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레슨>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레슨>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관계의 정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혼자서도 잘 피어나는 것이 사랑이고 수면 아래에서도 오래 살아남는 것이 사랑이니까. 다만 외부로 드러나는 일면을 위해서라면 그 관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표면으로 드러난 사랑은 자신이 놓이는 자리에 따라 서로 다른 대우를 받는다. 대체로 사회적 관습이나 합의에 의해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 감정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또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걸음의 보폭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의 정립은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한다.

영화 <레슨>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 과외 일을 하는 경민(정승민 분)과 그의 여자친구인 선희(전한나 분), 그리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영원(이유하 분)이다. 세 사람은 각자의 마음과 사정에 따라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 하기도 하고, 더 이상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상대가 머뭇거리는 시간 속에서 그 관계의 부등호 사이에 표류하기도 한다. 영화가 하나의 인물에 고정된 설정을 대입하고 있지 않은 부분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떤 인물은 나아가고 싶어 하기만 하고, 또 어떤 인물은 그렇지 않기만 하는 식으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언젠가의 관계에서 답답해하고 부담스러워했던 상대의 행동을 이번에는 자신이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02.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이야기의 시작은 경민과 선희로부터 시작된다. 3년째 연애 중인 두 사람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결혼을 통해 애인이 아닌 부부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선희와 결혼을 억지로 떠밀려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경민. 이 지점에 대한 그의 태도는 꽤 강경해서 선희가 꺼내는 결혼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 앞에서는 철저히 대화를 끊어낸다. 대안으로 경민이 제시한 동거는 반대로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 어쩐지 결혼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선택인 것 같아서 싫다.

그런 두 사람의 불안한 관계 사이로 한 사람이 등장한다. 피아노 선생님 영원이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싶어 영어를 배우고 싶다던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소개로 영어 과외 일을 하고 있는 경민을 찾아오게 된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도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는 마침 피아노에 관심이 있고, 두 사람은 재능 교환 형식으로 서로의 레슨을 돕기로 한다. 그들의 수업이 수업으로만 끝났다면 이 영화가 더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온전히 말로 이루어지지만 서로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영어 회화 수업과 페달과 운지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물리적 접촉이 동반되는 피아노 수업. 서로의 레슨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계기가 된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레슨>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레슨>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레슨을 매개로 시작되는 관계의 지점에서 두 인물이 서로 다른 동인을 갖는 부분도 주목해야 한다. 경민에게 있어 영원과의 관계는 일종의 회피다. 친구의 결혼식에 함께 가기를 원하고, 우리의 결혼에 대해서도 진전된 미래를 강요해 오는 선희로부터의 도피. 자신에게 크게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이고 크게 부딪힐 것 같지도 않은 영원의 태도가 그에게는 조금 더 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녀에게 경민은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연애의 공식에 대입된 새로운 남자에 불과하다. 이를 암시하는 장면은 영화 중반부를 지나며 여러 번 제시된다.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온 낯선 남자나 길을 묻는 사람과 나누던 유창한 불어도 그런 근거 가운데 하나다.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

영화가 극 중의 두 관계, 선희와 경민, 경민과 영원의 이야기를 여러 지점에서 마주 보도록 보여주는 이유는 그래서다. 두 관계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경민의 위치가 어느 쪽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에 이를 조금 더 두드러지게 그려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경민은 선희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가 원하는 관계의 진전을 통한 새로운 정의의 시작을 불편해했지만 영원과의 관계로 돌아와서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우리의 관계를 확정하고 싶어 한다. 아직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지금 익숙한 것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기존의 사랑을 대체하기 위해 시작한 관계와 자신이 가진 공식 속에 한 번쯤 대입해 보기 위해 선택한 관계 가운데 더 몸이 기울어지는 것은 어느 쪽이 될까. 한쪽은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만들어온 감정이고, 다른 한쪽은 이제 막 시작된 허상에 가까운 감정일 뿐인데. 죽기 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아버지의 이야길 듣고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는지 헷갈린다던 경민은 지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04.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는 말과 함께 영원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경민은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원을 도와 테이블을 옮기던 날 초인종 소리와 함께 불쑥 찾아왔던 한 남자다. 그때도 그녀는 현관문 밖으로 혼자 나가 짧은 대화만 나눈 채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를 마주한 영원은 단호한 태도로 그를 돌려세운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거실 안의 한 남자.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가 바라보는 것은 경민 하나다. 다만 그때 그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을 뿐이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그때 다른 남자가 서 있었을 뿐이다. 영원의 틀 안에서 반복되었을 뿐인 조각 하나, 그것이 경민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바꿔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고, 다른 방식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경민을 다시 바라본다. 그는 선희도 영어 회화 수업을 통해 처음 만났다. 영원과의 시작점과 같은 모습이다. 경민이 영원의 틀 속에서 하나였듯이, 선희 역시 경민의 틀 속에서 하나였던 것이다. 아마 그런 선희조차 다른 관계와 사랑에서는 자신의 틀 속에 또 다른 누군가를 하나의 조각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경민이 선희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맴돌기만 했던 것은 아마도 그 역시 스스로의 틀 안에서 하나의 조각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아직 잘 몰라서. 우리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자신을 바라보기에도 어딘가 벅차서.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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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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