제 역할을 완전히 수행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끌어내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재평가되는 작품도 있다. 당대 시장에선 외면 받았으나 훗날 그 가치가 인정돼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경우다. 시간 앞에 퇴색돼 그 매력이 사라지는 작품이 여럿이라지만, 몇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만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이런 작품을 대면하자면 왜 그때는 몰랐을까 하는 한탄이 절로 새어나오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걸작들이 당대의 성공작을 훌쩍 뛰어넘는 가치로 평가되는 것도, 초판도 팔지 못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거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의 사례 또한 유명하다.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퇴색되지 않는 무엇, 작품이 영속하는 생명력을 얻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년, 천국에 가다 포스터

▲ 소년, 천국에 가다 포스터 ⓒ 청어람

 
당대엔 실패했지만 기억되어 마땅한
 
<소년, 천국에 가다>는 2005년 개봉해 고작 20만 명의 관객이 든 영화다. 명실공히 충무로 대표배우로 거듭난 박해일과 염정아가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흥행참패였다.
 
영화는 평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아이가 하룻밤에 어른이 된다는 설정은 이미 할리우드 성공작 <빅>이 그려낸 바 있고, 미혼모를 향한 아이의 짝사랑 역시 그다지 새로운 착상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진 탓이다. 여기에 더해 시골과 동심, 막무가내 판타지란 설정이 식상하고 지루하단 이미지까지 빚어내며 당대 관객 또한 영화를 외면하였다. 그리하여 영화는 오랫동안 어디서도 거론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이 영화를 다시 보자면 도리어 건질 구석이 적잖다. 과거 촌스럽다 여겨진 여러 모습은 나름의 특색으로 자리하고, 시간이 지나서도 무너지지 않는 매력들이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덕이다. 그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매력들이 어느덧 영화를 휘어 감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 도리어 제 값을 발하는 작품이 이런 걸 말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영화는 여러모로 참신하다. 이야기는 13살 소년 네모(김관우 분)의 이야기다. 홀어머니(조민수 분) 슬하에서 자란 네모는 어느 날 갑자기 고아 신세가 된다. 아이의 시선으론 좀처럼 알 수 없는 어른의 삶, 시계방 주인으로 야무지게 살아갔던 엄마에게도 때때로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흉악범이라 오래 감옥에 있다고 말하지만 아이에게 약속한 출소일이 다 되어도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른다.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청어람

 
미혼모를 사랑한 13살 소년
 
어느 날인가, 홀로 서울로 떠났다 돌아온 뒤엔 희망이 없다며 무너지고 네모는 그런 엄마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마침내 세상을 저버리고 홀로 남은 네모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네모의 삶 가운데 한 여자가 다가든다. 엄마의 시계방 자리에 새로 문 연 만화방 주인 부자(염정아 분)가 바로 그녀다. 그녀가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란 사실이 네모에겐 남다르게 다가든다. 미혼모였던 엄마의 가게에 새로 자리를 튼 또 다른 미혼모, 네모는 오로지 그 사실 만으로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유별나기론 동네에 짝이 없던 네모다. 네모는 곧장 부자의 삶으로 성큼성큼 다가선다. 마침 가게가 만화방이니, 접근하는 데도 어려울 게 없다. 미혼모라 해서 주눅이 들 게 없다며 다짜고짜 당당하라 조언하고, 그녀의 주변으로 파고들어 일상을 함께 한다. 급기야 다른 어른을 가장하여 구애의 편지를 보내 부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로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는 것이다.
 
동네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나타나겠다는 네모의 마지막 편지에 부자는 동요한다. 그녀는 아들 기철(류종화 분)과 함께 극장을 찾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가 끝나기만 기다린다. 그러던 중 극장엔 불이 나고, 출구로 몰려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철의 손을 놓쳐버리게 된다. 때맞춰 나타난 네모가 부자를 밖으로 내몰고서 기철을 찾아 상영관 안으로 되돌아가는 건 필연적 수순, 그렇게 이야기는 본격적인 판타지로 접어든다.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청어람

 
하루를 일년처럼, 소년에게 주어진 80일
 
영화 속엔 아직 죽은 이가 저승에 닿기 전 죽은 이가 잠시 머무는 공간이 등장한다. 강을 건너기 전 꽃으로 가득한 기차역사에 두 명의 사자가 한 아이를 두고 대화를 한다. 말인즉슨 고작 13살에 죽어 온 아이의 예정된 수명이 13살이 맞느냐는 얘기다. 혼란을 방지코자 저승에선 두 사자에게 같은 명부를 주고 교차해 검토하도록 하고 있는데, 한 사자의 책엔 아이의 수명이 93세라 나와 있는 것이다.
 
두 사자는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이에게 온전히 80년을 더해주면 뒤탈이 날 수 있으니 하루를 일 년처럼 80일만 더 살게 하고 잡아오자는 이야기. 온전히 80일을 살도록 하려니 시작부터 장성한 청년의 몸으로 아이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네모가 어른(박해일 분)이 되어 제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연유가 이러하다.
 
이로부터 영화는 네모가 제 신상을 감추고 연모하는 부자에게 다가서는 이야기로 꾸려진다. 아들 기철을 함께 키우자며 주어진 시간을 다 바쳐 부자에게 구애하는 것이다.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의 좌충우돌 사랑이야기는 사랑의 본래 모습을 관객 앞에 일깨운다. 제 가진 것을 다 내어 주려는, 나보다 남을 우선하는 마음 말이다.
 
재고 따지며 조건 좋고 어여쁜 이를 얻으려는 이로 넘쳐나는 어른들의 연애사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순수함이 그 안에 담겼다. 절정의 연기력을 구가하는 두 배우 박해일과 염정아가 이토록 순박한 이야기에 진솔함을 불어넣는다.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소년, 천국에 가다 스틸컷 ⓒ 청어람

 
재평가 돼 마땅한 독창적 영화

<소년, 천국에 가다>는 현실과 상상의 영역을 넘나들며 관객에게 순수한 마음을 전하려 든다.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온 아이의 이야기와 그를 애달피 여겨 응원하는 사자들의 모습, 다시 그의 기적적 귀환을 마음을 열고 돕는 이들까지 모두의 이야기가 나름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또 영화적 표현 역시 담박하면서도 진솔하여 영화를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박찬욱, 최동훈 등 이제는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물이 된 이들이 각본작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엔 독창적인 요소가 적잖다. 앞서 언급한 <빅>과 같은 작품이 있다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다른 영화에선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다. 판타지와 일상의 절묘한 넘나듦과 다른 곳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캐릭터,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삽입곡이 모두 제 역할을 한다.

유별난 아이의 짝사랑과 미혼모의 애달픈 마음, 이 모두를 삶 가운데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록 하는 자연스런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같은 시대 시류에 영합한 많은 영화가 퇴색되는 동안 <소년, 천국에 가다>는 도리어 제 색채를 선명히했다. 그럼에 이 영화가 시대를 넘어 재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라 하여도 누구도 반박할 수는 없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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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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