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신생대의 삶>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신생대의 삶>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1.
임정환 감독의 전작 <국경의 왕>(2017)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의 에피소드를 담은 작품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폴란드로 향한 유진(김새벽 분)과 우크라이나로 간 동철(조현철 분)이 각자의 기묘한 일상을 겪는다는 것이 커다란 뼈대다. 그는 자신의 첫 장편이었던 <라오스>(2014)에서도 비슷한 작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던 바 있다. 라오스를 찾은 영화과 졸업생들의 여정.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타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업과 기존에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서사의 형식을 탈피하는 이야기 구조다. 그의 작품에서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의 서사로만 향하지 않는다. 장면이나 감정, 인물의 형태 또한 정확히 하나의 의미로만 수렴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에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현재의 이야기가 어떤 모양의 미래도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독의 믿음이 엿보이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수렴하면서도 확장하는 양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감독의 신작이자 이번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신생대의 삶> 역시 그가 그동안 해왔던 작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발트해 인근의 리투아니아라는 조금은 생소하기도 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에서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감정과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 그려진다. 인물과 사건, 이야기보다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시간들에 대한 시선이다. 이는 타이틀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공룡이 멸종한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하는 지질시대의 구분 용어'를 뜻하는 '신생대'는 지금 우리의 시간 역시 신생대의 어느 순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신생대, 6600만 년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을 채우고 있을 수많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순간까지도 모두.

02.
"남편이 실종됐어. 6개월 동안 찾을 수가 없어."

영화는 실종된 남편을 찾아 리투아니아로 향하는 민주(김새벽 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비트코인으로 떼돈을 벌겠다며 설치다 사라진 남편은 자신을 찾아달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다. 남편을 찾는 일은 처음부터 쉽지 않다.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물론, 묵기로 했던 숙소는 모든 게 고장 난 채로 호스트의 뻔뻔함만 남겼다. 그나마 대학 후배인 오영(심달기 분)을 만난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오래전 리투아니아로 넘어와 살고 있는 그녀는 준화(박종환 분)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밤새 어울리며 술을 마시던 세 사람의 하루는 민주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전혀 다른 순간이 된다. 오영과 준화가 이별을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다툰 다음 날이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아갈 것 같던 이야기는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오영은 아는 체 인사를 건네는 민주를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준화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찾아와 자신을 국제 형사 기구의 경찰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의 장면에서는 민주와 준화가 혼인 신고를 앞둔 커플로 등장해 사랑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완성해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감이란 아주 짧은 블랭크와 한 번의 암전뿐이다. 다시 말해,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모든 장면이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평행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 싶기도 하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신생대의 삶>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신생대의 삶>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이와 같은 설정의 표현과 수용이 양쪽에서 동시에 가능한 것은 극 중의 모든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공간은 단순히 이들이 머물고 라포를 형성하는 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의미적으로 조금 더 큰 장소, 이 작품으로 따지자면 리투아니아라는 도시 전체, 아니 조금 더 나아가 인물이 존재하는 공간 모두가 해당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를 강조던 바 있다. 가장 처음에서 민주를 비추던 장면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비추는 대신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배경에 집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호수의 수면 위로 비치는 모습 등이 영화의 프레임 전체를 채운다. 마치 극의 배경이라는 것이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 안에 존재하는 인물의 존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임정환 감독의 공간에 대한 해석과도 맞닿는다. 우리 모두가 신생대에 속하며 그 시간대를 형성했던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하나이듯이,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셀 수 없는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고 다시 떠나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 공간에 해당된다. 물론 작품 안에서는 인물들이 숨 쉬는 배경이다. 그런 맥락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리투아니아라는 공간은 이 작품을 직립시키기 위해 반드시 이해시키고 전달해야 하는 요소이며 극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전경은 이를 위해 존재한다.

04.
이 작품이 말하는 공간은 아득한 시간 위에 세워지는 것이나 다름없고, 누군가의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된 결과인 셈이다. 영화 곳곳에 삶과 죽음에 대한 소스가 남겨져 있는 이유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이 조금은 정적이고 차분한 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전체의 리듬이 하강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김새벽 배우가 주연을 맡은 민주는 여러 장면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술에 취해 상기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터져 나올 듯한 행복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반복되는 상황을 비틀어 소소한 웃음을 지어내기도 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후반에 놓여 있는 죽음에 대한 상념과 대비되며 서로의 의미를 일으켜 세우는 식이다.

오랜만에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난 기분이다. 인물의 이야기를 따르는 일이 하나의 서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극의 전체와 일부 어느 쪽을 바라보더라도 어떤 의미가 남게 되는 것 역시 그렇다. 하나의 서사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 서사의 틀을 형성하는 일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감독의 연출이 가진 미학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시간의 아득함에 대해 생각하면 가끔 외로워지기도 하지만 사라짐과 고난이 비단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던 감독의 마음이 오롯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 신생대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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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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