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반갑다, 새로운 사극 속 여인상
 
tvN 토일 드라마 <슈룹>이 회를 거듭할수록 사극의 여성상을 갱신하고 있다. 사약 사발을 받을지언정 지고지순함을 잃지 않거나, 아니면 갖은 음모와 계략으로 점철된 악독한 여인으로만 이분화되어 그려지던 사극 속 여성상에 잘근잘근 균열이 나고 있다.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중전 화령(김혜수 분)은 빼어난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왕세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한 판 권력 싸움에서 중전으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면 대결을 택한다. 적통 대군임을 내세워 왕세자 자리를 승계하려 들지 않는 용기와 왕세자 자리에 중전의 지위를 걸고 승부수를 던지는 대담함은 음모로 찌든 궁중의 여인이란 오래된 원형을 통쾌히 부수고 있다.
 
엄마들의 정보 싸움이 승패를 가른다는 왕세자 택현전은 엄마들의 대리전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아무리 정보 싸움이 기세를 좌우한다 해도,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보듯, 이미 왕으로서의 자질이 드러나고 있다. 타고나기를 왕이 되고 싶지 않은 왕자들이 태반이고, 왕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의성군(강찬희 분)은 사악하기 그지없다. 변칙과 타협이야 정치적 선택이라지만, 의성군은 늘 비열한 방식으로 싸움에서 이기려 한다.
 
여느 후궁들처럼 고귀인(우정원 분) 역시 아들 심소군(문성현 분)에게 모든 걸 건다. 심소군의 승리에 모자는 물론 가문의 명운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심소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왕자 중에 가장 먼저 글을 깨쳤다는데, 이리 총명하니 고귀인이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심소군은 타고나기를 배포가 없고 궁 밖을 나가본 적도 없어 세상 물정에 어리숙하다. 택현 장정의 시작부터 도적 무리에게 모든 걸 빼앗기며 고전한다. 겨우겨우 걸인 신세로 궁으로 귀환하지만, 이에 절망한 엄마 고귀인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다. 죽어도 길에서 죽으라며 아들을 내치자 심소군은 궁 밖에서 실신한다. 그를 구한 건 중전 화령이다.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택현이 어쩔 수 없는 경쟁이라지만 화령은 맘이 편치 못하다. 경쟁이란 결국 승자와 패자를 남기는 법, 누군가는 밀려나야 한다. 왕자 면면으로 보자면 각각의 재능이 있을 테지만, 실상 왕자란 왕이 되지 못하면 무의미한 인생이다. 사는 내내 역모에 연루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니 행복하달 수 없는 삶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화령으로서는 왕자들 하나하나가 가엽지 않을 수 없다. 엄마에게 냉정히 내쳐진 심소군이 딱하다. 낙심한 심소군에게 왕이 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며 독려하는 모습은 내 자식만 잘되면 그만인 냉혹한 모성을 따뜻하게 극복하고 있다.
 
한편 애초 왕이 되는 일엔 일도 관심이 없는 무안대군(윤상현 분)은 화령의 복장을 긁는다. 어서 혼인해 출궁하는 게 삶의 목적인 그는 택현을 일찌감치 접고 사모하는 여인 초월(전혜원 분)을 찾는다. 이미 앞서 화령에게 매서운 경고를 받았지만 둘은 사랑을 택한다. 택현을 포기하고 초월을 첩으로 들이게 해 달라 청하는 무안대군에게 화령은 화가 뻗친다.
 
"사모하는 여인을 고작 첩의 자리에 두느냐"는 화령의 따끔한 일침은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초월을 불러들여 "여느 양반 사내들과 다르지 않은" 아들의 작태를 지적하며 "사내에게 인생을 걸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그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할 텐데, 오직 왕인 남편의 권력에 해바라기 하며 살아오지 않은 그의 주체성이 엿보인다. 그의 정치적 능력은 힘 있는 자에게서 받아낸 시혜가 아니라, 그가 한발 한발 강단 있게 길을 내며 그 길 위에서 획득한 성취였다.
 
드라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엄중한 화령의 질책에 물러서지 않는 초월은 무안대군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길 뜻이 없음을 당돌하게 밝힌다. 순애보로 일관하던 조선의 여인상을 일단 기개 있게 부숴버렸는데, '간택받는' 여인에서 '간택하는' 여인으로의 전이는 드라마의 또 다른 여인 청하(오예주 분)에게로 이어진다.

청하는 한마디로 천방지축이다. 눈 밝은 그는 일찍이 저잣거리에서 만난 성남대군(문상민 분)을 '간택하고' 그에게 올인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져간 남자가 백마 타고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찾아 나선다. 게다 타고난 긍정과 활기 넘치는 성정은 남자의 무심과 냉담에 전혀 무너지지 않으며 성큼성큼 다가간다. 사랑할 남자를 간택하는 여인은 기존의 사극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신선한 시도다. 그 시대라고 남녀상열지사가 오직 남자에 의해서만 주도되었을 리 없다는 드라마적 상상력은 시청자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다시 초월로 돌아오면, 초월은 화령과 그의 어미 적부터 인연이 있다. 그의 엄마는 누구인가. 노비였고, 주인에게 강간당했고, 그것도 모자라 주인의 무고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여인이다. 지옥의 수렁에서 엄마를 건져낸 이가 바로 화령이었던 것이다. 화령이 초월의 엄마를 구원하는 장면은 성폭행을 바라보는 시대적, 가부장적 횡포를 일거에 일소하며 시대를 횡단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강간해 임신한 배가 남산만큼 부른 노비를 내치기 위해 주인인 양반은 초월의 엄마를 폭행하고 협박한다. 폭력의 현장을 목격하던 화령은 "겁탈하는 것도 모자라 음해하고 모욕하고 또 다른 가해를 저지르는" 양반 놈을 준엄히 꾸짖는다.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며 이어갈 삶을 걱정해 화령을 만류하는 초월모에게 화령은 연대를 선언한다. "내 이미 네 인생에 끼어들었다."
 
하찮게 넘겨버리고 말 노비의 인생에 이 나라 여성 최고 권력이 개입한다는 것은 굉장한 정치적 선택이다. 물건 취급을 당하며 성 착취 대상으로 평생을 가슴 저리게 살아온 여자 노비의 삶에 누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했단 말인가. 누가 노비가 당한 성폭행을 피해라 불러주었으며, 누가 더 이상 가해하도록 두지 않겠다고 나서 주었던가. 그의 개입은 성폭행 피해자를 더 이상 골방에 두지 않고 함께 살겠다는 용감한 정치적 선택이다.
 
노비의 삶에 개입해 초월모를 데리고 간 곳은 일종의 쉼터인 해월각이었다. 초월모가 해월각에서 몸을 풀고 초월을 낳았으니 화령과 초월의 인연은 묵은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월각은 화령에게 어떤 곳일까. 어떤 연유로 해월각을 만들고 유지해왔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나만 잘 살면 되고 내 새끼만 잘되면 그만인 세상에 중전인 여성 최고 지도자가 가장 약한 자에게 보이는 공감과 연대감은 기존 사극의 여인상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고 있다. 그가 더 갱신할 여성 정치 지도자상이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슈롭 여성 정치인 성폭행 피해 간택하는 여인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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