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고정관념이 있다. 인간의 이성이란 한계가 있고 유연하지 못하여 자기 밖의 대상에 대해 도식화된 관념을 만들고 유지하는 탓이다. 실제와는 다른 관념일 때가 적지 않지만 인간은 그 다름에 주목하는 대신 제 관념을 유지하는 데 더 공을 들이고는 한다. 그것이 보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약자는 선하다거나, 동아시아인은 성실하다는 것, 육식을 하는 게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거나 책을 읽는 이는 현명하다는 사실이 모두 고정관념일 수 있다. 물론 고정관념 가운데 많은 경우가 사실일 수가 있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식보다 재빨리 변하게 마련이므로.
 
고정된 관념은 사람과 사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좁게 한다.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좁은 관념을 유지한다는 건 인간이 제 적응력을 잃어간다는 걸 뜻한다.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저만을 붙들고 산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럼에 고정관념을 깨어 부수는 일은 유익할 밖에 없다.
 
스파이 포스터

▲ 스파이 포스터 ⓒ 20세기 폭스

 
첩보물 고정관념과 정면승부
 
스파이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이 있다. 성적 매력이 풀풀 풍겨나는 매력적인 남녀가 특별하고 세련된 무기를 빼어 들고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스파이 시리즈의 신화적 작품 <007> 시리즈와 새 시대 첩보영화가 도래했음을 알린 <본> 시리즈, 그밖에 스파이가 나오는 여러 콘텐츠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보인 영향도 있을 테다. 어디서도 뚱뚱하거나 못난 이가 스파이가 되어 등장하는 영화를 만날 수 없지만 모두가 이를 그러려니 여겼다.
 
고정관념이 강해질수록 이를 깨는 일의 쾌감도 커지게 마련이다. 영화 <스파이>가 도전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제목부터 '스파이'에 대한 영화임을 표방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존 첩보물의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비틀고 풍자한다. 쌓일 대로 쌓인 장르적 고정관념이 그 자체로 재료가 되고, 이를 하나씩 허무는 과정이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치 잔뜩 차오른 고름을 손톱으로 톡 찍어 터뜨리는 것처럼.
 
주인공은 CIA 요원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 분)다. CIA, 그것도 정식 요원으로 입사한 그녀지만 현장에는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내근으로 발령이 난 후 일류요원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 분)에게 발탁되어 그의 작전을 보조하는 역할만 수행해온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임무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핵무기 밀거래를 추진하는 악당을 막기 위해 파티에 잠입한 브래들리를 본사 사무실에 앉은 수잔이 알뜰하게 돕는다.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뚱뚱한 스파이의 폭발적 매력
 
수잔과 함께하며 승승장구하는 파인, 그러나 내근직인 수잔은 조금도 주목받지 못한다. 현장직이 모든 영광을 차지할 뿐 아니라 그의 성과 아래 그녀의 공로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수잔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몰래 파인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의 짝사랑, 못난 외모 탓에 파인이 저를 여자로 봐주지 않지만 그녀는 홀로 그를 향한 마음을 키워왔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리란 기대를 남몰래 품고서.
 
불행은 한 순간에 닥쳐온다. 소형 핵무기 밀거래를 막기 위해 재차 작전에 투입된 파인이 임무 도중 살해당한 것이다. 범인은 막대한 부호로 핵무기를 갖고 있는 레이나 보야노프(로즈 번 분), 파인이 임무 중 제거했던 타깃의 딸이다. CIA는 이내 파인의 임무를 대신할 요원 선발작업에 착수하고 마침내 뒤를 이을 요원을 가려내기에 이른다.
 
영화는 그간 내근직만 전전했던 수잔이 현장 요원으로 거듭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뚱뚱하여 둔하기만 할 것 같던 그녀가 훈련소에서부터 탁월한 실력을 선보였다는 사실도 추가로 드러난다. 다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사고를 쳤던 전과가 있고, 실전에 투입된 경력도 전무하다는 단점이 언급될 뿐이다. 책임자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발탁하고 현장에 수잔을 파견한다.
  
스파이 스틸컷

▲ 스파이 스틸컷 ⓒ 20세기 폭스

 
클리셰가 깨어질 때의 통쾌함
 
그녀의 발탁에 분노한 다른 요원도 없지 않다. 자칭 최고의 요원이라 떠벌리는 릭 포드(제이슨 스타뎀 분)가 바로 그다. 외모로만 보면야 그보다 나은 인재는 없을 듯도 하지만 상관의 명령에도 불복하고 무단으로 현장에 나가 수잔의 임무를 방해하는 데야 이해할 도리가 없다. <스파이>는 수잔이 좌충우돌하며 보야노프의 주변에 침투하는 과정과 릭이 그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을 절반의 코미디와 절반의 첩보물로 무난하게 다뤄낸다.
 
<스파이>는 첩보물에 켜켜이 쌓인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전진한다. 스파이는 잘생기고 날렵하리란 편견을 첫 등장부터 깨부수더니, 스파이물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추격액션을 속도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시퀀스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상대를 제압하는 격투신부터 그 뒤처리에 이르는 장면도 당혹스러울 만큼 가볍게 연출된다. 언제나 전문성 가득한 요원들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그려지던 과거의 첩보물을 생각한다면 CIA 본사의 상황도 어처구니없을 만큼 낙후돼 있다. 볕이 들지 않는 지하 사무실에 박쥐며 쥐가 출몰하고, 직원들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시간을 죽이기 일쑤다.
  
스파이 스틸컷

▲ 스파이 스틸컷 ⓒ 20세기 폭스

 
기꺼이 망가져준 스타들의 용기
 
설정부터 연출, 장르성 자체를 비트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기라도 한 양 작품은 굳이 과거 첩보물의 클리셰를 일깨워 가져온 뒤 그것을 예상과 다르게 활용한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량, 시멘트 공사 중인 도로에 떨어진 스쿠터, 살해된 시신 위로 뿜어지는 토사물, 진지한 외모에 비해 허당끼가 넘치는 요원들 같은 것이 이 영화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 멜리사 맥카시가 주연을 맡은 대신 주드 로와 제이슨 스타뎀 같이 존재감 있는 배우를 주변에 둔 것도 상당한 효과를 발한다. 다른 영화라면 멋있어 보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두 배우가 <스파이>에선 위선과 허당의 상징이기라도 한 양 부족하고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아떨어지니 모두가 <스파이>에 대하여 첩보물을 효과적으로 비틀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영화의 가치도 여기에 있다. 멋지고 세련되며 속도감 있는 첩보물은 많다. 그러나 전형을 생각하게 하고 이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비틀고 꼬집어 그 맛을 더하게 하는 작품은 정말이지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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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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